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2)화 (42/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2화

* * *

“시정하겠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쿵, 소리가 들리면서 집무실의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에리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정말 왜 이러지?’

요즘 들어 자꾸만 미운 세 살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이거 싫어.’

‘안 입을래.’

‘필요 없어.’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좋지 않은 행동이란 걸 알고 있는데도, 미미하게 짜증이 일었다. 무언가가 톡톡 신경을 건드리는 느낌에 내뱉고서 후회할 말을 자꾸만 하게 됐다.

‘정말 이러고 싶지 않은데…….’

그 원인은 알고 있었다. 분홍빛 머리카락의 소녀. 그녀의 우상, 레이블라.

최근 레이블라만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워질 때가 있었다.

‘괜찮아.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니 잘 모르는 게 당연해.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 레이블라. 너만큼 전하를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저는 아무렇지 않아요. 다만 제가 일을 제대로 못 해서 전하가 불편하실까 그게 걱정이에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관심을 받는 레이블라를 볼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그토록 좋았던 저 아이가 조금씩 미워지려고 했다.

레이블라가 주목받는 만큼 어쩐지 제 곁에 있던 사람들이 멀어지는 것만 같아서. 모두의 관심이 자신이 아닌 레이블라에게 꽂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모든 걸 빼앗기게 될까 봐서.

‘너는 뭐가 그렇게 특별한 걸까?’

자신에겐 분주히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사람들의 관심도, 칭찬도, 아빠의 사랑도. 모두 자신이 과거와 달라졌기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 주었기에 그 대가로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레이블라는 달랐다.

레이블라는 사람들에게 애교를 부리지도 않았고, 억지로 미소를 꾸며 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모이고, 웃음이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이틀 전에도 그랬다.

‘한심하고 무능하구나.’

멍청한 것보다 노력하지 않는 자를 더 혐오한다던 제 스승은 언제나 레이블라를 한심하게 보며 독설을 퍼부었었다.

펠리시티의 수치라면서.

그런데 그가 갑자기 달라졌다.

‘도대체, 이런 생각은 어떻게 했지? 문자가 이렇게나 들어가는 수식이라고?’

레이블라가 일하는 중에 짧게 남긴 쪽지를 보고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득달같이 쫓아갔다. 소녀에게 착 달라붙어서 질문하는 스승의 목소리는 흥분에 가득 찼고, 눈빛에서는 호기심이 넘쳐흘렀다.

반역 가문의 자식이라며 벌레처럼 보던 이전과는 달랐다. 그건 지독한 관심이었다.

하지만 레이블라는 그 관심이 싫은 모양이었다. 자리를 피하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에리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거절하는 걸까? 남들은 칭찬받고 싶어서 노력하고, 더 노력하는데.

그런 생각들이 계속되자 속이 불편해졌다.

‘내가 나빠.’

레이블라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녀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고, 자신에게도 넘치도록 잘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라니엘도 저 아이가 그만두게 한 게 아니잖아.’

라니엘은 라니엘의 행복을 찾았을 뿐이었다. 쓸쓸하고 외롭지만, 그간 곁에서 힘들었던 그녀가 자신만의 행복을 찾았으니 축복해 주어야 마땅했다.

‘괜한 심술을 부리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며 에리나는 며칠간 제 심술을 모두 받아 준 레이블라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 보랏빛 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줄 꽃병이었다. 레이블라라면 초록빛 두 눈동자를 살포시 접으며 감사히 받을 것이다.

그렇게 레이블라를 찾아갔는데.

“레이블라, 무슨 일 있니?”

“무슨 일이야. 응? 왜 그래?”

“아, 아니에요! 아무 일 없어요.”

“속상한 일 있으면 털어놔. 뭔데 그래. 무슨 일이야?”

레이블라가 시녀들에게 둘러싸여서 관심받는 모습을 보자 억눌렀던 불안감이 다시금 치밀었다.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꽃병을 떨구자, 그제야 시녀들의 시선이 에리나에게로 향했다.

“어머! 전하!”

“괜찮으세요?”

