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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7)화 (47/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7화

한순간 어색해진 레이블라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가 어색함을 풀려는 듯 다시금 웃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대화를 이었다.

“간밤에는 잘 주무셨어요?”

“너는.”

“저요? 저야 잘 잤죠. 좋은 방 주셔서 감사해요.”

“아닌 것 같은데.”

……아니라니?

얼굴에 티가 나나. 레이블라는 볼에 손을 가져다 대며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에 그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거라.”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짧은 대화가 끝을 맺는 동시에 마차가 출발했다. 곧장 비체라발리 공작은 마차 좌석 한편에 탑처럼 쌓여 있던 서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빠르게 집중하기 시작하는 모습이 문서 작업에 무척이나 능숙해 보였다. 얼마 전까지 전장에서 굴렀다고 생각할 수 없는 태도였다.

‘하긴 전장에서도 영지 관리를 했다지.’

무패의 기사에 가주로서도 완벽하다니.

‘황제는 왜 이런 완벽한 사람을 자꾸 쳐내려고 하는 걸까.’

저보다 잘난 사람은 가만두지 못하는 병에라도 걸린 걸까.

어떻게 봐도 제정신이 아닌 놈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미친놈이 다스리는 창 너머의 세상은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한평생 겪는 불행과 행복의 총량이 일정하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놈의 세상은 행복한 사람은 계속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만 계속해서 불행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 제국에서만 벗어나면 돼.’

주인공들이 뛰노는 무대에서 퇴장만 한다면, 적어도 보통의 사람들처럼은 살 수 있지 않을까?

두 달.

남은 시간을 되뇌며, 레이블라는 눈을 감았다.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소설의 무대로부터 멀어지는, 정말로 달가운 소리였다.

* * *

“……라.”

“……레이블라.”

저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자, 예쁜 보랏빛 눈동자가 눈앞에 있었다.

뭐지?

깜빡, 깜빡.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서서히 정신을 깨운 레이블라가 뒤늦게 눈을 홉뜨면서 물었다. 덜컹거리는 움직임이 나지 않는 걸 보니, 마차가 멈춰 있었다.

“……공작님?”

“괜찮으냐.”

……괜찮냐고?

의미 모를 질문에 멍하니 보기만 하자, 비체라발리 공작이 손을 뻗어 레이블라의 이마를 감쌌다. 그러고는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열이 좀 나는 거 같은데.”

……열?

그의 손이 떨어지자 레이블라가 제 손을 들어 이마에 얹었다. 진득하게 땀이 났다 식은 이마는 손바닥보다도 서늘했다.

“괜찮은 거 같은데…….”

오히려 제 이마보다 비체라발리 공작의 손이 더 뜨거웠다.

하지만 비체라발리 공작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제법 심각했다.

“딸은 유리보다도 약하다더니 사실이군.”

“……네?”

“아무래도 근처 마을로 가서 의사에게 보여야겠다.”

으응?

“괘, 괜찮아요!”

“괜찮지 않다.”

아니, 제가 괜찮다니까요?

황제가 준 독의 해독제를 먹기는 했지만, 완전히 치유가 될 수 없는 독이다 보니 혹여 들킬 수도 있었다.

레이블라가 즉시 변명했다.

“저, 얼마 전에 황녀 전하의 음식에 든 독을 먹은 적이 있어요.”

“……독을?”

“네. 그래서 지금 계속 해독제를 먹고 있어요.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정말인가?”

“네. 정말이에요.”

레이블라가 힘주어 끄덕이자,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루빈디시로 가는 게 낫겠군.”

되도록 빨리 루빈디시에 도착해서 성 주치의에게 보여야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건 또 어떻게 피하지?

“주군.”

그때 마차 밖에서 비체라발리 공작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인기척을 내자, 문이 열리고 한 손에 음식을 든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가씨 식사입니다.”

공작이 끄덕이자 기사가 마차로 올라와 레이블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내민 접시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가 담겨 있었다.

“드십시오, 아가씨.”

입맛이 없었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여행 중에 먹는 따스한 음식이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레이블라는 감사하다며 그에게서 수저를 건네받았다. 후릅. 한 모금 삼키자 따스한 수프가 기도를 타고 빈속에 고였다.

