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5)화 (45/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5화

“고개를 드셔도 돼요.”

레이블라의 말에 헤넌이 고개를 들었다. 이어 사용인들 또한 고개를 들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피곤하시지요? 우선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헤넌은 서글서글하게 미소 지으며 레이블라를 그녀가 머물 방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위치가 손님이 머물 별관이 아니라 직계나 머물 법한 본관이었다.

이내 어느 방 앞에 멈춘 헤넌이 말했다.

“오늘 결정된 일이라 미처 아가씨의 방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내일이면 영지로 떠날 테니, 부족하더라도 오늘만 참아 주십시오.”

……부족?

겸손한 말과는 달리, 그가 내어 준 방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들어가기조차 꺼려질 정도였다.

‘펠리시티가 왔다고 기선 제압이라도 하는 건가?’

전에 만난 적이 있는 공작이면 몰라도, 그 아래의 사람들이 펠리시티에 대한 감정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레이블라는 얕은 의문을 삼키며 답했다.

“저에게 넘치는 방이네요. 정말 제가 머물 방이 여기인가요?”

“넘치다니요. 펠리시티의 화려함과 우아함은 저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에게 걸맞게끔 최선을 다해 영지의 방을 꾸미겠습니다.”

아니, 제 말은 어디로 들으셨어요……?

솔직히 예전 펠리시티 공녀로 살 때야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로만 둘러싸여 있었으니 그런 생활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고, 곧 집안이 멸문하면서 그런 것도 사라졌다.

기사들에게 쫓기느라 마구간에서 자기도 하고, 며칠이지만 감옥에서 지내기도 했다 보니 그저 비바람을 피하고 마음 편히 잘 수 있는 폭신한 침대만 하나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

하지만 이런 구질구질한 말을 하기는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공작님께서는요?”

도착했으니 의례상 인사라도 해야지 싶어서 물었는데, 헤넌이 미안한 표정으로 답했다.

“공작님께서는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돌아오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늦은 밤이라도 좋아요. 공작님께서 시간이 되실 때면 언제라도 이야기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가 깍듯이 인사하고 돌아서자, 이어서 레이블라의 짐이 들어왔다.

그런데 분명 원래의 짐에 처음 보는 작은 가방 하나가 추가되어 있었다. 레이블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가방을 열자, 쪽지와 함께 투명한 액체가 든 자그마한 유리병이 보였다.

유리병의 모양은 익숙했다.

‘해독제구나.’

황제가 보낸 모양이었다.

‘……언제지?’

마차에 오르기 전 분명히 짐을 확인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없던 가방이었다. 언제 이게 섞여 든 걸까.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하는 건가.’

언제, 어디에서든 지켜보고 있다고.

다른 마음을 먹으면 해독제를 보내 주지 않겠다고.

레이블라는 혀를 내두르며 쪽지를 읽었다. 내용은 독에 관한 설명이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감기에 걸린 것처럼 열이 나고 으슬으슬 추울 수 있으니까 해독제를 더 먹으라는 거구나.’

작게 한숨을 내쉰 레이블라가 다시 짐을 뒤져 천으로 꽁꽁 감싸 둔 꽃 더미를 꺼내었다.

라플. 해독초였다.

‘꽃병도 있네.’

짐을 챙기면서 누군가가 넣어 준 모양이었다. 쪽지를 확인하니 라니엘의 메시지가 있었다.

[마석이 든 꽃병이란다. 오래전 황녀 전하께 받은 선물이지만, 너에게 더 필요할 것 같구나.]

해독초를 의심받지 않기 위해 다른 꽃과 섞어 꽃다발을 만들곤 했었는데, 꽃을 좋아한다고 오해받은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해독초 때문에 걱정했는데 잘됐어.’

마석이 든 꽃병은 무척이나 비싸지만, 꽃을 오랫동안 싱싱하게 해 주는 효과가 있었다. 생화로 먹어야 하는 해독초이기에 일부러 이곳에 오기 전에 잔뜩 따 왔었는데. 다행이었다.

‘근데 이걸 언제 먹지.’

원래대로라면 황궁을 떠나자마자 마차 안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쪽지를 보고 나니 지금 먹어도 될 타이밍일지 조심스러워졌다.

독이라고 해도 증상이 모두 같지 않았다. 겉보기에 멀쩡할 수 있고, 땀이 뻘뻘 날 수도 있고, 혹은 두통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앞으로 계속 황제의 첩자를 속이기 위해서는 일단 독효가 어떤 증상으로 나타나는지 알아 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며 라플을 다시 넣어 두었다.

