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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0)화 (40/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0화

“시녀장님?”

레이블라의 부름에 그제야 초점 없던 그녀의 눈에 선명한 이채가 돌았다. 그녀가 바라보자, 레이블라가 말했다.

“전하께서 편지지가 필요하신 것 같아서요.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시면 제가 다녀올게요.”

“아니야. 내가 가져오마.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응.”

“그럼 저는 집무실을 정리하고 있을게요.”

시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레이블라의 곁을 지나쳐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걸음걸음이 평소 완벽한 태도를 유지하던 그녀답지 않게 묘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

* * *

“오늘 시녀장님 좀 이상하지 않아요?”

모두 같은 것을 느꼈는지, 직속 시녀들이 식사하던 도중 라니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아침 식사 때부터 어딘지 넋을 놓고 있었단 이야기였다.

“오늘 댁에서 찾아온 것 같은데 집안에 혹시 나쁜 일이 있으신 거 아닐까요?”

“딱히 그런 소문은 못 들었는데. 그리고 아까 편지를 들고 찾아온 이를 봤는데 딱히 나쁜 얼굴은 아니었어요.”

“그럼 뭘까요?”

다들 의문을 품으며 의아해하던 찰나, 화제의 주인공인 라니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레이블라를 불렀다.

“네, 시녀장님.”

“전하께서 잉크가 필요하시다고 하니, 내 방에서 잉크를 가져다가 전하께 가져다드리렴. 내가 지금 다른 일이 있어서.”

“예.”

레이블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먹던 음식을 정리하려 하자, 다른 시녀들이 대신해 주겠다고 어서 가 보라고 했다.

레이블라는 감사를 표하고 서둘러 시녀장의 방으로 향했다.

시녀장의 방은 언제봐도 완벽하게 정리가 되어있었다. 딱딱 필요한 것들만이 보기 좋게 나열되어 있어서 잉크를 찾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다.

금세 잉크병을 찾았으니 바로 나가려고 했는데.

레이블라의 시선이 책상 위 편지에 닿았다. 조금 전 시녀들의 대화가 번뜩 떠올랐다.

보면 안 되는데. 어쩐지 봐 달라는 듯이 활짝 펼쳐진 편지가 자꾸만 시선을 끌었다. 뒷정리를 하지 않은 모습조차 시녀장답지 않아 의문이 커졌다.

슬쩍, 편지지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첫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라니엘에게, 라고 적힌 것으로 보아 사적인 내용인 듯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내용은 정말로 간단했다.

[그 사람이 찾아왔다.]

요점은 그것이었다.

‘……그 사람?’

그 사람이 누구지? 이 내용만 봐선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내용에 종일 그렇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아, 혹시…… 첫사랑인가?’

원작에서 황녀가 정식으로 황위 계승자로 결정된 날, 라니엘이 감격하여 나누는 대화가 있었다.

‘황녀 전하의 곁에 남기로 해서 다행이에요.’

무척이나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지만, 황녀의 곁에 남기로 하면서 첫사랑이었던 그 남자와 헤어졌다고.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황녀 전하를 보필할 수 있어서 힘든 것을 견딜 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장면이 분명 있었다.

‘아마도 지금이 그때인가 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지, 황녀를 선택할지 결정하는 시기.

‘라니엘은 결국 황녀를 택하겠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남을 위해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분명, 기껍기만 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

굳이, 왜 하나를 택해야 하는 거지?

혼인하더라도 황녀의 곁에 남고자 한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왜 엑스트라는 늘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면서까지 주인공을 위해야 하는 걸까?

* * *

조르륵. 황녀의 빈 잉크병에 잉크를 옮겨 담으며 레이블라는 슬쩍 라니엘을 훔쳐보았다.

“그쪽에서는 아내를 데려오는 거야?”

“예. 하지만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굳이 전하께서 그분을 맞이할 필요는 없다고 하세요.”

“으음. 하지만 황실에 여성이라고는 나밖에 없잖아. 내가 맞이해야지, 누가 맞이해.”

황녀가 자신이 어른이라는 듯 고개의 위치와 손을 다듬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모습이 참, 아이다웠다.

라니엘이 황녀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삼키듯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폐하께도 그렇게 전해 드렸어요.”

“역시, 라니엘이야.”

싱글싱글하는 황녀를 보면서 라니엘이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드러냈다. 그 표정은 마치 갓난쟁이를 바라보는 엄마와도 비슷했다.

