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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1)화 (41/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1화

조금은 궁금해졌다. 황녀가 라니엘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는지.

레이블라는 그녀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주인공에게 휘둘리는 엑스트라로서의 연민을 담아서.

그에 결심을 내린 레이블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선배님들. 혹시…….”

* * *

라니엘은 옷맵시를 가다듬으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과거와는 달리, 성숙해진 모습이 새삼 낯설었다.

[만나고 싶습니다.]

며칠 전에 도착한 편지를 떠올린 라니엘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음에도 왜 이리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대로 된 맺음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모를 나이였다. 그렇게 만나 사랑을 키웠고, 평생을 함께하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는 영애와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혼인을 얼마 앞두고, 그가 파혼을 청해 왔다. 이유는 그의 집안이 죽은 황태자를 지지하는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죽음은 면했지만, 황제의 눈 밖에 난 가문이었기에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몰락하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파혼이 성립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오랫동안 다른 사람과 약혼 관계였던 그녀를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라니엘은 가문을 벗어나 황궁으로 들어왔고,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황녀를 만났다.

그녀는 작디작은 황녀를 통해 기뻐했고, 즐거워했으며 함께 슬퍼하고 행복해했다. 외로움도 황녀와 함께라면 견딜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고, 이렇게 평생 사는 것도 보람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힘겹게 헤어졌던 전 연인의 소식을 듣자, 마음이 술렁거렸다.

만나고 싶다.

그런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치밀었지만, 애써 억눌렀다.

지금껏 그녀를 숨 쉬게 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황녀였으니까.

그녀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죄스럽고 주인을 배신하는 것 같았다.

‘평생을 함께하겠노라 약속했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되뇌며 제 방을 나왔다. 그리고 업무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얘들이 왜 이러지……?’

무엇을 하려고 하면 다른 시녀들이 먼저 나서서 제 할 일을 가로채 버렸다. 시녀장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황녀의 상태를 기민하게 알아채어 주었고, 필요한 것, 불필요한 것을 재깍재깍 구분해서 행동했다.

평소라면 한두 개 못마땅한 부분이 보여 지적이라도 했을 텐데. 오늘따라 그런 부분조차 없이 깔끔하게 일 처리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한가한 시간은 길어지고, 자꾸만 그 사람이 떠올랐다. 잊고 싶어서 접시라도 닦으려고 했건만, 그마저도 시녀들이 알아서 다 해 버리는 통에 정신을 다른 곳으로 둘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쯤 알게 되었다.

저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녀가 눈치챘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녀들이 다가와 말했다.

“저희가 잘하고 있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맞아요. 시녀장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워도 저희가 있잖아요.”

해맑게 웃어 보이는 그들을 보면서 라니엘은 새삼 깨달았다.

늘 저만을 따라다니던 황녀의 곁에 어느새 수많은 사람이 생겨났다는 것을.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아끼고 사랑해 줄 사람이 하늘에 별처럼 많다는 사실을.

조금 쓸쓸해졌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없어도 잘할 수 있지?”

“네! 그럼요!”

마음에 여유가 생겨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제 감정을 피하지 않고 대면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시녀들이 씩씩하게 답하며 자리를 떠나고, 라니엘은 혼자 남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의 귀여운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소녀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편지를 읽어 버렸어요.”

먼저 사실을 밝히며 사과하는 모습이 밉지 않았다. 라니엘은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삼키며 아이의 어깨를 두들겼다.

“……전하를 잘 부탁한다.”

“그럼요! 다녀오세요.”

그간 무작정 거절했던 만큼, 연인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첫마디는 정해졌다.

귀여운 분홍 머리카락의 요정이 나를 당신에게 인도했노라고.

* * *

“그거 싫어.”

황녀의 톡 쏘는 말 한마디에 꽃병을 바꾸던 레이블라의 손이 멈칫했다.

레이블라는 금세 꽃병 두 개를 품에 안으며 황녀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전하. 다른 꽃을 준비하겠습니다.”

깍듯하게 사과를 표시하고 황녀의 방에서 나온 레이블라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꽃을 가져오겠다고 했지만, 이게 벌써 세 번째였다.

그리고 세 번 모두 시녀장이 남긴 지침대로 준비한 꽃들이었다.

‘그냥 라니엘이 가져다줘서 좋았던 게 아닐까.’

