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9화
* * *
소설 속에서 로이안은 얼음 늑대라는 별칭으로 표현되었다.
얼음으로 만든 조각상처럼 아름답지만, 그만큼이나 차가운 분위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읽을 때는 조금 낯간지럽다 싶은 별칭이었는데. 실제로 그를 마주하고 보니 레이블라는 그 별명을 완벽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로 완벽한 주인공이었으니까.
황녀가 보자마자 ‘주인공’이다 싶었던 것만큼, 로이안도 그랬다. 순수한 빛깔의 은발부터 단정한 이목구비에 늑대처럼 날 선 보랏빛 눈동자까지.
그는 그 존재만으로도 그냥 주인공이었다.
‘근데 왜 네가 여기 있는 건데!’
비체라발리의 직계이자 유일한 후계자가 왜 이 별관에 있는 것일까.
‘……도망갈까?’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존재가 검까지 들고 있으니 당장 달아나고 싶었다. 멀리멀리, 눈에 띄지 않는 곳까지 내달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했다. 맹수를 앞에 두고 등을 보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아직 저 아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새 가족이 생겼다면서 반길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인사하자.’
그리고 만약 오해가 있다면 오해를 풀자.
자신은 입양되고 싶지 않았다고.
펠리시티가 황녀를 학대했다는 건 잘못된 오해일 뿐이라고. 자신은 황녀의 시식가로 그녀를 위해 충성을 다해 왔다고.
‘좋아.’
긴 숨과 함께 결정을 내린 레이블라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힘차게 얼어붙은 발을 떼어 냈다.
도각. 그녀가 발을 내디디는 것과 동시에 그의 발소리에 다시 그녀의 발소리가 섞여 들었다.
보다 가까워진 순간, 레이블라가 활짝 웃었다.
“저……!”
그저 인사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대응할 새도 없이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레이블라는 그 자리에서 석상이 된 것처럼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뚜벅, 뚜벅.
바짝 굳은 채 선 레이블라의 곁으로 은빛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소년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표정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내 눈앞에 띄지 마.”
눈빛만으로도 죽일 기세로 노려본 그가 가볍지만 느릿한, 피로감이 느껴지는 발걸음으로 멀어졌다. 어딘가에 꽂힌 검이 뽑히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의 인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레이블라는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가만히 모든 소음이 사라지길 기다릴 뿐이었다.
빌어먹을.
그냥 잠이나 잘걸, 하고 후회하면서.
* * *
어제의 경고를 밑거름 삼은 레이블라는 로이안의 앞에 다시는 얼쩡대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런데…….
“어제부터 별관에 도련님께서 머물고 계세요.”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레이블라의 굳은 다짐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너지고야 말았다.
“……소공자님이 왜? 본관에 계시지 않고…….”
“예. 그간 본관에 계셨는데, 갑자기 별관으로 오겠다고 하셔서요.”
아…….
그렇다는 건 앞으로 여기서 시도 때도 없이 마주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어떻게 눈에 안 띄어!’
소설 등장인물들은 전부 인격 파탄자들뿐인가. 어떻게 이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 마주치지 말라면서 위협할 수가 있어?
‘둘이 많이 다르네.’
비체라발리 공작은 원작과 달리 좋은 사람이라 놀랐는데, 그 아들은 알던 것보다도 성질이 더러운 듯했다.
포옥, 한숨을 내쉬니 샬럿이 귀엽다는 듯 작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께서는 다정한 분이시거든요. 분명, 든든한 오라버니가 되어 주실 거예요.”
어찌나 무섭고 사납게 굴던지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보자마자 죽이려고 칼 던진 놈인걸.
“그나저나 아가씨. 귀는 어쩌다가 다치신 거예요. 정말로 넘어지신 거예요?”
“으, 으응…….”
“역시, 유리 세공…….”
샬럿이 충격받은 얼굴로 들릴 듯 말듯 작게 중얼거리더니 바깥에 나가려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싸매야 한다는 둥 무시무시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여름인데?
“저기, 샬럿?”
“사실 아가씨를 보자마자 솜사탕이 사람이 된 건가 싶었는데, 혹시 씻다가 녹아내리시면 어떡하죠?”
