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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6)화 (46/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6화

“바리베 물건인 건 어떻게 알았지?”

“보면 알잖아요.”

레이블라가 그게 대수냐는 식으로 답하자, 사내가 고놈 제법이라는 듯이 보았다. 조금 전과는 달리 호의적인 눈빛이었다.

“혼자 왔니?”

“아니요. 어른들이랑 왔어요. 이건 뭔가요? 호신용 물건인가요?”

그의 질문을 대충 흘려넘긴 레이블라가 호기심 많은 아이인 척하며 물건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가 말했다.

“그래. 잘 보았다. 입으로 부는 거지. 피리처럼.”

“네에. 그럼 저건 뭔가요?”

“빛이 나는 물건이야 흔들면 빛이 나지.”

손전등 같은 개념의 물건인 듯했다. 마법으로 등을 띄우는 이 세계에서는 딱히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다.

이곳에 있는 물건이 다 그런 식이었다. 유용은 하지만, 마법으로 모두 대체가 가능한 것들. 그래서 이 가게만 유독 한산한 듯했다.

한편 사내는 오랜만에 온 손님 때문에 제법 즐거워진 모양이었다. 레이블라의 시선이 닿은 물건들에 관해 신이 난 채 떠들어 댔다.

레이블라는 그가 적당히 기분이 좋아졌을 무렵, 적당한 물건을 집어 그에게 건네었다.

“이거 살게요.”

레이블라가 집어 든 물건은 달달한 맛이 나는 동그란 구슬이었다. 사탕과 다른 점은 ‘맛만 날 뿐 정말로 ‘물건’이기 때문에 먹지를 못한다는 점이랄까.

“음, 그래. 어르신들은 먹는 것을 가려야 하니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 근데 돈은 있니? 이게 보기보다 상당히 고가인데…….”

“얼만데요?”

“대금화 2개?”

대금화는 100골드와 같은 값어치였다. 10골드가 서민의 한 달 평균 생활비라고 하니, 이 쓸모없는 것이 비싸긴 굉장히 비쌌다.

‘이 가게 안 망한 게 신기하네.’

밑밥을 깔기 위해 사는 것치고 무척이나 비싸기는 했지만, 황실에서 일하며 받은 돈이 제법 있었다. 레이블라는 제 미래를 위해 기꺼이 투자하기로 했다.

턱 준비해 온 돈을 그에게 건네면서 눈치를 살핀 레이블라는 놀란 사내가 물건을 포장하는 사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지나가듯 물었다.

“아저씨는 바리베 왕국에 가 봤어요?”

“그래, 가 봤지. 좋은 나라였어.”

“정말요? 그럼 이 물건들도 전부 바리베 왕국에서 가져오신 거예요?”

“그건 아니지. 이 물건들은 주기적으로 바리베 왕국을 오고 가는 상인에게 부탁한 것이란다.”

“그곳으로 가는 상인들도 있어요? 가는 길이 멀고 험하다고 들었는데.”

“그야 그렇지만, 그곳에서 발명된 물건은 그만큼 귀중하니까. 지금 네가 산 것도 우리 같은 서민이 2년은 족히 먹고살 돈이 아니니.”

그렇게 답하며 사내가 포장한 물건을 건넸다. 이런 쓸모없는 물건을 취미 삼아 사는 귀족들이 제법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너 어린애가 그만한 돈은…….”

사내의 말을 자르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질문을 이었다.

“그런 상단 행렬이 자주 있어요?”

“아니. 일 년에 한두 번이지. 네 말대로 멀고 위험하니까.”

“그럼 이 물건들은 올해 받아 온 거예요?”

“그래. 다음 물건은 두 달 후 출발하는 상단이 가져올 테니, 적어도 6개월은 걸릴 테지. 상단도 그렇고 일정도 그때그때 바뀌어서 정확하지 않아.”

“그렇구나!”

궁금한 게 많은 소녀인 양 자연스럽게 답했지만, 구슬을 쥔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두 달 후.’

바리베 왕국으로 넘어가려면 필수적으로 루빈디시를 통해 육로로 이동해야만 했다. 해로도 있기는 하나, 해적 때문에 위험하여 중대한 일이 아니고서야 보통은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에 탈출을 마음먹었을 때는 거기까지 어떻게 가나 막막했었는데, 때마침 비체라발리 영지로 가게 되다니 처음으로 운이 따라 줬다.

