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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8)화 (48/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8화

    그러자 정면을 응시하던 비체라발리 공작의 시선이 품 안의 소녀에게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한 레이블라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피곤한데…….”

    “피곤하다니. 역시 여행 중에 몸이 상한 것이 틀림없군.”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 같, 아니, 괜찮을 거예요!”

    그리 자신했으나 비체라발리 공작은 미덥지 못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레이블라가 간절하게 양손을 마주 잡고 올려다보자, 그가 마지못해 끄덕였다.

    “좋다. 하지만 아프면 꼭 말해야 한다.”

    “네!”

    해사한 미소와 함께 레이블라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을 집사라고 소개한 키어런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레이블라는 이번에도 땅에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을 대신해 여행길 동안 살뜰히 자신을 챙겨 주었던 기사, 아이던이 그녀를 안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편하십니까, 아가씨?”

    “내려 주면 더 편할 것 같아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직은 너무 연약하셔서…….”

    “맞습니다, 아가씨는 뭐랄까, 설탕 조각 같달지…….”

    어느새 뒤따라온 클레이오 경이 아이던의 말에 고개를 주억였다.

    지난 일주일간 너무나도 경험했던 상황이라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비체라발리 가문 사람들의 특징인지, 다들 과장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레이블라는 다시 포옥, 하고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수도와는 공기부터 달랐다.

    “아가씨께서 왜 별관으로 가시는 겁니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는 듯한 레이블라의 모습에 아이던이 앞서가던 키어런에게 묻자, 그가 미소와 함께 답했다.

    “방 정리가 조금 시간이 걸려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원로회 건도 있고요.”

    “그렇습니까.”

    아이던이 무심하게 답하면서 레이블라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그렇다고 합니다, 아가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 걸 보니 그저 낯선 환경에 당황한 듯한 자신을 위해 미리 걱정을 덜어 주려고 질문한 모양이었다.

    레이블라는 감사의 말 대신 그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에 아이던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키득 웃었다.

    “아가씨께서 오셔서 참 좋습니다. 도련님과도 잘 지내실 것 같고요.”

    도련님이라면, 로이안이었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께서 아까 안 계셨던 것 같은데. 잠시 후에 있을 승전 연회에는 오실까요? 어차피 술판이나 벌어지니 아이들에게는 못 볼 꼴일 텐데.”

    클레이오의 무심한 목소리에 아이던이 헛기침하며 그의 옆구리를 쳤다. 윽, 소리를 내며 클레이오가 옆구리를 감쌌다.

    “왜 그러십니까, 단장님.”

    “조용히 하고. 넌 그만 가 봐. 이제 다 온 것 같으니.”

    아이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별관에 도착했다.

    뒤이어 별관 안 어느 방 앞에 선 키어런이 문을 활짝 열고 입구에서 살짝 비켜서면서 말했다.

    “이곳입니다, 아가씨.”

    그가 안내한 방은 무척이나 넓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여자아이의 방이라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분홍빛의 파스텔 톤 벽지에 한쪽에 줄지어진 수많은 인형, 캐노피가 달린 침대와 작은 화장대까지.

    평범한 여자아이라면 입이 활짝 벌어질 만큼 사랑스러운 방이었다.

    “좋은데요, 아가씨. 여기서 저랑 소꿉놀이하면 되겠습니다.”

    “왜 아가씨께서 단장님과 놉니까. 혹시, 단장님 2기사단 버리시고 아가씨 호위를 노리…… 우윽!”

    다시금 얻어맞은 클레이오가 결국 무너지듯 상체를 접으며 끙끙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던은 레이블라를 침대에 놓아주었다.

    이어 키어런이 연둣빛 머리카락의 하녀를 데려와 인사시켰다.

    “샬럿입니다. 앞으로 아가씨를 보필할 아이입니다.”

    “샬럿입니다, 아가씨.”

    커다란 안경을 쓴 귀여운 여성이었다. 레이블라는 순진해 보이는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레이블라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하지만 그 말이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아이던이 부리나케 그녀를 끌고 가 버렸다. 방 밖의 복도 쪽에서 두 사람이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그가 염불처럼 외는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아가씨께서는 유리보다도 약하시니 조심해서 대해야 한다.”

    어찌나 신신당부하는지.

    뒤늦게 돌아온 그들을 향해 레이블라가 절대 아니라고 하며 건강해 보이게 발을 쿵쿵 굴렀지만, 샬럿은 이미 그녀를 ‘유리’라고 인식한 모양이었다.

    그 때문인지 기사들이 별관을 떠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레이블라가 창가에 서자 샬럿이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여독이 쌓이셨을 테니 얼른 씻고 이만 침대로 가시는 게 어떠세요? 아직 바람이 차요.”

    지금은 여름인지라 밤바람조차 따스하다 못해 더운 편이었다.

    “괜찮은데요. 샬럿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아니에요, 아가씨. 건강한 사람은 마차 탔다고 열이 나지 않아요. 그리고 말씀 놓으세요.”

    샬럿이 지나치게 걱정하는 탓에 레이블라는 한숨을 내쉬면서 창문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침대로 향하자 그때를 기다린 듯 샬럿에 부리나케 창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후련한 표정으로 물었다.

