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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3)화 (53/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3화

지금껏 봐 왔던 것과는 다른 모습에 놀란 레이블라가 곁에 선 제라노프에게 말했다.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제라노프는 그저 곤란한 낯빛으로 웃을 뿐이었다. 이미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는 듯이.

그러는 사이 또다시 비체라발리 공작이 업보를 쌓고 있었다.

“일어나.”

아들이 숨이 차 헉헉대고 있음에도 공작은 그만둘 생각이 없다는 듯 차가운 목소리로 일어나라 명령했다.

로이안은 가쁜 호흡을 내쉬며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 살벌한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고 뭐고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다고.

‘칼 맞아 죽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네.’

아들을 향한 비체라발리 공작의 행동 하나하나가 죽음을 향한 업보 쌓기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헉, 허억…….”

힘겹게 호흡하면서 로이안이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척비척 목검을 들고 공작에게 달려들었다.

그 어설픈 몸짓이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닿을 리 없었다. 공작은 그 검을 냉정하게 쳐내고서 무자비하게 목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만하세요!”

아마도, 보다 못한 레이블라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의 목검이 로이안을 가격했을 것이다.

레이블라는 다급히 로이안의 앞을 막아서면서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외쳤다.

“아무리 훈련이라고 해도 이렇게 몰아세우는 건 옳지 않아요.”

“비키거라.”

“훈육과 학대는 종이 한 장 차이예요. 정도를 지키면 훈육이지만, 그걸 넘어서는 건 학대라고요.”

평범한 아이라면 그냥 아들을 강하게 키우는 것이겠거니 하고 넘길 수 있었겠지만, 로이안은 학대당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에게는 무자비한 가르침보다는 따스함이 필요했다.

레이블라가 단호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비체라발리 공작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냉담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레이블라는 지지 않는다는 듯이 그를 쏘아보며 이어 말했다.

“좋은 교육자는 아이의 걸음과 맞춰 주는 사람이지, 자기 발자국을 밟으며 따라오길 바라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비켜.”

퍽.

등 뒤에서 말이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레이블라가 휘청거렸다.

있는 힘껏 등이 밀린 탓에 레이블라는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앞으로 고꾸라지고야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 바닥에 닿기 전 비체라발리 공작이 레이블라를 낚아채어 안아 들었다.

레이블라가 안도하면서 뒤돌아 로이안을 보자, 로이안이 못마땅한 듯 그녀를 보고 있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안긴 모습이 그를 더 자극한 모양이었다.

좀 더 화난 모습으로 그가 말했다.

“네가 뭔데 끼어들어.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단어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분노에 피부가 저릿저릿해질 정도였다. 검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도 이런 기운을 발산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그가 주인공이기 때문일 것이다.

레이블라가 움찔하자, 비체라발리 공작은 그런 아들에게서 보호하듯 레이블라를 제 품으로 숨겼다. 그러면서 아들을 차갑게 응시했다.

이에 로이안은 짧은 짜증을 토해 내며 돌아섰다. 멀어지는 걸음걸음에 해갈되지 못한 감정들이 묻어났다.

“괜찮은가.”

비체라발리 공작의 물음에 레이블라가 멀어지는 로이안을 보며 되물었다.

“따라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들이잖아요.”

지금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보호할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아들을 안아 주어야 할 때였다.

하지만 공작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오히려…….

“비체라발리는 약한 자가 짊어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딱 칼 맞아 죽기 좋은 말만 또다시 쏟아 냈다.

‘진짜 답답하네.’

왜 비체라발리 부자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지 궁금했는데, 레이블라의 눈에는 로이안이 엇나가는 이유가 명확히 보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공작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로이안은 로이안 나름대로 솔직해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 답답한 인간들은 도대체 뭐지?

보고 있으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고구마 100개는 먹은 듯 답답해졌다.

‘내가 진짜 안 끼어들려고 했는데.’

분위기가 이래서야 공작에게 마석 광산에 대한 정보를 넘길 테니 돈을 달라는 소리도, 체력 증진을 위해 검술 훈련을 받고 싶다는 소리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이 다 있나.

‘애초에 서로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아.’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얼굴조차 보기 싫을 텐데, 검술 훈련은 곧잘 하는 걸 보면 증오는 아니었다.

저 둘을 보니 과거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빠가 독하게 공부를 시키는 터라 솔직히 딸이 아니라 후계자가 갖고 싶었던 것이 아닌지 의심한 적이 있었을 때였다.

‘아빠는, 내가 싫어요?’

어느 날 의기소침해져서 혀짧은 소리로 물으니 아빠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안아 주었다.

‘렐. 아빠는 우리 딸을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단다.’

‘그럼 왜 갑자기 엄하게 대해요?’

‘렐이 나중에 힘들까 봐. 가주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자리가 아니니까.’

아빠는 사랑하는 만큼, 아이가 강인하게 자라길 바라서 자기도 모르게 엄하게 대한 것 같다고 했다.

‘아빠가 미안해. 이제부터 속상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아빠에게 와. 그럼 아빠가 우리 딸이 속상하다는 걸 알아챌 테니까.’

어쩌면 저들도 그 당시의 아빠와 자신처럼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조금만 대화를 나누면 쉽게 풀리는 관계인데. 조금만 더 서로를 들여다보면 그 안의 감정을 알 수 있을 텐데. 그 작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자신마저 이 상황을 외면하면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야 말 것이다. 그건 어쩐지 누군가의 죽음을 그대로 방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내가 여기서 할 일이 또 뭐가 있겠어. 시도나 해 보자.’

타인의 일에 오지랖 부리다가 괜히 불똥이 튈까 모른 척하려 했는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밤에 편히 발 뻗고 자기 위해서, 그리고 원활한 거래 제안을 위하여 아무래도 이 고구마 100개는 먹은 듯 답답한 부자의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그러려면 먼저…….

레이블라의 시선이 로이안에게로 향했다.

더 급한 공략 대상은 역시나 로이안이었다.

* * *

소설 속 남자 주인공 로이안에 관한 이야기 비중은 여느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서 그러하듯 ‘여주와의 만남 이후’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작중 황녀와 만나기 전 로이안의 삶에 대한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자주 언급된 것은 역시나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냈다는 것인데, 그 이유에 관해서는 그가 황녀에게 짧게 고백하는 장면이 있었다.

항상 따스했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그리고 그 일로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외가로 향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외할아버지의 지극한 보살핌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얼마 안 있어 사망하고, 이후 외삼촌과 함께 살면서 지독한 괴롭힘을 받게 되었다.

그 정도만 알고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레이블라는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은 수시로 전장에 나가야 했으니, 믿을 수 있는 친척에게 어린 자식을 맡기고 가는 것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물론, 이후 삼촌에게 학대당한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구해 주지 못한 것은 그의 죄였다. 그도 아들이 학대당할 것을 알고 보낸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을 똑똑한 로이안이 모를 리 없었다.

레이블라는 로이안도 충분히 자기 아버지의 상황을 이해했을 테고, 자신이 왜 외가에서 자라야 했는지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니 그 시점까지는 두 사람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었고, 틀어진 계기는 로이안이 당한 학대와 방치 때문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두 사람의 사이가 ‘로이안이 외가로 가게 된 시점’부터 틀어진 것이라면?

두 사람이 틀어진 이유가 따로 있고, 학대와 방치는 단순히 그 골을 더 깊게 만든 계기일 뿐이라면, 원인을 찾아 처음부터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만 두 사람 사이를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우선 로이안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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