좋아하는 사람이 주는 것이면 뭐든 좋을 테니까.

“전하께서 싫다고 하셨어?”

레이블라가 꽃을 들고 휴게실에 들어서자, 잠시 휴식하고 있던 시녀들이 아는 체했다. 레이블라가 그녀들의 질문에 미소로 답하자, 그들은 의기소침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전하께서 시녀장님이 없으셔서 그런가 봐. 우리가 완벽하게 그분의 자리를 메꿀 수는 없으니까.”

“그래. 노력해도 미묘하게 거슬리는 점이 있으시겠지.”

엠마가 살짝 시무룩해진 레이블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레이블라는 씩 웃었다.

“저는 괜찮아요! 어서 예쁜 꽃을 찾아서 전하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지셨으면 좋겠어요. 혹시 추천할 만한 꽃이 있으신가요?”

“그럼…….”

황녀를 위한다고 하자, 엠마와 데이지가 두 팔 걷고 나서며 화원에 있는 꽃들을 함께 찾아 주겠노라 했다. 레이블라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황녀의 변덕에 지친 티를 낼 만한 상황이었으나, 그들은 오히려 전의를 불태웠다.

“전하의 심미안이 나날이 높아지시나 봐요!”

“저희도 더욱 분발해야겠어요. 사실 전하께서는 이렇게 변덕을 부리실 때도 정말 사랑스러워요.”

황녀에게 미쳐 있기 때문이었다.

“맞아요. 유독 어른스러우신 편이라 참 대견하면서도, 너무 빨리 커 버리신 게 아닐까 아쉬웠는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셔서 다행이지. 그만큼 우리를 믿어 주신다는 거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툴툴대면서 투정 부리는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는 그들 덕분에 레이블라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꽃을 새로 갈아야 했고, 황녀의 변덕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곧 시녀장이 오면 끝날 일이니 조금만 버티자 싶은 마음이었다.

그랬는데…….

“……그만두신다고요?”

복귀한 라니엘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폭탄선언을 해 버렸다.

‘황녀의 추종자 1호인데 이게 가능해?’

소설 속에서의 라니엘은 황녀가 로이안과 혼인을 하고, 애를 셋이나 낳을 때까지도 쭉 곁에 있었다. 그 아이들을 함께 키우면서 황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도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그만둔다고?

“시녀장의 직위를 내려놓는다는 것이지, 전하를 모시는 역할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야.”

그렇게 선언하며 라니엘이 쑥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이전에는 황녀에게만 온 주의를 기울였지만, 이제는 다른 것도 생겼으니 조율하겠다는 의미인 듯했다. 이게 그녀가 찾아낸 ‘두 가지를 모두 손에 넣는 길’인 모양이었다.

“전하께서는 허락하셨어요?”

“그래. 그래서 너희에게 말하는 거야.”

데이지의 물음에 라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내 역할을 너희 넷이 나눠서 하게 될 거야.”

그러면서 라니엘은 제 앞에 있는 네 명의 시녀를 보면서 웃었다.

“부담 갖지 마. 하던 대로만 하면 돼.”

“네, 열심히 배울게요. 그리고 축하드려요. 혼인하시는 거죠?”

“축하드려요!”

“혼인하시면 꼭, 저희도 불러 주세요. 참석하고 싶어요.”

그들의 축하에 시녀장 라니엘이 환히 웃었다. 황녀를 보필하면서도 미소 짓는 일이야 많았지만,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화기애애하게 웃는 시녀들의 모습을 보던 레이블라의 가슴속이 조금 술렁였다.

무언가 바뀌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 그 변화를 이끌어 냈다.

‘작은 변화이긴 하지만 내가 미래를 바꿨어…….’

심지어 그 결과에 모두가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간 솔직히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무엇을 해도, 어떤 짓을 해도 미래는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래서 늘 자신이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오리같이 헛된 망상을 하는 건가 걱정했었는데. 엑스트라의 미래가 바뀌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나니, 웅크리고 있던 희망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칼릭스에게도 말해 줘야겠다.’

우리가 바라는 미래가 마냥 허황된 꿈은 아니라고.

그것을 오늘 확신했노라고.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그의 궁이 텅 비어 있었던 까닭이었다.

남은 것은 오직 편지 한 장뿐.

그 편지에는…….

[바다를 보러 가자.]

함께 이뤄 나가기로 했던 꿈의 한 조각만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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