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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4)화 (44/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4화

* * *

“비체라발리에서 알게 되는 모든 일을 보고하도록.”

레이블라가 황제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것과 동시에 충격적인 명령이 떨어졌다. 비체라발리의 첩자가 되라는 명령이었다.

레이블라는 이제야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황녀가 바라서는 무슨.’

이렇게 되도록 황제가 유도했음이 틀림없었다. 자신을 이렇게 이용하려고.

‘이 나이에 첩자 노릇을 하라니.’

어차피 사막의 모래알보다도 의미 없는 목숨이니 어떻게든 이용해 먹을 작정인 듯했다.

‘내가 한 일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네.’

황제가 이런 치졸한 짓을 저지르는 이유는 짐작 가능했다. 일전에 그녀가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보은을 하겠답시고 가문 내 있는 첩자의 정보를 흘려 주었으니까. 아마 그 일로 비체라발리 내부의 정보를 알려 주던 자가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새 사람을 심어 넣어야 할 터. 레이블라도 그중 하나로 선택된 듯했다.

그러니 이것에 대한 거부권은 없었다.

레이블라는 첩자가 되어야만 했다.

제안을 받은 이상 거절하면 죽음뿐이다. 이 자리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레이블라는 재차 고개를 숙였다.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폐하.”

이에 황제가 물끄러미 레이블라를 응시했다.

분홍빛 머리카락의 아이였다. 황녀보다도 조금 작은 것 같기도 했다. 저 아이를 보니 똑같은 분홍빛 머리카락의 한 녀석이 생각나 그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네가 황녀에게 충성을 다한다지.”

“예, 제 은인이시니까요.”

레이블라는 감옥에 갇힌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황녀의 말 한마디에 황궁으로 끌려왔던 때의 기억을 새삼 떠올리며 답했다. 그러자 황제가 흐뭇하게 그 이야기를 듣다가 말했다.

내뱉는 목소리는 차가웠다.

“하지만 난 널 믿지 못한다.”

당연한 말이었기에 괜히 겁먹지 않았다. 그가 믿는 사람이라고는 황녀가 유일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레이블라는 살기 위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믿음을 드릴 수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무해한 얼굴을 한 채 충심이 어린 목소리로 묻자, 그가 가소롭다는 듯이 보았다. 하지만 곧, 스스럼없이 제 목적을 털어놓았다.

“목숨을 담보로 맡겨라.”

“……어떻게?”

레이블라가 어리둥절해하며 되묻자, 황제가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종에게 눈짓했다. 이내 시종이 작은 유리병 두 개를 가져와 레이블라의 앞에 놓았다. 한쪽에는 투명한 물이 담겨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초록빛을 띤 물이 들어 있었다.

“내 눈앞에서 독을 먹거라.”

독이라니.

“초록색을 띤 것은 먹으면 바로 목숨을 잃을 만큼 치명적인 독이다. 그리고 투명한 것은 그 해독제이지. 주기적으로 먹어야만 살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는 낫지 않겠지요?”

그는 침묵했지만, 그 침묵이 정답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듣자 하니 맹독을 먹여 놓고 주기적으로 증상을 완화할 수 있는 약을 주며 목숨을 담보로 사람을 제 입맛대로 부리겠다는 뜻인데.

‘이거 완전 쓰레기 아니야?’

레이블라에게는 원작에서도 치트키 역할을 했던 만능 해독초가 있으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식에 치가 떨렸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생각을 하는 거지.

‘이런 빌어먹을 놈이 이 나라의 황제라니.’

속으로 온갖 욕을 하면서도 레이블라의 자그마한 손은 초록색 독약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장 집어 들어 입술에 대고 기울였다.

온몸을 콕콕 찌르는 살기가 당장 이 약을 먹지 않으면 이곳을 살아서 나갈 수 없다고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곧 알싸한 맛이 잇새로 들어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도가 서서히 녹는 기분이었다. 타는 듯한 고통에 목구멍이 죄었다.

병 안의 것을 모두 넘긴 레이블라는 재빨리 투명한 병 속에 든 독의 완화제를 마셨다. 효과가 느리기는 하지만, 기도가 막혀 답답했던 증상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미간을 찡그린 채 양손으로 목을 감싸고 있는 소녀를 무표정으로 응시하던 황제가 말했다.

“감시를 붙일 테니 앞으로도 계속 챙겨야 할 것이야.”

