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1화
‘알면 좀 적당히 하지.’
로이안이 자기 상태를 숨긴다고 한들, 검술에 문외한인 레이블라가 그의 이상을 눈치챌 정도였다. 눈썰미가 훨씬 좋은 기사가 모를 리 없었다.
특히나 소공자에게 가르침을 줄 정도라면 굉장한 실력가일 텐데, 그렇다면 더더욱 그의 상태를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혹시 그래서 더 강하게 하는 건가?’
알아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라고.
그의 방식이 거칠기는 해도 로이안에게는 알맞은 훈련법인 모양이었다. 결국 그는 미래에 대단한 검사로 자라나니 말이다.
“……윽!”
커다란 파열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작은 검이 로이안의 손에서 튕겨 나와 멀찍이 굴러떨어졌다. 동시에 로이안 또한 뒤로 밀려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그때, 로이안의 고개가 검을 향해 돌아가면서 레이블라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알고 있을까.
독기가 바짝 오른 자신의 눈빛이 얼마나 무서운지.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들썩인 레이블라가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때마침 상대 기사 또한 그녀를 발견했는지, 로이안을 지나쳐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깍듯하게 인사하면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기사는 정말 대단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멀리서 봐도 크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정말 그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표정이 유순했다. 로이안을 대할 때와는 달리, 얼굴 근육이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는 실버 울프 1기사단장이자 은빛 늑대의 부지휘관, 제라노프 롬날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단장님.”
“주군께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호위 기사가 필요하시다고요.”
“네. 공작님께서 저에게 함께할 기사를 선택할 영광을 주셨어요. 지금 제가 기사들을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저쪽 야외 훈련장으로 가시죠. 다들 모여 있을 겁니다.”
그가 직접 안내하려는 듯이 앞서 나가자, 레이블라는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실내 훈련장을 벗어나기 전, 슬쩍 뒤를 살피니 힘겹게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검을 주우러 가는 로이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씩씩거리는 걸 보니 그는 몹시도 화가 나 있는 듯했다. 진 게 그토록 분한지 검을 잡으려다 말고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감정을 토해 냈다.
소리라도 지르면 좀 후련할 텐데.
한마디 말도 없이 바닥을 쿵, 내리치고서는 고개를 숙인 모습이 몹시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괜찮겠지?’
어차피 그는 알아서 잘 극복하고, 잘 클 테니까.
‘그래, 내가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저 아이는 남자 주인공이었다. 앞날이 드넓은 하늘처럼 창창한 아이였다. 반면에 ‘레이블라 펠리시티’의 앞날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아슬아슬했다.
이런 자신이 저 아이를 걱정하는 건 쥐가 고양이 생각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시선을 거둔 레이블라는 애써 그의 생각을 떨쳐 버리며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자신을 향한 눈길이 느껴졌지만, 제 앞길만 집요하게 응시할 뿐이었다.
* * *
“아가씨!”
제라노프가 안내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레이블라를 반긴 사람은 다름 아닌 아이던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다가와서는 인사를 건네는데, 고작 하루밖에 안 지났음에도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그가 반가웠다.
아마 조금 전 로이안에게 눈치를 받다가 자신을 반겨 주는 사람을 만나 들뜬 듯했다. 헤실헤실 웃으면서 그를 보자, 아이던이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마주 웃었다. 하지만 곧, 그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가씨! 어쩌다가 다치신 겁니까!”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검술을 뽐내고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레이블라에게로 향했다. 그러더니 다들 하던 것을 멈추고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모두 루빈디시로의 여정을 함께한 기사들이었다.
그들 또한 레이블라의 귀를 발견한 것인지, 충격과 경악이 깃든 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도대체 어떤 놈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모셨는데!”
응, 그거 여러분들 미래의 주군…….
루빈디시로 오는 일주일간의 여정에서도 느꼈지만, 비체라발리의 기사들은 ‘실버 울프’라는 이름이 주는 차갑고 사나운 이미지와는 달리, 은근히 순둥순둥하고 따스한 성품이었다.
국민 욕받이라 여겨지는 자신에게까지 상냥하고 스스럼이 없었다.
레이블라는 이 착한 기사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자기들이 모시게 될 주군을 욕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서둘러 변명했다.
“그냥, 나무에 긁혀서…….”
“나무라고요? 어떤 나무가 그렇게 큰 상처를 냈습니까! 당장 뽑아야 합니다!”
