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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2)화 (52/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2화

    키득. 숨기려고 해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기뻐서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아야 했고, 들떠서 설레발치는 사람에게 꼭 사고가 생기기 마련이라는 것쯤은 모르지 않았으니까.

    ‘이제 돈을 벌어야지.’

    가는 날이 정해졌으니, 남은 것은 여비를 버는 일뿐이었다.

    레이블라는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정보를 팔아 자금을 확보할 예정이었다. 그 정보는 바로 돈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그것. 마석 광산의 위치이니 거래가 성사되지 않을 리는 없었다.

    그 정보는 값으로 따지면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블라는 바리베 왕국으로 가는 비용, 그곳에서 작은 집을 살 비용 정도만 받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큰돈을 갖고 있어 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까.

    ‘돈만 확보하면 콕 처박혀서 조용히 지내야지.’

    몰래 사라져도 그 사람이 사라진 걸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용하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최대한 입양을 피해야만 했다.

    그리고…….

    ‘로이안은 이제 진짜 마주치지 말자.’

    특히 로이안은 정말로 조심해야 했다. 마주칠 때마다 드러내는 살벌한 기세는 마치 자기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면 단순히 상처를 입히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이 세상 소리를 못 듣게 만들어 주겠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만약 떠나기 전에 목숨을 잃는다면, 그 범인은 황제가 아니라 로이안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조심하자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너 왜 자꾸 눈에 띄는 건데.’

    별관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주의해야 할 인물, 로이안이 떡 하니 있었다.

    달빛조차 비치지 않은 으슥한 장소에 홀로 선 그는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기사 수련장 좋던데.’

    검술을 우선시하는 무관 가문이라 그런지 비체라발리에서는 기사들의 대우가 무척이나 우수했다. 펠리시티도 제법 사용인들이나 기사에게 복지가 탁월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지만, 비체라발리의 지원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기사들이 머무는 건물은 깨끗하고 커다랬으며 청소가 꼼꼼히 잘 되어 있었다. 훈련으로 쓰는 검조차 반짝반짝 빛이 나는 데다가 입은 옷들에는 해진 곳이 없었다.

    아마도 늘 전쟁에 동원되는 비체라발리이기에 저택에 머물 때만큼은 완벽하게, 편안하게 지내게 해 주려는 듯했다.

    그 지원하에 완벽한 훈련실이 마련되어 있는데도 왜 이런 곳에서 훈련하는 거지?

    ‘아, 어른들 때문에?’

    하긴,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을 것이다. 아무리 미래에 극복할 수 있게 된다 해도, 지금은 아이일 뿐이니까. 소설에서는 서술되지 않은 극복 과정이 그에게도 존재할 테니 말이다.

    ‘이렇게 보니 또 짠하네.’

    로이안이 과거 학대받았단 사실을 숨기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무릇 타인의 앞에 서는 자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니까. 그건 펠리시티를 이어받기 위해 공부했던 레이블라 또한 잘 아는 부분이었다.

    문득 그가 무척 힘들고 외로울 것이란 걱정이 들었다. 레이블라 또한 펠리시티의 소공자로 지낼 때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통을 홀로 감내하면서, 이를 악물고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었으니까.

    가끔은 지치고 힘들어서 다 놓고 싶은데, 사람들의 기대가 무거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울고 싶었을 때가 분명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 당시 레이블라에게는 아버지가, 어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가신이 응원하고, 지지해 주었다.

    그래서 힘들지만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로이안은……?

    ‘없겠지?’

    어릴 때부터 외가에서 지냈으니 믿을 만큼 의지할 가신은 없을 테고, 아버지는…….

    레이블라는 이곳에 온 뒤로 본 비체라발리 공작과 로이안의 모습을 되새김질해 보았다.

    처음 비체라발리 공작성에 도착했을 때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로이안. 비체라발리 공작 도착 직후에 별관으로 거처를 옮긴 로이안.

    그리고 마주친 두 사람이 보였던 반응.

    ‘그건 진짜 최악이었지.’

    남처럼 보는 아버지와 혐오하듯 보는 아들이라니.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은 로이안이 아주 어렸을 때인데.’

    그런데 무엇이 두 사람을 이렇게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만든 걸까?

    ‘하긴, 가족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을 거 같기도 하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가족을 버려?’라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핏줄에게 배신당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소리였다.