비체라발리 영지로 가서도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조금이라도 배신할 기미가 보이는 날에는 완화제도, 네 목숨도 없다고. 보장하지 않으니, 비체라발리에 착 달라붙어서 임무나 수행하라는 명령이었다.

딸과 또래인 아이에게 동정심을 베풀 법도 한데, 일말의 자비도 없는 태도에 레이블라는 참지 못하고 살짝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예, 폐하.”

심저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울분을 누르며, 소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만약.

먼 훗날 내게 힘이 생긴다면.

널 제일 먼저 죽여 버릴 거야.

* * *

“아가씨, 저는…….”

알현실을 나오자 말쑥한 차림새의 사내가 레이블라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디서 본 얼굴이었다. 아마도 비체라발리 공작의 마차를 모는 마부인 듯했다.

레이블라는 그를 지나쳐 달리기 시작했다. 다급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심장이 쉼 없이 펌프질하고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숲속 깊은 곳, 커다란 나무에 둘러싸인 궁에 다다랐다.

레이블라는 궁 안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칼릭스!”

“칼릭스 얼른 나와!”

“칼릭스으!”

큰 소리로 외치고 또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제 목소리뿐이었다.

레이블라는 조용한 복도를 가로질러서 그와 늘 만나고, 대화를 나누던 방으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열어 맞은편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곳에서 자신을 맞아 주던 소년이 앉아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레이블라는 터벅터벅 걸어서 창가에 앉았다. 주인이 사라진 지 오래인 자리는 차가웠다.

“나쁜 놈.”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는 게 어디 있어.

며칠 전 그를 만나려고 왔을 때, 레이블라를 반긴 것은 짧게 쓴 편지 하나였다.

편지의 내용은 간결했다.

[바다를 보러 가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나중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하기로 하자’라고 한 것에 대한 소년의 대답이었다.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았으면서.”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나쁜 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오면 마음이 평온해졌는데 지금은 황녀궁이나, 이곳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갑갑하고, 또 갑갑했다.

“내가 널 많이 의지했었나 봐.”

그의 외로움을 자신이 달래 주고 있다 생각했는데, 역으로 저 또한 그에게 생각보다도 더 의지한 모양이었다.

레이블라는 한숨을 내쉬면서 창문 바깥을 내다보았다. 시야에 걸리는 풍경은 이끼가 가득한 분수대와 울창한 숲. 그리고 입구. 자신이 매번 이 궁에 올 때마다 오고 가는 길이 훤히 보였다.

그가 계속 저곳을 바라보며 자신을 기다렸을 것을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아렸다.

“그래. 좀 기다려 주지 뭐.”

그에게는 많은 것을 받았으니까.

조금 섭섭한 것쯤이야 견딜 수 있었다.

크게 한숨을 내쉰 레이블라가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책이 놓여 있었다.

그 책의 첫 장을 연 레이블라는 가져온 펜으로 글귀를 남겼다.

[그래, 바다를 보러 가자.]

그가 꼭 이 메시지를 보길 바라면서.

“우리 꼭 살아남아서 다시 만나자, 칼릭스.”

* * *

다시 황녀궁으로 돌아갔을 때, 레이블라는 아침까지만 해도 제 물건으로 가득 찼던 방이 텅 비어 버린 것을 볼 수 있었다. 비체라발리의 시종들이 그녀의 짐을 모조리 챙겨 갔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의 모습에 레이블라는 황녀궁의 시녀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정작 황녀는 볼 수 없었다.

후련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찝찝한 마음으로 마차에 오르고, 멀어지는 황궁을 보면서도 레이블라는 여전히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지 믿기지 않았다.

시종의 말에 따르면, 일단은 수도에 있는 비체라발리 소유의 저택에 묵은 다음 내일 바로 영지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비체라발리와 펠리시티가 지독하게도 대립하고 서로를 무시한 세월이 얼마인데. 펠리시티의 핏줄이 비체라발리의 양녀로 입양되다니. 부모님이 보면 얼마나 황당해할지.

하지만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면서 보이는 웅장한 저택의 모습에 서서히 제가 처한 상황이 피부에 와닿기 시작했다.

레이블라가 체념과 같은 숨을 토해 내며 마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누군가가 쏜살같이 다가와 손을 잡아 주었다. 낯익은 사람이었다.

이름은 아마도 헤넌 리치필드였던가. 비체라발리 공작의 보좌관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그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용인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오랜만에 받는 극진한 환영이라서 조금 얼떨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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