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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5)화 (55/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5화

‘비체라발리에 내분이 일어났을 때, 로이안을 도운 이들이 모두 황녀 편으로 그려졌었지.’

모두 하나같이 그녀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비체라발리 영지에서 태어나고 자랐음에도 수장을 향한 충성심이 없었다고.

‘아, 그래서 쟤도 날 그렇게 봤구나.’

황녀를 괴롭힌 펠리시티에 관해서 들었을 테니까.

‘저 아이도 조심해야겠다.’

이 집안에서 조심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그렇게 하나하나씩 로이안에 관해 알아가기 시작한 지 하루가 흘렀다. 그사이 레이블라는 꽤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제국 유일의 공작가 후계자답게 하루 일정이 무척이나 빽빽했다.

아침에 한 시간가량 검술 연습을 하고 나면, 식사 후에는 오전 내도록 소공자를 위한 교육이 있었다.

교육은 일주일을 나누어 3일은 정치, 경제학, 역사. 남은 3일은 수학, 문학, 세계사. 남은 하루는 군사학을 온종일 배운다고 했다.

오후가 되면 매일같이 검술 수련이 시작되는데, 이것은 저녁 식사 전까지 계속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로이안의 자율 연습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로이안의 일상은 눈을 뜬 순간부터 잠이 드는 그 순간까지 자유 시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진짜 남 일 같지 않네.’

‘펠리시티의 후계자’였던 레이블라 펠리시티와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이었다.

그래도 레이블라는 전생의 기억이 있기라도 했지, 로이안은 그저 아이였다.

게다가 외가에서 사느라 생긴 공백기 때문에 남들보다 뒤쳐졌다는 불안과 자격지심이 깊은 상태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과표를 따라가다가도, 때때로 무언가 막히는 일이 생기면 더 잘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분해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런데도 그 자격지심마저 극복해 내겠다고 힘차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다크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결국, 제대로 감정 이입해 버린 레이블라는 그를 진심을 다해 응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늦은 오후, 로이안이 제라노프와 검술 훈련을 할 무렵에는 완전히 로이안의 편이 되어 있었다.

그 부작용은 엄청났다.

“아니! 단장님! 어떻게 우리 로이안을 그렇게 때리실 수가 있어요!”

제라노프와 검술 훈련을 하는 로이안이 한 대 맞을 때마다 레이블라는 자기가 더 아프다는 듯 몸을 말며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애가 아파하잖아요!’하고 속으로 안절부절못하면서.

마치, 무척이나 좋아하는 배우의 팬이라도 된 것처럼.

레이블라는 이렇게 진심으로 화를 내고 걱정하고 있는데, 제라노프는 귀여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로이안은…….

닥쳐, 꺼져.

그는 레이블라가 응원할 때마다 제발 닥치고 꺼지라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때마다 레이블라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면서 미움받을 짓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스렸지만, 다짐은 얼마 가지 못했다. 가만히 보다가도 로이안이 맞기만 하면 저도 모르게 빽빽 소리를 치고 있었다.

덕분에 레이블라는 로이안에게 엄청난 미움을 받게 되었고, 덩달아 이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들에게는 웃음을 선사했다.

“덥지? 이거 먹고 해.”

로이안에게 휴식이 주어지자, 레이블라는 부리나케 달려가 그에게 물과 수건을 건네었다.

물론, 로이안은 받아 들지 않았다. 레이블라는 그래도 굴하지 않고 곁으로 다가서면서 새처럼 재잘거렸다.

“배출된 수분은 보충해 주어야 해. 그래야 대사가 활발해지고…….”

“너, 그만하라고 했지?”

“그래도 물은 마셔야 해. 땀도 좀 닦고. 그러다가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저리 안 가?”

로이안은 레이블라가 내민 물과 수건을 짜증스럽게 쳐내고는 저 멀리 가 버렸다. 절대로 따라오지 말라는 듯이 뒤를 흘기며.

그런 그의 뒤를 갈색 머리통의 어린 소년이 쪼르르 따라붙었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 눈이 마주쳤는데,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우리 도련님을 화나게 하다니.’와 같은 소리가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그건 맞긴 하지만.’

그래도 저 꼬맹이. 너무 건방지네.

‘지금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데!’

위기의 가족을 구하려고 하는 거 아니야!

레이블라가 시무룩하게 멀어지는 그들을 보고 있자, 샬럿이 은근하게 다가와서 물었다.

“없앨까요?”

저기, 샬럿? 네가 말하면 농담 같지 않은 거 알고 있니?