‘첩자는 또 어떻게 찾지?’

분명 곁에 감시하는 자가 있다고 했다. 이미 비체라발리 안에 첩자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보냈다는 건 지금 있는 자가 공작가 깊이는 침투하지 못한 상태여서일 것이다.

아니지, 잠깐만.

‘내가 굳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있나?’

이대로 도망치면 되는 거 아니야……?

바리베 왕국으로 가야겠다는 지난 결심이 다시금 떠올랐다. 칼릭스를 만나 황궁으로 돌아가며 흐지부지된 계획이긴 했지만, 지금 다시 꺼내 들어야 할 때였다.

도망치면 첩자의 눈을 속일 필요도 없고, 아들이 아빠를 죽이는 패륜과 함께 처절하게 멸문하는 가문과 연루될 일도 없었다.

더군다나 황녀를 학대했다는 펠리시티의 누명은 아직 벗겨지지 않은 채였다. 황녀의 추종자인 로이안과 엮여 봤자 목숨만 위협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도망치는 게 상책이었다.

……이거 완전 좋은데?

* * *

도망을 결심했으니 이제 계획이 필요했다.

그 계획을 고민을 하다 보니 순식간에 밤이 깊어졌다.

저택 내에서도 인적이 줄어들었을 때쯤 레이블라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존재감이 없다는 게 이럴 때만큼은 참 유용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복도를 나서 저택 후문으로 향한 레이블라는 잠시 수색한 끝에 바깥에 서 있는 마차 한 대를 발견했다.

‘저거다!’

레이블라는 쪼르르 다가가서는 폴짝 뛰어 마차에 딸린 수레에 탑승했다. 이 마차는 저택마다 있는 쓰레기 마차로, 저택에서 하루 동안 나온 쓰레기를 처리했다. 보통 늦은 밤이나 새벽 사이, 귀한 분들이 활동하지 않을 시간에 다녔다.

더러운 것은 높으신 분들의 눈에 띄지 않게끔 처리하는 게 사용인들의 역할이니까.

펠리시티에서도, 황궁에서도 그것은 같았기에 혹시나 했는데, 비체라발리도 다르지 않아 다행이었다.

레이블라는 코를 막은 채 입으로 호흡하면서 마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이블라는 조심히 고개를 들어 수레 바깥쪽을 내다보았다.

저택가를 빠져나온 마차는 상가 쪽으로 이동했고, 레이블라는 마차가 잠시 느려진 틈을 타 폴짝 뛰어내렸다. 바쁘게 걸음을 놀려 도착한 곳은 널찍한 상가 골목. 상단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다른 거리는 모두 불이 꺼진 채로 하루의 마지막 풍경을 그리는데, 이곳은 달랐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활발하게 오가는 사람들과 물건을 흥정하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다음 날 영업을 위해 식자재나, 가게를 채울 물건을 구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 북적대는 인파 사이를 누비며 레이블라는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한 가게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비교적 다른 곳보다 한가해 보였다

‘그래도, 여기가 맞아.’

가게 유리창 안쪽을 보니 바리베 왕국의 물건이 한가득 있었다. 지난 축제 날 아이들과 놀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처음 탈출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레이블라는 일단 정보 길드로 가서 바리베 왕국으로 가는 방법과 지도를 얻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하고 보니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곳은 제국의 중심, 수도. 황녀에게 우호적인 길드가 이 일대를 주름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의뢰인의 신상은 비밀로 지켜 준다고 하겠지만, 황녀에게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으니 잘못했다가는 시도해 보기도 전에 도망치려는 것을 황제에게 들킬 수도 있었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차선책으로 일반 상인들에게 정보를 얻기로 했다.

그 선택이 옳기를 바라며, 레이블라는 부푼 마음을 안고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요.”

조금 수줍은 듯한 부름에 우락부락한 커다란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한참 아래를 내려다보며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로 왔느냐 꼬마야.”

훑어보는 눈빛이 차가운 것이 손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레이블라가 그를 빤히 보며 답했다.

“할머니 선물을 구하고 싶어서요. 바리베 왕국의 물건이 많은 것 같은데. 추천해 주실 수 있으세요?”

정확히 바리베 왕국이라고 콕 짚어 묻는 말에 그의 불손했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