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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0)화 (50/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0화

    레이블라는 결국 비체라발리 공작을 집무실에서 빼내는 것에 성공했다.

    “온실이 좋겠구나.”

    “……저는 그냥.”

    “온실에서 차를 마시도록 하지.”

    그저 외출 허가를 받으러 왔을 뿐인데. 대뜸 비체라발리 공작이 온실로 가서 차를 한잔하자고 한 것이다.

    그가 자리를 벗어난다는 소식에 제일 기뻐한 사람은 다름 아닌 보좌관인 헤넌이었다. 드디어 쉴 수 있다고 중얼거리며 레이블라의 손을 꼭 잡을 때의 표정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감격에 절어 있었다.

    덕분에 가신들에게 잠시간의 휴식이 주어지고, 레이블라는 비체라발리 공작을 건네받아 온실로 향하게 되었다.

    “졸리지는 않으세요?”

    “괜찮다. 너는.”

    “저는 잘 잤어요!”

    지난 일주일을 함께해서일까.

    여전히 무뚝뚝한 언사였지만 제법 익숙해져서인지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 편해진 것 같기도 했다.

    ‘악역에게 이렇게 친밀감을 느껴도 되는 건가.’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무섭다고 바들바들 떨었던 것 같은데.

    새삼스럽게 떠오른 첫 만남을 떠올리다가 레이블라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님, 처음 황궁…….”

    하지만 그 물음을 끝맺지는 못했다. 갑작스럽게 비체라발리 공작이 걸음을 멈춘 탓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정면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는 그를 무척이나 닮은 소년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가만히 응시한 채였다. 어떠한 말도, 어떠한 행동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먼저 눈을 돌린 것은 로이안이었다. 혐오감이 깃든 눈빛으로 아버지를, 레이블라를 번갈아 보던 그가 비소를 남긴 채 돌아섰다. 무척이나 차가운 반응이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은 그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아이가 귀퉁이를 돌아 멀어질 때까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눈으로 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가자꾸나.”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모르는 사람을 스치는 것처럼.

    그래서 레이블라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상황을 못 본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할 뿐이었다.

    * * *

    “성 밖을 둘러보고 싶다고?”

    꽃이 활짝 핀 온실 안, 테이블을 두고 마주 보고 앉은 비체라발리 공작이 홍차가 든 잔을 무심하게 들어 올리며 물었다.

    레이블라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네! 루빈디시 영지가 궁금해서요. 앞으로 제가 살아가야 할 곳이니 한번 둘러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지.”

    레이블라의 씩씩한 대답에 비체라발리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잠시 무언가 생각하듯 시선을 내리까는데, 그 자태는 마치 부드러운 붓으로 그려 놓은 그림 같았다.

    ‘주변에 널린 꽃 때문인가.’

    레이블라의 시선이 슬쩍 그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시선 끝에는 수많은 보랏빛 꽃이 가득했다. 비체라발리 공작저에서만 볼 수 있다는 보랏빛 장미가 이곳 온실에 가득 차 있었다.

    왜 하필 이 온실에서 티타임을 갖자고 한 건지 의아하긴 했다.

    ‘딸은 꽃을 늘 곁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영문 모를 소리와 함께 이곳으로 끌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가기 전에 기사단에 들러 네 호위를 선택하거라.”

    “……제가요?”

    “그래. 앞으로 너와 함께 다닐 자이니, 내가 선택하는 것보다야 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좋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레이블라로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준비하는지 숨기려면 개중에 둔하고, 눈치 없는 사람을 고르면 좋을 테니까.

    레이블라가 맑게 웃으며 감사를 표하자, 그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마주 보다가 물었다.

    “지내기는 괜찮나.”

    “네. 샬럿도 착하고, 침실은 완벽했어요.”

    “그래. 다행이군.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거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공작님.”

    “더 필요한 것은 없고?”

    대화를 마무리하기 전 의례상 묻는 말인가 싶었지만, 어쩐지 ‘네가 지금 나에게 해야 할 말이 더 있을 텐데?’ 같은 의미로 다가왔다.

    레이블라는 그가 바라는 말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비체라발리 공작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아챘다. 레이블라가 다친 귀를 한 손으로 살며시 덮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다쳤어요. 어제 잠이 안 와서 밖에 나갔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거든요. 그때 나무에…….”

