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4화
로이안의 속마음을 먼저 알아내고, 비체라발리 공작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사과를 시키고, 오해하는 것이 있다면 풀어 주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레이블라는 이른 아침부터 출입문에 귀를 대고 있었다.
“아가씨, 지금 무엇을 하시는 건가요?”
레이블라가 문에 귀가 붙은 것처럼 서 있으니 안에서 침구 정리를 하던 샬럿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걸 보니 ‘혹시 몸에 무슨 문제가 생기신 건가?’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샬럿에게 레이블라는 쉿, 하고 한 손가락으로 입을 막고서 웃었다. 그리고 다시금 문에 바짝 기대어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렸던 소리가 들려오자 레이블라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안녕!”
활짝 웃으면서 인사했지만 이미 인사를 받아 주어야 할 사람은 저 멀리 가 버린 후였다.
그럴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포기하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긴 호흡과 함께 레이블라는 조금 더 발랄하고, 눈치 없이 들이대기로 하며 우다다 달려서 그에게 다가갔다.
“좋은 아침이야, 로이안!”
“꺼져.”
“오늘도 목소리가 곱네. 식사는 했어?”
“꺼지라고.”
“식사 안 했으면 같이 할까?”
“안 꺼져?”
가다 말고 멈춰 선 로이안이 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레이블라에게 뻗었다.
미처 피할 새도 없었던 터라 깜짝 놀란 레이블라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을 꼭 감는 일뿐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프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눈앞에 서슬 퍼런 검날이 있었다. 그리고 그 흉흉한 검날을 마치 비스킷처럼 잡은 두 손가락이 보였다.
레이블라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 그 주인에게로 향했다. 놀랍게도 미래의 검술 천재의 검을 막아낸 사람은 다름 아닌 샬럿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검을 막아 낸 샬럿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레이블라를 향해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으, 응…….”
“저는 또 아가씨께서 솜사탕처럼 녹아내리셨을까 봐 걱정했어요.”
아니, 지금 걱정해야 할 건 네 손가락이야, 샬럿.
하지만 샬럿은 자기 손가락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레이블라의 몸을 살피더니 또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오두방정을 떨며 로이안에게 말했다.
“도련님. 아가씨께서는 솜사탕이세요. 바람 불면 후 날아가신다고요.”
“놔.”
“죄송해요, 도련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가씨께서 옆으로 피하시고 나서 놓아 드릴게요. 검은 아가씨께 닿기엔 너무 날카로워서요.”
로이안이 끙끙대면서 칼을 빼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반면에 샬럿은 그냥 포크를 쥔 것과 다름없는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화가 난 로이안이 레이블라를 노려보자, 레이블라는 그제야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그녀가 물러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샬럿이 검을 놓아주었다.
뒤이어 샬럿이 말했다.
“도련님 검술 실력이 나날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순수한 감탄이었지만, 로이안에게는 그저 비아냥대는 것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소년이 샬럿을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짜증을 내뱉으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 모습에도 샬럿은 우리 도련님 너무 대단하시다며 감동에 젖은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얼빠진 채로 보던 레이블라가 물었다. 말투는 무척이나 공손해졌다.
“샬럿. 혹시 샬럿도 기사예요?”
“에이, 제가 어떻게 기사예요. 저는 암살이 주종목이라 조용히 사람 목만…… 앗. 암살자인 건 숨겨야 한다고 했는데.”
샬럿은 자기 실수를 시인하며 한 손을 볼에 얹고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능청스럽게 구는 건지,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레이블라가 어색하게 웃자,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샬럿이 화들짝 놀랐다.
“아가씨! 혹시 감기 걸리신 거 아니세요? 이마에 땀이 나요!”
발을 동동 굴리면서 샬럿이 레이블라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손짓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암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피할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다.
뒤늦게 레이블라의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순식간에 상대방의 마음을 풀어 놓고, 그사이 목숨을 앗아 가는 방식은 정말이지 암살자의 것이었으니까.
……근데 도대체 왜 이분이 제 옆에 있는 거죠?
* * *
다음 날이 되어서야 샬럿이 왜 그녀의 곁에 있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샬럿이 자기 정체에 대해 밝혔다는 사실을 윗선에 이실직고했는지, 헤넌이 직접 와서 그 이유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샬럿은 기사가 맞습니다. 아가씨께 남성 기사를 붙이는 것보다 여성 기사를 붙이는 것이 좋겠다고 공작님께서 말씀하셔서요.”
“본인은 아니라고 하던데요.”