샬럿이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레이블라에게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필립 경의 진료를 거부하시지만, 그래도 역시, 제 생각에는 진찰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괜찮아. 샬럿이 상처 치료도 다시 해 주었잖아.”
“아니요. 아가씨께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으시면 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기사님들이 아가씨께서는 갓 태어난 루빈디시의 아기보다도 약하시다고, 꼭 잘 돌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건 내가 잘 말할게. 온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다쳤다고 하면, 다들 내가 칠칠맞다고 생각할 거야.”
“어떤 놈이 그런…….”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응? 샬럿.”
레이블라의 부탁에 샬럿이 이내 포기하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레이블라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눈을 마주쳐 왔다.
“아가씨. 이번 한 번은 아가씨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지만, 앞으로는 아가씨의 안전을 두고 타협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가씨는 비체라발리의 유일한 공녀님이 되실 분이니까요.”
“……응, 고마워.”
“상처는 제가 흉터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볼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블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단호해 보이던 얼굴을 풀고 미소를 띠었다.
“아, 혹시 바쁘지 않으시면 공작님께서 잠시 뵙자고 하시는데, 어떠세요?”
“응, 좋아요.”
안 그래도 이제 짐도 풀었겠다 비체라발리 공작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바리베 왕국으로 향하는 상단을 찾기 위해서 외출이 필요한데, 이에 대한 허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지금 뵈러 가시는 건 어떠세요? 마침 공작님께서 다과하기 좋은 시간인데.”
그런가. 시간을 보아 하니 점심 식사 후에 차 한잔 마시기 좋은 시간이기는 했다.
말이 나온 김에 미루지 말고 얼른 해치워야지 싶어진 레이블라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자, 샬럿이 앞서 나가며 문을 열어 주었다.
레이블라는 오랜만에 받는 정중한 태도에 조금 어색함을 느끼며 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때를 기다린 것처럼 맞은편에서 나오는 소년과 딱 마주쳤다.
……이게 뭐야?
‘왜 거기서 나오는 건데?’
어제부터 별관에 머물기 시작했다더니, 맞은편 방에 있던 모양이었다. 넓은 건물에서 굳이 같은 복도, 맞은편 방이라니 수상쩍은 상황이었다.
“…….”
“…….”
북부의 겨울보다도 차가운 눈빛에 당황한 레이블라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뚝 떨구었다.
성큼성큼 걸어 레이블라를 스쳤다. 성큼성큼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소년인지라 가벼운 몸짓이었다.
레이블라는 작고 가벼운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가는 그의 등이 보였다.
그리고 로이안의 뒤로 또 다른 갈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그녀를 힐끗 보고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홱 고개 돌린 채 로이안을 따랐다.
당최 알 수 없는 상황에 샬럿을 보자, 무언가 기대감 어린 표정을 한 샬럿이 양손을 가볍게 쥐고서 힘내라고 응원하고 있었다.
범인이 너였니.
“아가씨께서는 좋으시겠어요! 저런 멋진 도련님이 오라버니가 되실 테니까요!”
지금 눈으로 위협하는 걸 못 본 건지, 못 본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도련님께서도 아가씨가 동생이 되신 것이 기쁘신가 봐요! 10초나 보고 계셨어요!”
그건 좋아서 본 게 아니라 눈 깔라고 위협한 거란다.
어쩐지 이 하녀 때문에 한숨 쉴 일이 많아질 것 같은 건, 그저 착각이겠지?
* * *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레이블라는 늦지 않게 비체라발리 공작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만 하루 만에 재회한 비체라발리 공작은 그대로였다.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니 뭐가 달라질 것이 있겠느냐 싶기도 하겠지만, 비체라발리 공작은 정말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입고 있던 옷까지도.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단 한 시간도 집무실을 벗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놀라운 건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꽃 내음이 날 것처럼 깨끗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마법이라도 쓴 걸까.
어쨌든 이렇게 보니 왜 이토록 샬럿이 자신을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보내고 싶어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양녀로 삼을 만큼 마음 쓰는 아이’라면 그들의 주인을 집무실 밖으로 끌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