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7화
헤넌이 또다시 주춤했지만 이내 레이블라를 이끌고 자리를 옮긴 다음 실토하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공작님 때문에 공작 부인께서 사망하셨고, 장례식 때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로이안의 말에 따르면 자길 버렸다고요.”
“아가씨께서는 그 일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로이안의 말을 들었을 때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일단, 로이안은 공작 부부의 사이가 나빴던 것처럼 생각을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어요.”
로이안의 말은 이러했다.
‘그 사람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정작 그 사람은 어머니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어.’
‘그리고 날 버렸지.’
비체라발리 공작이 어머니와 자신을 소홀하게 여겼고, 미련 없이 내버렸다고.
하지만 레이블라의 생각은 달랐다. 분명 공작 부인의 장례식은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치러졌다고 들었다.
냉대받는 공작 부인에게 그런 장례식을 치러 줄 리 없었다.
게다가 공작 부인과 공작의 사이가 나빴다면, 로이안이 후작가로 가서 지내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 아버지인 후작이 비체라발리 공작을 가만두지 않았을 테고, 공작 또한 하나뿐인 후계자를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로이안이 외가에서 자랐다는 건 공작과 후작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애초에 사이가 나빴다면 소문이 났을 터였다.
“조금 의아한 점은 그날 왜 공작님께서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느냐는 거예요.”
근데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면, 왜 부인의 장례식에는 참여하지 않았지?
“무슨 일이 있었나요? 왜 로이안은 부인이 공작님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로이안의 오해를 바로잡지 못할 만큼 바빴던 거지?
레이블라의 물음에 헤넌이 작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포스타리모와의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포스타리모가 척박한 환경 때문에 식량난을 겪었고, 식량이 풍부한 라스텔 제국을 침략한 것 아닌가요?”
“그것도 맞습니다만, 정확히는 ‘포스타리모의 왕녀’ 때문입니다.”
포스타리모의 왕녀가 왜?
‘잠깐. 황녀의 엄마가 포스타리모 출신 아니었나?’
황제가 국경에 있을 때 만난 여자였다고 했다. 하룻밤의 인연이었는데, 그가 황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가 자기 배 속에 든 아이의 아버지가 황제라며 출산하기 직전에 찾아왔었다고.
하지만 황제가 그녀를 의심하며 무시한 탓에 냉궁에서 쓸쓸하게 아이를 낳고 죽었다고 했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의 눈은 황제와 똑 닮은 색채를 품고 있었다.
‘전쟁은 내가 태어났을 무렵 시작되었다고 했어. 황녀와 내 나이가 같으니, 황녀가 태어난 후에 전쟁이 터졌지.’
황녀가 태어난 해와 황제의 즉위 해가 같고, 포스타리모의 전쟁도 황제의 즉위 직후에 일어났었다.
그럼, 그 전쟁이 황녀의 엄마가 죽어서 비롯된 것이었나?
‘자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을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넘긴 거네.’
비체라발리 공작은 그 길로 7년이나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놀라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비체라발리 공작 부인의 죽음과는 상관없어 보였다.
그러자 헤넌이 다시 말을 이었다.
“공작님께서는 돌아가신 에릭 전하의 대관식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너무나도 사랑하는 분이 아팠기 때문이었지요.”
“사랑하는 분이 공작 부인이신가요?”
“예. 도련님과 식사를 하던 도중, 독을 먹고 쓰러지셨습니다. 아주 치명적인 독이었지요.”
에릭 전하라고 하면, 에릭 커티스 라스텔. 지금은 에릭 벤야 트리셰인이 된 칼릭스의 아버지였다.
그는 대관식을 틈타 반역을 저지른 동생 때문에 황관을 써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었다. 반역을 저지른 자는 당연히 리암 커티스 라스텔. 현 황제였다.
리암은 그 자리에서 에릭을 죽이고 핏빛 왕관을 자기 손으로 쓰면서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했었다.
그런데 왜 그 이야기가…… 설마.
레이블라가 눈을 크게 뜨고 헤넌을 바라보았다. 헤넌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공작 부인을 암살한 배후라고 말하듯이.
* * *
헤넌에게 쓸 만한 회계사의 정보를 알려 주고 돌아오면서도, 레이블라는 오늘 들은 충격적인 사실과 제가 아는 사실을 조합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황제가 범인이었다니.’
생각해 보면 비체라발리를 상대로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은 그 미친놈뿐이었다.
‘공작 부인의 사망도 7년 전, 황제가 반역을 저질러 황제가 된 것도 7년 전이야.’