곧장 맛있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기 위해 시선을 들었는데, 기사가 왠지 모르게 흐뭇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로 마차 밖에 있는 기사들이 마차 안쪽을 기웃거리며 레이블라에게 관심을 보였다. 언뜻 보인 그들의 표정에는 긍정적인 호기심이 넘실대고 있었다.

또한 바로 옆에선 비체라발리 공작이 걱정하는 듯한 눈길로 그녀가 식사하는 모습을 흘끔거렸다.

왜지?

펠리시티가 멸문한 뒤로 첫만남부터 이런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처음이었다.

“……어떠십니까? 입에는 맞으십니까?”

레이블라가 멀뚱히 수프를 바라보고만 있으니 조바심이 난 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레이블라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가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말로 그 대답이 기쁜 듯했다.

“어서 드십시오. 식겠습니다.”

기사의 다정한 재촉에 이어, 마차 밖 기사들이 한 사람씩 말을 얹었다.

“드십시오. 그거 먹어야 건강해집니다.”

“맛있으니까 드시겠지.”

“어릴 땐 더 많이 먹어야 합니다.”

“아오, 이 눈치 없는 자식아. 분위기 깨지 마. 누가 펠리시티야! 이제 비체라발리지!”

“저리 가, 클레이오! 너도야, 토니!”

투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레이블라가 수프를 다시금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수프가 거북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더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변화가 기껍지 않아서.

오래 안 볼 이들이었다.

두 달 뒤, 떠날 작정이었으니까.

이 사람들이 따스하게 대하면 대해 줄수록, 이 사람들을 두고 가는 마음이 불편해질 게 뻔했다.

* * *

한 달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여정은 정확히 일주일로 끝을 맺었다.

황제가 황족만이 사용 가능한 워프 게이트의 사용을 허락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이라고 하더라도 마냥 수월한 여행길은 아니었다. 정체 모를 이들의 습격도 있었고, 산적을 만나기도 했으며 마수와 마주치기도 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가 위험했느냐, 하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다. 비체라발리 가문의 기사들 실력은 인간을 넘어선 수준이었으니까.

특히 비체라발리 공작의 검술 실력은 정말로 압도적이었는데 그가 검을 한 번 휘두르면 마수가 줄줄이 쓰러졌다. 같은 인간은 산적들은 검을 뽑는 것만으로도 기세에 놀라 주저앉아 소변을 지릴 정도였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던 레이블라로서는 무척이나 안전할 수밖에 없었다.

안전한 것뿐인가. 편하기도 했다.

공작이나 기사들이 무척이나 그녀를 잘 챙겨 주었기 때문이었다.

미열이 있단 사실을 들킨 후부터는 어찌나 세심하게 챙기는지. 약을 챙겨 먹이고 식사도 묽은 것으로 바꾸어 주는 것은 기본이요, 불편한 것을 곧잘 찾아내어 어떻게든 해결해 주려고 했다.

덕분에 노숙 중에도 잠자리는 편했으며, 늘 따뜻한 음식으로 속을 채울 수 있었다.

물론, 레이블라도 거절은 했었다. 아랫사람으로 살아 보며 그들이 당연하게 제공하는 것들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귀찮은지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호의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신경 쓰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그들의 넘치는 호의 덕에 여행길은 순탄했고, 비체라발리 공작성에 도착했을 때는 평소보다도 건강해져 버렸다.

애석하게도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지만.

“당장 의사를 데려와.”

성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비체라발리 공작이 큰소리로 외쳤다.

마치 중증 환자라도 이송해 온 것처럼, 심각한 얼굴로 외친 터라 그를 환영하려고 모인 수많은 가신과 사용인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스쳤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아이가 아프다.”

“아이요?”

“딸을 데려왔으니 빨리 살피도록.”

……딸?

너무나도 태연스럽게 흘러나온 발언에 수많은 사람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동시에 모두가 공작의 품에 안겨 있는 작디작은 아이를 응시했다.

놀란 것은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레이블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딸? 딸이라고?

반면에 모두를 놀라게 한 비체라발리 공작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재차 모두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의사…….”

“저!”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레이블라가 번쩍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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