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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3)화 (43/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3화

* * *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귀족원 회의가 열렸다.

갑작스러운 소집에 많은 귀족이 빽빽하게 앉은 채 원탁을 지키고 있었다.

리암은 황제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원탁을 내려다보았다. 그 자리를 올려다보는 귀족들의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드문 풍경이었다.

그 이유는 눈 마주치기도 두려운 황제의 품에 안긴 작디작은 소녀 때문이었다.

“자, 골라 보아라.”

황제의 목소리에 황녀를 보던 귀족들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황녀가 귀족원 회의에 등장한 것도 의아할 판에, 갑자기 무엇을 고르라는 것인지 어리둥절한 듯했다. 이에 황제가 설명을 보탰다.

“제국의 보석을 구한 아이에게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줄 생각이다.”

그 말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가 물었다.

“‘그’ 아이를 입양해 가란 말씀하시는 겁니까?”

황녀가 납치당했을 때, 멸문한 펠리시티의 아이가 황녀를 도왔다고 크게 소문이 났었다. 펠리시티의 아이에게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준다니, 그 의도가 알쏭달쏭했다.

그때, 황제가 재차 말문을 열었다.

“황녀가 직접 선택한다.”

“……저, 정말이십니까?”

“전하께서요?”

‘황녀가 직접 선택한다’라는 말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조금 전까지 상황을 살피며 숨죽이고 있던 귀족들의 두 눈에 불씨가 피어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황녀에겐 은인이 되는 아이였다. 그 출신이 하필 멸문한 펠리시티라 의구심이 들었을 뿐이지, 아이에게 뒷배를 만들어 주기 위한 입양임이 명백하다면 이건 등에 날개를 다는 격이었다.

황녀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회의장 안을 찬찬히 둘러보자, 귀족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제가! 제가 입양하겠습니다.”

“저희 가문으로 보내 주십시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아들이 셋입니다! 딸이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활발하게 자기소개를 이어 가는 귀족들을 물끄러미 살피던 에리나가 잠시 콧등을 찡그렸다.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들인 걸 알지만, 그래도 막상 레이블라를 원한다고 간절히 소리치니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하지만 시선을 거두지 않고 꼼꼼하게 확인했다. 누가 좋을지, 어디로 보내야 모두가 만족할지.

‘남작은 아니야.’

그의 영지는 수도에서 만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백작의 영지도 고작 나흘 만에 가잖아. 후작은 반나절도 안 돼.’

저 가문의 영지는 평지에 있어 수도까지 오고 가기 수월하고 저긴, 또 저긴…….

하나같이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리나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뱉은 찰나, 리암과 사이가 좋지 않아 내내 의도적으로 외면하던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기회를 잡으려 분투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자.

‘저 사람이라면…….’

비체라발리 공작이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의 영지인 루빈디시는 수도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오고 가는 데만 한 달이 족히 걸렸으며, 험준한 산을 넘어야 해서 왕복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니 저곳이라면 그녀가 원하는 조건에 딱 부합했다.

‘하지만 로이안이 있어.’

순간 저를 보고 환하게 웃어 주던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처럼 외동으로 자라 외로움이 많아 보였던 소년. 레이블라가 그와 가족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로이안은 동생이 갖고 싶다고 했었지.’

‘아주 어릴 때 어머니에게 동생이 갖고 싶다며 조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 말하던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만약 레이블라가 비체라발리로 간다면, 로이안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럼…….’

망설이던 황녀의 시선이 조금 옆으로 향했다. 비체라발리 공작의 근처에는 배가 빵빵하게 나온 중년의 남성이 기름진 얼굴로 웃음 짓고 있었다.

‘티그리 남작.’

그의 영지 또한 루빈디시 만큼이나 멀리 있었다.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결심한 에리나가 손끝을 들어 티그리 남작을 가리키려는 찰나, 그가 불쑥 밀려났다. 얼결에 에리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자리에 비체라발리 공작이 서게 되었다.

살짝 당황한 에리나가 다시금 티그리 남작을 향해 손끝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그보다 앞서 비체라발리 공작이 말했다.

“황녀 전하께서 원하시니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그러자 잠자코 상황을 살피던 황제가 물었다.

“황녀. 비체라발리 공작을 가리킨 것이 맞는 것이냐.”

아니, 그게 아닌데.

에리나는 재깍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느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레이블라는 목숨 걸고 자신을 구해 준 아이였다. 그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 은인을 누가 봐도 가족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할 사내에게 보낸다는 것은 ‘황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비체라발리에 보내고 싶지는 않은데…….

머뭇머뭇하는 사이, 장내에 정적이 일었다. 황녀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소녀는 그들의 기대를, ‘착한 에리나’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끝내 에리나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네!”

그리고 그녀의 답과 함께 황제가 선언했다.