현 황제, 리암 커티스 라스텔이 반역에 성공할 수 있던 이유는 그와 그의 기사단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황태자를 지키는 군대가 손 한번 쓸 새도 없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펠리시티도 그 자리에서 당시 공작이었던 할아버지가 사망하였고, 그 뒤를 이어 아버지가 공작이 되었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현 황제, 리암 커티스 라스텔이 반역을 저지른 날은 7년 전, 당시 황태자였던 칼릭스의 아버지가 황좌에 오르던 날이었다.
수도에는 당연히 즉위식을 보러 온 귀족들이 몰려 있었고, 타국에서도 사절을 보내어 굉장한 인파가 밀집된 상태였다.
당연히 황궁의 경비는 삼엄했을 테고, 최정예 기사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즉위식 때는 제국의 두 공작, 펠리시티와 비체라발리의 기사들 또한 황궁에서 황태자를 지키고 있었을 텐데.
‘공작님께서는 돌아가신 에릭 전하의 대관식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너무나도 사랑하는 분이 아팠기 때문이었지요.’
‘비체라발리 공작이 없어서 쉽게 무너진 거였어.’
비체라발리 공작의 별명은 ‘무패의 기사’였다.
만약 즉위식 때 반란을 일으킨 황제에게 쉽게 무너졌다면 얻지 못했을 별명이었다.
헤넌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날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이유는 당시 공작 부인이 사경을 헤매었기 때문이고, 공작 부인이 사경을 헤맨 이유는…….
‘황제가 반역에 성공하려고 공작 부인을 죽인 거지.’
사랑하는 사람이 사경을 헤맨다면, 다른 일에 신경 쓸 정신 따위 없을 테니까.
황제의 입장에서도 연약한 사람 하나를 죽이는 것이 다른 잡다한 일을 꾸미는 것보다 간단했을 것이고.
와, 이 쓰레기 같은 놈.
칼릭스의 부모님을 죽인 것으로 모자라 로이안 어머니의 목숨도 앗았었다니.
‘그럼 소설 속에서 로이안이 황녀와 결혼하는 건 뭐야?’
아니, 그보다.
‘로이안은 그럼 원수의 딸 때문에 아버지를 죽인 거였어?’
세상에. 미쳤다. 진짜 미쳤어.
이야기의 전말을 파악하고 나니 황제가 새삼 혐오스러웠다. 그건 그냥 쓰레기였다. 쓰레기라고 불러서 쓰레기에게 미안할 만큼 쓰레기였다.
분명 소설 속 황제는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로이안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 모습은 물론 딸과 결혼하는 모습까지 지켜보았음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아무리 소설이 주인공 위주라도 그렇지.’
이게 인간으로서 할 짓인가.
이쯤 되니 ‘남자 주인공’이라는 역할조차 그저 황녀의 자비로움, 모두를 구원해 주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도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남주인 로이안 또한 이 소설의 피해자일 뿐이었다.
‘공작 마음이 이해가 가네.’
상황을 모두 알고 나니 비체라발리 공작이 아들에게 아무 말도 못 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일이 터진 직후에는 로이안이 너무 어렸다. 어떤 말도 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아이가 꽤 자라서 말해 줄 상황이 되었으나, 애석하게도 로이안은 원수의 자식을 빛과 소금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로서는 어떤 말도 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진실을 말하면, 아이가 다시 상처받을 테니까.
‘소설에서 나왔던 공작의 반역 이유 또한 거짓이었던 거야.’
무료해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나왔으나, 아내의 원수를 갚고자 일으킨 반역이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의 로이안은 이미 황녀에게 미친 추종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냥 두고 봐서는 안 돼.’
이건 기필코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마석 광산 때문이 아니라,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있어서는 안 될 비극이었다.
레이블라의 눈에 비친 비체라발리 공작은 너무나도 서투른 아버지일 뿐이고, 로이안은 그 아버지의 진심을 모르는 사춘기 아들일 뿐이었다.
이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모른 채 칼을 겨눈다니. 이걸 무시하고 홀로 떠났다가는 평생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두 사람이 대화하게 만들지?’
지난 일주일간 살펴본 결과, 로이안과 비체라발리 공작이 만나는 일은 오직 로이안의 검술 훈련 때뿐이었다.
그것도 일주일에 딱 한 번. 그마저도 날붙이를 맞부딪치고 있어서인지 둘 다 흉흉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을 바꿀 수 있을까.
‘일단은, 그래. 싸움이라도 막아 보자.’
대화를 하려면 두 사람이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여야 할 테니까.
때마침 내일 비체라발리 공작과 로이안의 대련이 있었다.
레이블라는 두 손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붕괴 직전에 놓인 가족을 황제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 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