    “침대는 어떠세요?”

    “좋아요…… 아니, 좋아! 폭신하고.”

    말을 놓으라고 해서 놓기야 하지만, 이런 대우도 오랜만이라 영 어색했다.

    “급하게 준비된 건데 다행이에요. 곧 더 좋은 침대에서 주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아가씨가 머무실 본관의 방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거거든요!”

    본관이라니.

    ‘그때는 로이안과 만나겠지.’

    당장 공작성에서 마주치지 말아야 할 사람을 꼽는다면 열 손가락 모두 로이안을 꼽을 만큼,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메인 남주이니만큼 궁금하긴 했지만 그만큼 두려웠다.

    황녀를 학대한 죄로 멸문해 버린 가문의 딸이라니. 그에게는 여러모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것이다.

    ‘가능하면 입양도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비체라발리와 서류상으로 얽혀서 좋을 일이 없었다. 재수 없으면 비체라발리의 몰락에 휩쓸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두 달 사이에 원로 회의가 열리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입양 절차는 가문 원로회의 승인을 먼저 받은 다음, 비체라발리 공작이 공문을 황제에게 보내면 황제가 직인을 찍어 허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미 허락했고,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어떤 결과든 승인하겠다는 문서를 내린 상황이었다.

    원로회의 승인만 받으면 입양은 확정된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러니 가장 좋은 건 원로회가 열리지 않는 것이지만, 비체라발리 공작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조금 전 공작성에 들어섰을 때 그의 귀환을 수많은 가신들이 맞이했던 걸 보니 머지않은 때에 회의가 열릴 듯했다. 그때 입양에 관한 말이 나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로이안은 없었지.’

    비체라발리 공작이 온다는 소식에 개미 한 마리까지 전부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아들인 로이안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아까 달랑 안겨 있던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지금이면 로이안도 아직 어린 소년이니 아버지의 품이 그리울 때였다. 분명 그 모습을 봤다가는 부모를 빼앗은 인간이라는 오해까지 덧붙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내일 아침 식사 함께하는 게 어떠냐고 말씀하셨어요.”

    속삭이듯 들려오는 물음에 레이블라가 버릇처럼 좋다고 답하려다가, 멈칫했다.

    ‘아니, 잠깐만.’

    비체라발리 공작과 만나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 자리에 로이안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피곤해서, 아침은 좀…….”

    “어디 많이 아프신 건 아니시죠? 필립, 아니 의사를 불러 드릴까요?”

    “오늘은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씻고 쉬고 있을게.”

    “목욕물은 준비되었으니 그럼…….”

    “아, 아니야. 오늘은 혼자 씻을게. 계속 혼자 씻었더니 그게 편해서.”

    “그럼 오늘은 그렇게 하세요. 그래도 혹시, 조금이라도 제가 필요하신 일이 생기신다면 꼭 곁에 있는 벨을 흔들어 주세요. 아셨지요?”

    “응. 알았어.”

    “그럼 근처에 있을 테니까, 꼭 불러 주세요.”

    레이블라가 흔쾌히 끄덕이자, 샬럿이 미련이 남는 것처럼 계속해서 힐끔힐끔 보다가 불안한 얼굴로 방문을 나섰다.

    그렇게 조용해진 방.

    샬럿에게 알아서 하겠다고 했지만, 막상 씻고 자리를 정리하려니 피곤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누운 침대가 너무나도 폭신해서 몸을 일으키기 어려웠다. 황궁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좋았다.

    하지만 정작 잠은 오지 않았다. 환경 변화 때문일까. 괜히 가슴이 수런수런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것처럼 심장이 시끄럽게 뛰어 댔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당장 불안할 일은 전혀 없는데.

    ‘할 일도 다 정해졌고.’

    이제 루빈디시에 도착했으니 제일 먼저 바리베 왕국으로 향하는 행렬이 정확히 언제 있는지, 어느 상단이 가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그 행렬을 따라가기 위한 여비 또한 구해야 했다.

    상단이야 그냥 나가서 찾아보면 될 일이고, 돈은 비체라발리 공작의 주머니를 빌릴 생각이었다. 가진 정보는 많았고, 그 정보를 두고 비체라발리 공작과 거래를 하면 되니까.

    그런데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거지?

    ‘잠시 산책이라도 할까?’

    참다못한 레이블라가 벌떡 일어나서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시원한 공기라도 마시면 괜찮아질 것 같았기에 빠르게 방문을 열었다.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본 복도는 어둡고, 조용했다. 이따금 사용인들이 오갔지만 샬럿은 없는 듯했다.

    레이블라는 살금살금 밖으로 빠져나와 대리석 바닥을 거닐었다.

    폭신한 신발을 신고 있어서인지 쓰윽쓰윽, 신발이 밀리는 소리가 복도의 벽을 타고 울려 댔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고 있는데, 갑자기 발소리 하나가 섞여 들었다.

    이제 막 별관으로 들어선 자의 것으로, 가볍지만 느릿한, 피로감이 느껴지는 발소리였다.

    레이블라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발견했다.

    보랏빛 눈동자에 은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을.

    로이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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