‘두 달 후에는 이 빌어먹을 소설 속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그토록 염원하던 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지자 벅찬 환희가 차올랐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레이블라는 사내에게 그때 또 오겠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고 가게를 나섰다.

검은 하늘에 뜬 달을 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키득키득. 미처 삼키지 웃음이 가끔 입 밖으로 새어날 만큼 행복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길 잃은 아이인 척하며, 마차를 수배해 다시 비체라발리 공작저에 도착한 레이블라는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산책을 오래 다녀오는구나.”

소리를 죽인 채 방에 들어선 순간 비체라발리 공작과 딱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여긴, 어떻게?”

당황한 나머지 속으로 떠올린 말이 바깥으로 나왔다. 이에 놀란 레이블라가 눈을 홉 뜨고 입술을 깨물었다. 소녀의 눈꼬리가 축 아래로 내려갔다.

비체라발리 공작은 화려한 의자에 앉은 채 그 적나라한 표정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뱉는 목소리는 무심했다.

“네가 늦은 시각이라도 좋으니 날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아.”

빌어먹을. 왜 그런 소리를 했지?

레이블라는 다급히 사과했다.

“죄송해요. 별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그냥 저를 받아 주셔서 감사한다고…… 그 말을 하고 싶어서요.”

“그래.”

“힘든 결정을 내려 주신 만큼, 도움이 될게요, 공작님.”

분명 하루아침에 비체라발리에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아마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좋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입양을 빌미로 황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 덕에 이 미쳐 돌아가는 제국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커졌다.

그러니 받은 만큼은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도움이 되겠다고 진심으로 말했건만. 돌아온 것은 비체라발리 공작의 비웃음이었다.

“펠리시티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구나.”

“……네?”

뜻 모를 소리를 뱉은 비체라발리 공작이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레이블라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레이블라의 머리를 대충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손길이 거칠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헝클어 부스스하게 만들더니,

“자거라.”

짧게 한마디만을 남긴 채 나가 버렸다.

갑작스러운 접촉과 퇴장에 황당해진 레이블라가 그가 나간 문을 한참이나 보았지만, 다시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그냥 이렇게 가 버린 모양이었다.

……뭐지?

‘꿈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레이블라가 정수리를 매만졌다. 그는 사라졌지만, 머리에 남은 온기와 감촉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무척이나 따스하고, 다정한 온기였다.

* * *

황제는 정말 나쁜 놈이었다.

‘이게 무슨 가벼운 감기야.’

독의 부작용이 가벼운 감기라고 하더니. 실제로 나타난 증상은 지독한 독감에 가까웠다. 열이 펄펄 끓고 목이 부어오르는 데다가 호흡도 굉장히 불편해졌다.

다급히 해독제를 삼켜서 고통이 줄기는 했으나, 마법이나 신성력이 아니니 금세 증상이 좋아질 리 없었다. 루빈디시로 향하는 마차에 오른 지금까지도 약하게 감기 증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상태로 루빈디시까지 갈 수 있을까?’

마차는 황궁의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안락했지만, 그래 봤자 마차는 마차였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데 과연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면 어린 몸이 버틸 수 있을까.

게다가 동행인이 바로 비체라발리 공작이었다. 그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친한 사이가 아니다 보니 함께 여행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시작부터 숨이 막히는데, 앞으로 첩자 노릇을 계속해야 한다니!

‘이놈의 황제는 도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어떻게 숨기냐고! 이걸!

‘확 말해 버려?’

첩자가 되라는 명을 받았다고.

울컥 밀려드는 짜증에 모두 터트려 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었지만, 한숨과 함께 포기했다.

그랬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테니까.

비체라발리에 침투하라는 제안을 들은 순간부터 자신은 황제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인형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실제로는 놀아나지 않을지언정,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니 괜히 허튼수작을 부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어쨌든 그는 이 세상의 승리자이니 눈에 더 거슬려 봤자 좋을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 반항으로 고통받는 건 한 번이면 족하지.’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라고 결심하지 않았었나. 살아남기 위해선 그를 거슬러선 안 됐다.

소설을 보며 딸 바보라고 좋아했던 나야, 반성 좀 해라. 그놈은 딸 바보가 아니라 그냥 사이코패스였단다.

과거를 반성하며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뱉고 있을 때였다. 마차 밖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벌컥 문이 열리고 건장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이었다.

“오셨어요?”

해사한 미소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를 건네었다.

그러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우아한 몸짓으로 맞은편에 앉고서 눈을 마주쳐 왔다. 바라보는 눈길이 집요했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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