“그럼 비체라발리 공작이 그 아이를 입양하는 것으로 하지.”

“예, 폐하.”

대답과 함께 은빛 머리카락의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보면서 에리나는 생각했다.

그래, 원래 이러려고 했다고.

이 선택이 최선이라고.

자신에게도, 로이안에게도. 그리고 그 아이에게도.

* * *

“……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제가 입양되었다고요?”

한마디 말도 없이 갑자기 입양이라니. 뭐가 잘못된 게 아닐까.

“혹시 잘못 들은 거 아니세요?”

레이블라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반역죄로 멸문당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갑자기 입양돼? 게다가 뭐라고?

“제가 비체라발리 공작가에 입양되었다니요.”

레이블라가 의문을 표하자 라니엘이 답했다.

“내가 직접 듣고 오는 길이다. 확실해.”

“말도 안 돼.”

비체라발리는 지금 전쟁에 참여하는 문제와 포스타리모 문제로 황제와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황제가 비체라발리 공작 앞에서 칼을 뽑을 정도였다고 하니, 거의 파국으로 치닫기 전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사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제파의 주축으로, 황제의 편에 서서 펠리시티와 대립했던 비체라발리이기에 이를 지켜보는 귀족들도 상당히 놀라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황녀의 최측근으로 겨우 다시 재기하고 있는 펠리시티를 양녀로 보낸다고?

지난날 비체라발리와 엮이고 싶지 않아서 겨우 밀어냈건만,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형국이었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황궁으로 돌아온 뒤,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황녀의 이상한 투정도 잘 받아 주고. 꽃도 스무 번이나 따 오고. 정말로 황녀를 위해 힘껏 노력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너에게는 좋은 일이지 않니?”

라니엘이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얼빠져 있는 레이블라를 보며 말했다.

“황녀 전하를 모시는 것도 분명 숭고한 일이지만, 너에게는 아직 가족이 필요해. 돌봄이 필요한 나이니까.”

그런 목적이라면 다른 가문으로 입양 보냈어야지.

비체라발리는 누가 봐도 ‘돌봄’을 줄 만한 가문이 아니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은 지나치게 바쁜 탓에 자기 아들이 외삼촌에게 학대당하는지도 모르고 산 못난 아빠이니까.

“그러니까 얼른 가서 짐 정리를 하여라. 비체라발리 공작가에서 오늘 당장 널 데리러 온다고 하는구나.”

“정말, 가라고요?”

이제 황궁이 살 만해졌다 싶었는데, 또다시 새로 시작해야 한다니.

충격받은 얼굴로 서 있으니, 라니엘이 다가와 레이블라의 양어깨를 붙잡고 빙글 돌려서 문을 보게 했다. 그리고 툭, 등을 두드렸다. 얼어붙은 듯 굳어 있던 발이 한걸음 떨어져 문과 가까워졌다.

레이블라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보자, 라니엘이 말했다.

“행복해지렴.”

“……감사합니다.”

레이블라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인사하고 방문을 나섰다.

문밖으로 나오자, 눈앞에 커다란 꽃다발이 그녀를 맞이했다.

“축하해, 레이블라.”

황녀를 모시는 동안 함께했던 데이지, 줄리아, 엠마였다. 다들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온 모양이었다. 영문 모를 상황이었지만 일단 인사는 해야 했다.

“……그간 잘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시녀님들 덕분에 편하게, 행복하게 잘 지냈어요.”

벽처럼 자신을 둘러싼 시녀들에게 레이블라가 깊숙이 고개 숙였다.

그러자 줄리아가 새침하게 말했다.

“말은 바로 해야지. 처음에는 힘들었잖아.”

“나도 처음에는 널 오해하고 의심했어.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

“네가 그렇게 전하를 위하는 줄도 모르고, 펠리시티라는 이유로 안 좋게만 생각했어.”

“맞아. 네가 순진해서 우릴 용서해 준 거지.”

그들의 순순한 고백에 레이블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다 지난 일이기도 하고 결국 다 잘해 주셨잖아요. 꼼꼼히 일도 알려 주시고.”

분명 처음 황궁에 던져졌을 때만 해도 다들 모나게 굴었지만 차츰 나아졌다. 최근 들어서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레이블라를 반겨 주고, 친절하게 대해 줘서 황궁 생활이 이전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정말 감사했어요.”

“착해 빠져서는. 잘 지내. 건강하고.”

엠마가 레이블라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어쩐지 손길에서 아쉬운 마음이 묻어났다.

덩달아 섭섭해진 레이블라가 아쉬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허겁지겁 달려와 레이블라의 앞에 섰다.

그리고 다급히 소리쳤다.

“레이블라, 폐하께서 찾으셔.”

이 세상에서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의 부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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