    로이안은 아버지인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배신당했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을 지켜 주어야 할 사람이, 그 역할을 하지 않고 바깥으로 나돌았으니까. 가장 필요한 순간에 곁에서 돌봐 주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가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을 만큼, 로이안에게 비체라발리 공작은 증오의 존재가 되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비체라발리 공작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두 사람이 다시 가까워질 수는 없는 걸까?

    로이안이 아버지와 친해진다면 그가 가진 어른에 대한 트라우마에도 도움이 될 테고, 결국 패륜을 저지르는 엔딩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지금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낸다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 2부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지난 일을 모두 용서하고, 용서받지는 못할지언정 조금이나마 오해를 풀 수 있다면 달라질 가능성도 있었다.

    레이블라는 로이안에게서 눈을 떼면서 생각했다.

    일단 두 사람이 자주 마주쳤으면 좋겠다고. 얼굴이라도 자주 보면 친밀함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다음 날, 레이블라는 자신이 바랐던 ‘두 사람의 만남’에 관한 결과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 * *

    바리베 왕국으로 갈 채비를 하던 레이블라에게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체력이었다.

    ‘바리베 왕국이라면 오고 가기 꽤 힘들죠. 험한 산도 넘어야 하고 마수도 제법 나오는 편이니까요.’

    어제 성으로 돌아오면서, 토니가 말했었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여정을 버티지 못할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 상단에는 전직 용병들만 수두룩할걸요?’

    바리베 왕국으로 가려면 체력이 필수라고.

    그래서 레이블라는 간밤에 제 건강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바리베 왕국으로 갈 체력이 될까?

    대답은 ‘아니요’였다.

    시식가의 일을 하며 독을 자주 접한 데다 가장 위험한 ‘황제의 독’은 여전히 몸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허약하면 허약했지, 건강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몸이었다.

    레이블라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다가 죽으면 어떡하지?

    살기 위해 도망친 건데 힘이 달려 죽는다, 라. 그것이야말로 개죽음이 따로 없었다.

    차라리 제국에 있는 것만도 못한 결과였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오늘부터 체력을 기르기로 결심했다.

    효율적으로, 빠르게!

    그러기 위해서는 그 방면에 전문적인 기사들의 도움이 필수였다. 혼자서 뛰고, 걷는 것만으로도 체력 증진에 도움이 되겠지만 전문가가 가르치는 것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클레이오와 토니에게 부탁했는데, 두 사람은 난색을 표했다.

    ‘주군께서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맞습니다. 주군의 허락이 없으면 안 됩니다.’

    눈치 없음에 감사하며 데려온 것이 바로 어제였건만, 두 사람은 눈치 없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지식하기까지 했다.

    몰래, 조금만 훈련시켜 달라고 해도 소용없다며, 주군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레이블라는 오늘도 비체라발리 공작을 만나기로 했다.

    그는 수련을 위해 훈련장에 있다고 했고, 레이블라는 이른 아침부터 그를 찾아 훈련장을 찾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아아아악!”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로이안과,

    “한심하군.”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아들의 목검을 톡 쳐내는 비체라발리 공작의 모습을.

    “이것도 검술이라고 배운 것이냐.”

    공작은 목검을 한 손으로 쥔 채 날쌔게 치고드는 로이안의 공격을 모두 막아 내고 있었다. 표정은 무료했고, 내뱉는 목소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뜸 목검을 바로 쥐고서는 로이안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로이안이 제법 그의 공격을 잘 막아 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조금씩 막아 내지 못하는 공격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옆구리, 다리, 허벅지. 팔.

    결국 견디다 못한 로이안이 넘어지자, 비체라발리 공작이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비체라발리의 이름이 아깝군.”

    그 목소리가 얼마나 냉랭한지. 멀찍이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레이블라에게까지 그 한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같은 사람 맞아?’

    무뚝뚝하지만 속내는 다정한, 북부 대공 같았던 아버님이 맞는지……?

    어제만 해도 그는 자신의 귀가 다친 것을 보고 분노하며 나무들을 다 뽑으라 명령했었는데. 오늘의 비체라발리 공작은 로이안의 몸에 생채기가 잔뜩 나고 있음에도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한 얼굴이었다.

    다시 말해 소설에 묘사된 대로 ‘악역’ 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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