당황해서 달려오는 시녀들의 눈동자에는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들의 관심이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왔지만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관심을 끌려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치졸하게 느껴져서.

결국 깨진 꽃병을 치우는 시녀들을 뒤로하고 쌩하니 황녀궁을 나섰다. 그 길로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떻게든 그 어둡고 습한 마음을 숨기려 밝은 목소리로 근황을 재잘거렸는데.

아빠는 알아챈 모양이었다.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 아빠 품을 파고들자, 다정하게 등을 토닥이면서 그가 말했다.

“아빠가 치워 줄까?”

치워 준다고……?

리암의 이야기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의 ‘치워 줄까’라는 말은 곧 ‘죽여 줄까’라는 말과 같았으니까.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말에 찰나지만 마음이 동했다. ‘그 아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치밀었다.

‘……아니야.’

모두에게 사랑받는 ‘에리나 커티스 라스텔’은 그래서는 안 됐다. 황녀는 애써 흉한 감정을 억누르며 리암에게 말했다.

“아빠, 안 돼요. 아셨죠?”

단순히 근황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은연중에 레이블라를 향한 못난 마음이 묻어난 듯했다.

“우리 딸이 힘들어하는데, 아빠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그냥 제가 부족해서 그래요. 레이블라는 잘못한 것이 없어요.”

“하지만 아빠는 우리 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속상한데.”

무조건 제 편을 들어 주는 황제의 모습에 에리나의 새카맣게 물들었던 마음이 조금은 희석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웃자, 리암은 그게 귀여웠는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아빠가 어떻게 해 줄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완전히 치우는 게 싫다면, 눈앞에서만 치워 줄까?”

“눈앞에서 치워요?”

뭐가 다른 거지?

에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리암을 바라보자, 눈꼬리를 휘며 웃은 그가 덧붙였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이 세상에 없거나 노예로 살고 있었겠지. 지금이라도 광산에 보낼까?”

“……험한 일 하게 하긴 싫어요.”

“그럼 어디 폐궁에라도 처박을까?”

“그건 너무 외롭잖아요. 레이블라는 제게 정말 잘해 주었어요.”

“……그렇다면 공적을 치하해 입양을 보내 버릴까?”

……입양?

그 단어에 에리나의 귀가 쫑긋했다.

‘입양이라면…….’

확실히 레이블라는 자신을 구해 준 공로가 있었다. 그런 아이를 갑자기 치워 버리면 모두가 의문을 품을 테고, 매정하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입양’이라면 가족을 잃은 레이블라에게 다시 집을 만들어 주는 것이니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 해요?”

“펠리시티, 그 가문이 저지른 죄가 절대 가볍지는 않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게 우리 딸 마음이니까.”

펠리시티는 일족의 목숨으로 죗값을 대신했을 만큼 황실에 크나큰 불충을 저지른 가문이었다.

아직 그 죄를 입증한 서류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데, 황제가 그 가문 생존자의 공을 치하한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자칫 펠리시티를 멸문시킨 건 황제의 오판이었고, 그걸 만회하기 위해 애쓰는 모양새로 비칠 수도 있었다.

“우리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지.”

하지만 리암 커티스 라스텔, 폭군이라고 불릴 만큼 인정사정없는 황제가 딸을 위해서 자기 말을 번복하겠다고 했다.

“죄송해요.”

“그렇게 해서 우리 딸 마음이 편해진다면 아빠는 괜찮아.”

“아빠…….”

에리나는 감격한 얼굴로 리암의 품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커다란 품에 폭 감싸진 채 있으니 큰 사랑이 느껴져 술렁였던 마음이 잔잔한 바다처럼 가라앉았다.

‘그래, 입양을 보내자.’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레이블라에겐 잘못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우상이었고 진정으로 그녀가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었다.

‘먼 곳이었으면 좋겠어.’

어디로 보내는 게 좋을지 가만히 고민하고 있는 에리나를 향해 리암이 물었다.

“아빠가 도와줄까? 선택지를 주마.”

“선택지요? 어떤…… 앗!”

리암이 사랑하는 딸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