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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8)화 (58/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8화

* * *

“일주일간 고작 이 정도 는 것인가.”

내심 파이팅을 외치며 오늘을 기다렸건만.

안타깝게도 비체라발리 공작은 레이블라가 연무장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업보를 쌓고 있었다.

레이블라가 훈련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오늘 당장 등에 칼이 꽂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매몰찬 소리들을 로이안의 귀에 쏙쏙 꽂고 있었다.

로이안이 어린 맹수 같은 얼굴로 아버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레이블라가 사색이 된 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일단! 쉬면서 하세요.”

큰소리로 외친 후 손뼉을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샬럿이 다가와 물과 수건을 내밀었다. 레이블라는 먼저 공작에게 그것을 건네었다.

“고생하셨어요.”

“아직…….”

“아직은 로이안이 어리니까 자주 쉬어 주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레이블라.”

“로이안. 들었지?”

저를 부르는 비체라발리 공작의 말은 무시한 채 레이블라가 로이안을 보았다. 그에게도 물과 수건을 건네자, 로이안이 뾰로통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무언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뭐지?’

의아함에 눈짓으로 되물었는데, 그가 어이없다는 듯, 배신감에 찬 눈빛으로 받아쳤다.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응시하던 레이블라가 뒤늦게 눈을 크게 떴다.

‘맞다. 황녀.’

어제 황녀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기로 약속하고 그의 속사정을 알아냈는데, 정작 그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 헤어졌었다. 그 일에 심통이 나 있던 모양이었다.

키득. 웃음을 머금은 레이블라가 다시금 그에게 물과 수건을 내밀었다. 받으면 이야기해 주겠다는 듯이.

그러자 그가 한숨과 함께 물건을 받아 들었다. 이렇게 순순하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다시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그랬다간 로이안이 낯부끄러워하며 괜히 수건을 내버릴까 싶어 입 안을 깨물며 참아야 했다.

‘사나운 새끼 늑대 길들인 기분이 이런 건가…….’

그가 얌전하게 물을 받아 들고서 바라보고 있으니 레이블라도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약한 것부터 가기로 했다. 처음부터 자극적이면 뒷이야기가 시시해지니까.

“토도리아 풀이라는 거 알아?”

“그게 뭐.”

“아이가 먹으면 배가 아픈 약초인데, 내가 황녀 전하의 음식에 든 것을 발견했어. 시식가가 되고 처음으로 황녀 전하를 위해 한 일이었어.”

로이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감히 그런 것을 황녀의 음식에 넣는 사람이 있었느냐는 것처럼.

“다행히 오해였어. 그 풀이 피부 미용에도 효과가 있었거든. 최근에 수도에서 유행하는 약초라는데, 사람들이 부작용을 잘 몰랐나 봐.”

로이안이 안도하는 눈빛을 띠며 다시 레이블라를 응시했다. 그게 끝이냐는 듯이.

레이블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물 마시고 나면 또 이야기해 줄게. 전하께서 너에게 편지 쓸 때 무슨 말씀하셨는지 궁금하지 않아?”

아닌 척하면서 그가 받아 든 물을 꼴깍꼴깍 넘기며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토록 얄미웠던 작은 은빛 머리통마저 동글동글하니 귀여워 보였다.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서 손이 간질간질했지만, 제멋대로 나가려는 손을 붙잡고 인내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레이블라가 다시 공작을 보며 말했다.

“로이안 실력이 일주일 전보다 늘었죠? 제라노프 경께서 도련님 실력이 나날이 우수해진다고 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블라는 비체라발리 공작을 향해 눈짓했다.

당장! 칭찬을! 해! 어서!

“나이만 먹은 게 아니라 아부도 늘었군.”

하지만 비체라발리 공작은 또다시 업보를 하나 쌓을 뿐이었다.

아니, 이 악역이 진짜.

부글부글 끓어오르려는 마음을 추스르며, 레이블라가 해사하게 웃었다.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죠. 공작님께서도 내심 그렇게 생각하시잖아요. 그렇죠?”

이 정도면 거의 답지를 떠먹여 주는 꼴이었다.

‘어서 정답을 말하고 좀 친해져라.’

하지만 우리의 비체라발리 공작이 누구던가. 빈말은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냉정하리만큼 딱 잘라 말했다.

“아니다. 진심이다.”

환장하겠네.