“그게 다른 기사와 달리 입문 과정이 좀 특수합니다. 태어나길 암살자 가문에서 태어나 열세 살인가, 그러니까 7년 전쯤이었는데, 공작님의 목을 취하겠다고 찾아왔다가 그 길로 기사가 되었거든요.”
……공작의 목을 베겠다고?
‘그냥 호들갑만 잘 떠는 하녀인 줄 알았는데…….’
샬럿. 너 정말 무서운 하녀였구나.
레이블라는 로이안과 대련하던 비체라발리 공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멀리서 봐도 살벌한 기세였는데. 만약 그 모습을 눈앞에서 마주했다면 오금이 저려서 굳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죽이겠다고 나섰다니. 그것도 열세 살에!
“공작님께서 재미있는 녀석이라며 거두시고는 검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 기사의 검보다는 역시 암살자의 그것이 더 잘 어울…… 크흠. 어쨌든 십여 년간 실버 울프에 몸을 담고 있는 기사입니다.”
열심히 세탁해 보려고 했으나, 결국 암살자 특유의 것은 벗길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샬럿이 암살자로서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신의 경계심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던 샬럿의 행보를 되새겼다.
오소소 돋는 소름에 부르르 떨면서 창 너머를 보자, 때마침 샬럿이 정원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샬럿이 어딘가를 응시하면서 사뿐사뿐 걸어가고 있었다. 걸음이 가볍고 발랄한 것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싶을 만큼 흥겨워 보였다.
“샬럿은 비체라발리에 온 후 바로 전쟁에 참전한 터라 아는 이가 적습니다. 아가씨라면 요긴하게 쓰실 수 있을 겁니다.”
헤넌의 말을 들으며 샬럿을 계속 보고 있는데, 벌 한 마리가 빠르게 그녀에게로 날아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샬럿이 무언가 신경에 거슬린 듯 그녀에게 들러붙으려는 꼴이 꼭 침을 쏘겠다는 모양새였는데…… 툭. 샬럿이 손날로 치자 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무척 빠르고 정확한 몸짓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이블라는 다짐했다.
절대, 절대로 그녀를 자극하지 말아야겠다고.
* * *
샬럿으로 인한 예기치 못한 트러블을 뒤로하고, 레이블라는 다시금 로이안 공략에 박차를 가했다.
물론, 방법은 바꾸었다. 또다시 칼을 맞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일단은 어떻게 해야 그에게 친밀감을 줄 수 있을지 파악해야 했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은밀하게 숨어서 ‘로이안의 하루’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로이안의 하루는 아침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시간에도 검술 수련을 하네. 밤에도 하는 것 같은데.”
잠기운이 대롱대롱 매달린 눈으로 멀찍이 떨어진 로이안을 보며 중얼거리자, 샬럿이 답했다.
“소공자님께서는 조금 늦게 검을 쥐셨거든요. 그래서 그 공백을 메꾸시려고 엄청 열심히 하세요.”
“엄청나게 재능이 있어 보이던데, 살살해도 되지 않아요?”
“에이, 안 그래요. 오히려 재능이 있으니 열심히 해야죠. 천재들은 ‘벽’을 보기가 쉽거든요. 남들보다 일찍 다다른다고 해도, 그 ‘벽’을 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요.”
천재일 경우 남들보다 앞서 나갈 순 있으나, 어느 경지를 넘는 것은 ‘천재’라고 다 가능하지 않단 의미였다.
늦게 검을 쥐게 된 로이안으로서는 처음 마주한 벽 앞에서 초조해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쟤는 누구예요?”
레이블라가 로이안 뒤편에서 수건을 들고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샬럿이 아, 하고는 답했다.
“도련님의 시종이에요. 도련님이 직접 데려온 아이라고 알고 있어요.”
“비체라발리 소공자님인데 함부로 들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집사장님께서 직접 조사하신 아이예요.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어 집사장님을 대신해서 도련님을 살피고 있어요.”
로이안이 어른을 껄끄러워하는 탓에 작은 아이를 데려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로이안에게 보좌관이 있었지.’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로이안에게도 나름대로 동료는 있었다.
특히 그의 보좌관은 로이안이 직접 주워 왔고,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다는 설명이 있었다.
‘그 보좌관이 저 사람이구나. 가끔 등장했던 것 같은데 별로 설명이 없어서 몰랐네.’
그 역시 남자 주인공이라고는 하지만, 메인 주인공은 황녀였기에 로이안 쪽 이야기는 상세히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잠깐만.’
아니,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번뜩 뇌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