    “나무라……, 당장 별관에 나무를 다 뽑아 버려야겠군.”

    아이에게 위험할 거라고 생각 못 했다며 공작이 정중히 사과했다.

    “……네?”

    “헤넌. 지금 당장…….”

    “저, 저기, 공작님!”

    아니, 아까운 나무를 왜 뽑으세요!

    “제가 나무를 좋아하는데, 그냥 두시면 안 될까요?”

    놀란 레이블라가 다급히 말리자, 비체라발리 공작이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나무를?”

    “네!”

    솔직히 그깟 나무 몇 그루 뽑힌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을 테지만, 이곳에 오자마자 그런 짓을 벌인다면 괜한 행패로 비칠 수도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숨죽이며 지내다가 탈출하고 싶은 레이블라로서는 정말로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레이블라의 이야기에 비체라발리 공작이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까딱였다. 조금 전의 명령을 철회하겠단 뜻이었다.

    ‘……진짜 모르겠네. 왜 이런 사람이 아들에게 칼을 맞아 죽는 거지?’

    아이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그 노력이 가상했다. 남의 딸에게 이 정도로 잘할 정도면, 자기 아들은 물고 빨고 핥아야 정상 아닌가?

    하지만 아까 목도한 로이안과 비체라발리 공작의 모습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 그 자체였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 *

    “아가씨. 드웨인 경을 뽑으셔야 해요.”

    호위 기사를 직접 선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샬럿은 그때부터 기사들의 이름을 읊어 대기 시작했다.

    문제는…….

    “아니다. 제이슨 경이 더 좋을지도 몰라요. 제이슨 경은 어리면서도 능력은 출중하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실버 울프 기사단의 떠오르는 샛별이에요.”

    샬럿이 흔들리는 갈대와 다를 바 없단 점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기사들의 이름이 쏟아졌다.

    덕분에 본관에서 기사단 건물로 가는 동안 십여 명의 이름이 언급되었지만, 그중에서 ‘정말로’ 실속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아, 아니에요. 너무 어리면 아가씨께 연심을 품을 수도…….”

    “그래서 그중에서 제일 섬세한 기사는 누구예요?”

    “섬세한 분이라면 2기사단장인 아이던 클로펜타 경이시죠.”

    아이던이라면 수도에서 비체라발리까지 올 때, 아니 이 별관까지 동행했던 기사였다. 곁에서 내내 챙겨 주기도 했었고, 샬럿에게 레이블라가 ‘유리 공예품’이라는 말도 안 되는 선입견을 심어 준 인물이기도 했다.

    ‘좋은 사람이기는 했지만, 제외하자.’

    어차피 2기사단장이니 호위로 데려가지도 못할 테지만.

    누구를 뽑을지 고민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레이블라는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끔 조용히 가서 훈련장을 응시했다.

    넓은 실내 훈련장 중심에서는 은발의 작은 소년과 그보다 세 배는 클 법한 어른이 검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발을 내디디는 속도가 늦습니다, 도련님.”

    “…….”

    “손목이 꺾였습니다. 실전이면 손목이 부러지실 겁니다.”

    기사가 툭툭 내뱉는 말들은 하나같이 건조했다. 자세한 설명도 없었고, 그것을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소설이 공인한 검술의 천재, 세기의 검사였다. 로이안은 그가 하는 말을 금세 흡수하며 시시각각 자세를 바꾸어 움직였다.

    칼날이 유려하게 은빛 길을 남기며 공기를 갈랐다. 뒤따르는 소음은 매서웠다.

    분명, 굉장한 모습이었다. 굉장한 대련이긴 한데,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로이안이 살짝 멈칫하는 것 같달까?

    한참 더 지켜보니 정말로 그러했다. 대련하는 기사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로이안이 바짝 굳었다.

    ‘아, 상대가 어른이라 그런가?’

    로이안에겐 아주 어린 시절부터 외삼촌에게 학대를 당했다는 설정이 있었다.

    소설 속에서 자세히 다뤄진 부분은 아니지만, 자기보다 큰 어른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잠깐 나왔던 것도 같았다.

    아직 그 후유증이 심한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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