“요전부터 느꼈는데, 저 꼬마. 아가씨를 보는 눈빛이 너무 뜨거운 것 같아요. 우리 솜사탕 아가씨께서 녹아내리시면 어쩌려고…….”

말하다 말고 이를 으득 무는 샬럿을 보니 진심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홀로 품었던 짜증은 가슴속에 고이 묻어야 할 듯했다. 저렇게 건방지고 재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로이안의 믿음직한 보좌관이 될 사람이 아니던가.

“새 물과 수건만 가져와 줘요, 샬럿.”

잠시 후, 레이블라는 들고 있던 물통과 수건을 샬럿에게 넘기고 새것으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어차피 로이안은 다시 수련하러 올 테고, 물통과 수건을 건네면서 말을 붙여 친밀해질 기회는 아직 많으니까.

그리고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로이안이 모습을 다시 드러내었다.

잠깐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꽤 수척해 보였다.

“로이안!”

레이블라는 로이안을 보자 힘차게 인사를 건네었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인지, 이제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성큼성큼 그녀를 스치며 걸어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은근히 귀여웠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애써 시선을 주지 않으려는 모습이 꼭 그 나이대 아이 같은 행동이라 레이블라는 저도 모르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 남자 주인공 컨셉이 도도 시크 아니었나.’

소설에서 나온 그는 실버 울프 그 자체였던 것 같은데.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은 그냥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이쁜 강아지처럼 보였다.

‘칼릭스랑 잘 맞겠는데?’

둘 다 날카롭고 예민하게 사람을 쳐내다, 슬슬 녹아드는 것이 비슷했다. 제법 친구로서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어쩐지 두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서 그려졌다. 툴툴대면서 성질을 내는 로이안과 그러거나 말거나 무심하게 지켜보는 칼릭스의 모습이.

‘다음에 꼭 소개해 줘야겠다.’

그날이 곧 오기를 바라면서, 레이블라가 원래의 자기 목소리보다도 발랄하고 힘차고, 크게 소리쳤다.

“로이안 힘내!”

* *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체라발리 공작성은 늘 적막했다. 그들의 주인이 살벌한 전쟁터에 나간 데다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던 작디작은 도련님은 다른 가문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아 우울할 정도로 조용하기만 했었는데, 요즘 분위기가 백팔십도 뒤바뀌었다.

전쟁에 나갔던 그들의 주인님이 돌아와서도, 작디작은 도련님이 돌아왔기 때문도 아니었다.

낯설디낯선 어린 소녀 때문이었다.

“로이안!”

“로이안…….”

“로이아아안!”

귀엽장한 목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허공을 가르면,

“시끄럽다고 했지!”

언제나 도련님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로이안 이거 먹어!”

“안 먹는다고 했지!”

“로이안, 오늘은 좀 키가 큰 것 같은데.”

“저리 가.”

늘 어른스럽게 굴던 그들의 도련님은 소녀와 함께 있을 때면 아이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건 성의 사용인들에게는 참으로 낯선 모습이었다.

사실, 그들의 도련님은 어린 시절만 해도 정말로 사랑스럽고 다정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웃기도 잘 웃고, 미물을 위하는 마음은 어찌나 따스한지.

한 번은 작은 새가 나무에서 떨어진 것을 보고 온종일 걱정하면서, 밤새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던 적이 있었을 정도로 다정한 분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도련님은 조용하고, 예민했으며 차가운 분위기를 폴폴 풍겼다.

여전히 다정한 구석이 있어서, 다른 귀족처럼 사용인들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지만, 누구와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사람을 기피하는 건지 홀로 지내기 일쑤였었다.

물론, 그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비체라발리 그 자체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성의 사용인들은 주인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로이안의 모습이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인 까닭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다가갈 수가 없었고, 그럴 권한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멀리서 안타까워하기만 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어린 구세주는 그들의 무뚝뚝한 주인님에게서 미소를 얻어 내고, 작은 주인님에게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되찾아 주었다.

게다가.

“혹시, 로이안 봤어?”

“도련님께서는 저쪽으로 가셨어요, 아가씨.”

“고마워!”

그녀는 말단 중에서 말단인 하녀에게까지 친절했다. 미소를 잃지 않았고, 시종일관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인형처럼 사랑스러운 외모에 따뜻한 감정을 지닌 아가씨라니.

이런 완벽한 아가씨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 오늘 아가씨와 인사를 나누었어요!”

어린 하녀의 외침에 제각기 할 일을 하던 하녀들이 눈을 번쩍 뜨고서는 우르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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