그러고 보면 시녀장은 늘 황녀를 저렇게 바라보았다. 언제나 황녀를 갓 걷기 시작한 아기를 대하듯이 하며 그녀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저러니 다 키우고 뿌듯한 마음이 들 만도 하구나.’

애틋하게 키운 만큼 보람이 크긴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 조금 안타깝기도 했다.

‘그래도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여야 하는데.’

이 세상의 주인공, 이 세상의 주인이 아무리 황녀라고 해도, 각자의 인생이 존재했다. 하지만 시녀장의 인생의 주인공은 명백히 황녀였다.

‘왜 엑스트라들은 꼭 양자택일해야 하는 걸까.’

둘 다 가질 수 있는데.

분명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동시에 황녀에게 충성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라니엘은 황녀를 택하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려 들었다.

‘내 알 바는 아니지.’

어차피 남의 인생이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당사자만의 권한이었다. 주변인들이 끼어들 권리는 없었다.

레이블라는 제멋대로 뻗어 나갔던 생각을 거둬들이며 잉크병을 깨끗이 정리했다.

방을 나서서 문을 닫을 때까지도, 시녀장의 시선은 황녀에게서 잠깐도 떨어지지 않았다.

* * *

“이걸 정말로 시녀장님께서 다 하셨어요?”

며칠 후, 여느 때처럼 이른 아침 시녀장의 방으로 향한 레이블라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라니엘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녀의 업무를 분담해서 수행하기로 했는데…….

“일을 많이 하신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네 명의 직속 시녀 중 하나인 엠마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이에 동조하듯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넷이 나누어서 해도 벅찬데, 이걸 예전부터 계속 혼자 하셨다는 거잖아요. 시녀장님께서 몸살이 나실 만해요.”

시녀 네 명이 달라붙어 일 처리를 하려 해도 버거운 수준이었다.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면 내도록 황녀의 곁에 붙어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작은 손짓, 눈썹 움직임까지 생각하여 움직여야만 소화해 낼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워낙 요령이 필요한 일이라, 황녀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함께한 시녀장의 자리를 그 누구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시녀장의 빈자리를 황녀 또한 느꼈는지 미묘하게 불편해하는 듯했다. 이를 지켜보는 시녀들의 마음에는 초조함이 깃들었다.

“시녀장님께서 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푹 쉬셔야지. 앞으로 이틀 정도는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감기가 전하께 옮으면 안 되니까. 가장 힘든 건 시녀장님이실 거야.”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데이지가 작게 중얼거리자, 엠마가 말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시녀장님께서 며칠 전부터 내내 상태가 이상하셨으니까요.”

“아. 하긴 그랬지.”

편지를 받았다던 그날 이후로 시녀장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물론, 크게 실수하거나 잘못하는 것은 없었지만 생각에 잠긴 채 멍을 때린다거나, 평소보다 굼뜨게 행동할 때가 많았다.

“정말 무슨 일이 있으신 걸까요?”

엠마의 질문에 데이지가 답했다.

“가문에서 무슨 일이 있으신 게 맞는 것 같아요. 실은 며칠 전에 시녀장님을 찾아 황녀궁에 방문 요청을 한 남자분이 있으셨는데, 그분을 만나지도 않고 돌려보내시더라고요. 시녀장님께서는 가문에서 온 사람이라 하시던데.”

며칠 전 일을 되짚던 데이지가 미간을 찡그렸다.

“근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더라고요.”

“어땠는데?”

줄리아의 물음에 데이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그게 뭐라고 해야 하나…… 다시 잘해 보려고 찾아온 전 남편 같은 느낌?”

“그게 무슨 소리야. 시녀장님 미혼이시잖아.”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하여튼 그만큼 좀 애틋해 보였다고 해야 하나.”

잠자코 대화를 듣던 레이블라는 데이지가 보았다는 남성이 ‘첫사랑’임을 확신했다.

‘그 사람 못 만나서 상사병 난 거 아니야?’

진짜 미련하구나.

이렇게 상사병을 앓을 만큼 좋아하는데도 황녀의 곁에 남는다니.

‘아, 혹시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건가……?’

자기가 없으면 힘들 걸 아니까.

그럴 가능성도 컸다. 그간 보아 온 시녀장은 이번처럼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황녀를 남의 손에 맡기지 못했다.

그만큼 황녀가 시녀장을 잘 따르는 탓에 ‘이 사람에게는 내가 대체할 수 없는 존재구나’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만약, 자신이 없어도 이 세상은 문제없이 굴러간다는 걸 알게 해 준다면, 라니엘은 어떤 선택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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