이에 로이안의 두 눈이 도끼처럼 매서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이안이 왜 그딴 질문을 하느냐는 듯 쏘아보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 * *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몇 번 찾아오기는 했지만, 레이블라는 그때마다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보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얼른 빌어먹을 황제의 손아귀에서 두 사람을 구해 주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방법을 바꾸기는 해야겠어.’

레이블라는 공작의 파괴적인 언변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원체 무뚝뚝한 편이란 건 알았지만, 자기 아들에게 그렇게 인정사정없을 줄이야.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대놓고 정떨어지라며 고사 지내는 수준이잖아?

‘그래, 문제는 비체라발리 공작이야.’

아들이 마음을 숨기면 다독여서 열 생각을 해야지, 말로 때리면서 바꾸려 들다니.

안 그래도 ‘말’로 다친 아이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언어 교육을 할 수도 없고.’

입양이란 명목으로 이곳까지 왔지만 아직 가문의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상태라 지금 자신의 위치는 노예, 혹은 반역자의 자식 그 어디쯤일 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무려 공작에게 ‘말조심하세요!’라고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둘이 친해지려면 공작이 입을 닫고 있어야 해.’

대련장은 안 될 것 같았다. 검도 없어야만 했다.

산책이나 미술작품 감상 정도면 딱 좋을 듯싶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데다, 부드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적합했다.

‘그러다 보면 대화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고.’

좋아.

결정 내린 레이블라는 아주 은밀하게 헤넌을 찾아갔다. 비체라발리 공작의 일정을 묻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공작님이 집무실에서 나오시게끔 도와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정확히는 식사는 다이닝룸 가서 하게 하고, 쉴 때는 정원이라도 돌게 해 달라는 이야기예요. 그때마다 저에게 꼭 연락해 주시고요.”

그에게는 다소 뜬금없는 부탁이기는 했지만, 헤넌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아가씨 말대로 해 보겠습니다.”

“이유는 묻지 않으세요?”

“그야 공작님과 도련님 때문이겠지요. 그 두 분 문제는 저희 가신들에게도 골칫거리거든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모두가 둘의 문제 상황을 인지하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서지 않으셨어요?”

“아가씨께서 느끼신 그대로입니다.”

아아. 뭘 하려고 해 봤자 두 사람이 엇나가기만 하니 차라리 두고 보는 것을 택했다는 말인 듯했다.

레이블라가 두 사람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은 동안에 사용인들 나름대로 두 사람을 붙여 보려고 애를 써 본 모양이었다.

“저도 딱히 두 분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건 이미 실패했으니까.

한 번 실패해 보고 깨달았다. 서로 대화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화하랍시고 말을 옮겨 봤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란 사실을.

그보다 일단 자주 마주치게끔 하는 게 효과적일 것 같았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한 몸 희생하여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자리할 수 있게 기회를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어느 순간 서로가 편해지고 당연해진다면, 굳어 있던 입술도 조금은 풀릴지 모르니까.

레이블라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서 헤넌이 웃었다.

“저도 할 수 있는 한 돕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고마워요. 헤넌만 믿을게요.”

비체라발리 공작의 일거수일투족이 손안에 들어왔으니. 남은 건 이제…….

“로이안! 밥 먹자!”

그녀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로이안을 쫓아다니는 일뿐!

* * *

“……너 진짜 질린다.”

로이안이 이를 으득 갈면서 고기를 썰고 있었다. 눈빛은 여전히 적의로 가득 찬 상태였다.

하지만 레이블라는 생글 웃었다. 그가 가진 불만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 그와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이블라의 웃음조차 그에게는 진저리치게 끔찍한 모양이었다. 고기를 푹 찍어 입에 넣는 소년의 눈동자에 노기가 가득 차 있었다.

‘먹는 모습은 깔끔하네.’

포크질이 다소 괴팍했을지라도, 전체적인 식사 태도는 귀족의 품위를 지키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외삼촌에 핍박에 제대로 된 식사를 받지 못해, 식탁은커녕 바닥에서 식기 하나 없이 소시지를 먹어야 했던 생활을 해 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물끄러미 보는 눈길을 알아챈 것일까.

귀찮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식사하던 로이안이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뭐를?”

“너, 나랑 그 자식이랑 붙여 놓으려고 하잖아.”

그가 말하는 ‘그 자식’은 비체라발리 공작이었다. 같이 식사하자고 쫓아다니는 일이 공작을 만나게 하려는 일이라고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사실 지난 일주일간 레이블라는 헤넌에게 말했듯, 정말로 충실하게 두 사람을 붙여 놓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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