“역시, 유리보다 연약하신 분…….”
그저 ‘나무’에 긁혔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 파장은 엄청났다.
모두가 ‘나무 따위에도 다칠 수가!’라며 충격받은 표정을 짓더니, 이제는 유리보다도 연약한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마치 비가 오면 녹아내릴 각설탕 취급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함께해야겠습니다, 아가씨.”
아이던이 비장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자신이 실버 울프의 2기사단장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저라면 아가씨를 갓난아기처럼 돌볼 자신이…….”
응. 기각.
설탕에 갓난아기라니.
그건 펠리시티에서도 경험한 적 없는 취급이었다. 물론 과해서 문제이긴 했지만, 이런 태도들이 고맙기는 했다. 어쨌든 그간 ‘레이블라 펠리시티’가 속했던 세상은 차갑고 냉담하기만 했으니까.
한편으로는 그래서 달갑지 않기도 했다. 괜히 정이 들 것 같았다. 정이 들면 헤어지기 싫어질 테니까.
레이블라는 아이던에게 한번 웃어 주고는 제 곁에 모인 기사들을 살펴보았다.
모두들 실력이 빼어난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실력은 이곳에 오는 내도록 보아 왔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레이블라가 자그마한 입술로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저는, 클레이오 경과 토니 경이 좋아요.”
눈치 없기로는 세상 제일갈 두 사람을.
그래서인지 다들 그 선택에 경악했다.
“아니! 왜 아가씨께서 저딴 놈들을!”
“저건 인간이 아닙니다. 곰입니다. 곰!”
“저 자식들이 얼마나 무신경한 녀석들인 줄 아십니까? 아가씨, 절대 안 됩니다!”
마치 귀중하게 기른 딸이 남자 친구를 데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반대에 나섰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모두에게 비방당하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고 있는 클레이오와 토니였다.
“아가씨,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영광입니다, 아가씨.”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레이블라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나서자, 다들 소리치던 것을 멈추고 조용히 수군대기 시작했다.
“저 자식을 개같이 굴리고 나면 피곤해져서…….”
“일단 술을 먹이고 나서…….”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앞으로 클레이오와 토니의 생활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사실.
하지만 레이블라는 애써 그 사실을 무시했다. 어차피 두 달이면 헤어질 테니 조금만 참으면 되지 않을까?
두 사람은 기사이니 조금 굴림당한다고 한들, 문제없을 것이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한 레이블라는 못 들은 척 그냥 웃어 버렸다.
그것도 모르고 토니와 클레이오는 방긋방긋 웃으며 충심을 다해 모시겠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두 사람을 향한 미안함을 삼키며 레이블라가 짓궂게 웃어 보였다.
* * *
호위 기사를 결정한 레이블라는 그날 바로 자신이 뽑은 두 기사와 함께 외출했다.
외출의 목적은 당연히 ‘바리베 왕국으로 가는 상단’을 찾는 것.
루빈디시는 제국에서도 상업이 굉장히 발달한 영지이니만큼, 오가는 상단도 많아서 찾기는 쉽지 않았다. 모두에게 들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정보를 캐내야 하니 더더욱.
레이블라는 최대한 침착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기사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돌면서 가판대의 물건들을 구경하고, 사고, 때로는 길거리 음식을 먹어 가면서 하루를 보내었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기는 했지만, 다행히, 이국의 물건을 파는 작은 상점에서 ‘바리베 왕국’으로 향하는 상단과 그 일정 정보를 우연히 들을 수 있었다.
‘보자, 그쪽에서 다음 달 중순쯤에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이번 겨울쯤? 어이, 조. 맞지?’
‘예, 14일 해뜨기 전에 출발할 예정이니까, 형님도 오세요. 이번에는 상단주님께서 출발하기 전에 소 한 마리 잡으려고 하시더라고요.’
‘하여튼 그 형님 분위기 띄우는 건 알아줘야 해.’
다음 달 중순이라면 약 한 달 반 후였다.
예상보다 빠르기는 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해독초는 마석이 담긴 물병에 담아 두면 최소 두 달은 싱싱했으니 제국을 떠나는 당일까지 먹을 수 있었다. 황제에겐 한 번쯤 편지를 써서 아직 배신하지 않았다는 제스처만 해도 괜찮을 터였다.
그러고 나면.
‘이 지긋지긋한 제국과도 안녕이야.’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는 제국과의 이별에 가슴속에 설렘이 가득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