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9화
전쟁에 나가면 오랜 시간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다. 멀어진 사이, 그녀가 자신을 잊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레이블라는 다정하고, 온화하여 누구에게나 사랑받으니까. 그러다가 자신을 까맣게 잊어버리면 어쩌나 싶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속에 주저함이 깃들었다.
“어떻게 잊어. 넌 나에게 하나뿐인 친구잖아.”
하나뿐인 친구.
기분이 좋으면서도 묘하게 불쾌하기도 한 말이었다. 그래도 유일한 존재라니 좋았다.
“아! 맞아. 내가 오늘 엄청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을 봤는데 말이야.”
레이블라가 다시 재잘거렸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자신의 눈에는 그녀만이 유일하게 빛난다는 걸.
“……그러니까 칼릭스. 우리 다음에 만날 때까지 앞으로 무얼 하고 싶은지 생각해서 만나자. 어때?”
“……응, 좋아.”
약속.
레이블라가 손가락을 걸고 헤실, 웃었다.
칼릭스는 소녀의 모습을 정말로 집요하게 두 눈에 담았다. 소녀가 웃을 때 입꼬리가 얼마만큼 올라가고 눈매가 어떤 식으로 휘는지. 어떤 목소리로 제게 말을 하는지. 살랑이는 사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의 색이 어느 꽃과 닮았는지까지.
눈을 감아도 그려질 만큼 똑똑히 새긴 그는 레이블라와 헤어지고, 낡디낡은 궁으로 돌아와 레이블라가 말했던 ‘미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관한 대답을 짧은 편지로 남겼다.
“이제 갈 시간입니다.”
만약 오늘 떠난다고 이야기했다면 분명 레이블라는 오늘처럼 웃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웃는 얼굴을 두 눈에 새기고 싶어서, 우는 모습을 보면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 숨겼었는데.
그게 미안했다.
그 마음을 담아 자신이 남긴 편지를 천천히 손끝으로 쓸었다. 그리고 그 편지 하나만을 남긴 채, 처음으로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 * *
“앞으로 잘 부탁해.”
새로운 직책인 황녀의 시녀로서 처음으로 일하는 날. 달라진 복장을 갖추고 시녀들의 방으로 향하자 선임 시녀들이 반겨 주었다.
레이블라는 업무용 미소를 그리며 신입 사원처럼 절도 있게 인사했다.
“오늘부터 황녀 전하의 직속 시녀가 된 레이블라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많은 지도 부탁드려요.”
그러자 시녀들이 훈훈한 미소를 그리며 웃었다. 개중 제일 나이가 많은 시녀, 줄리아 햄프턴이 말했다.
“되레 우리가 너에게 많이 배워야 할 것 같은데.”
“맞아요. 몸을 던져서 전하를 지켜 냈잖아요.”
“그거 말고도 전부터 전하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었지. 시식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아직 어린데도 우리보다 나은 것 같죠? 저는 저 나이 때 뭐 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지금 16살이니까, 9년 전?”
“우리 중에 제일 어린 데이지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줄리아의 이야기에 데이지, 엠마가 각각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간 시식가로 활약할 적 어떤 점이 대견했고, 어떤 점이 놀라웠다는 이야기를 쏟아 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레이블라는 그들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전하께서 펠리시티를 보면 놀라실 수 있으니 전하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해.’
‘전하께서 곧 오실 테니 저쪽으로 숨어. 어서.’
‘제일 끝에서 따라오렴. 고개는 숙이고.’
황녀의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날을 세우던 사람들이었다. 황녀 전하와 물리적으로 가까워지기만 하면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듯 눈을 부릅뜨는 바람에 눈빛으로 욕도 무지하게 먹었었다.
그랬었는데. 지금은 그들에게서 이렇게 환대를 받고 있다니. 그 변화가 놀라웠다.
‘그냥 날만 세우는 줄 알았는데, 제대로 지켜보고 있었구나.’
노력하는 모습을 누군가가 봐 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낯이 뜨거워졌다.
레이블라가 살짝 볼을 붉히자 그녀들이 훈훈한 미소를 그리며 키득거렸다. 그러고 있으니, 항상 시식할 때 만났던 줄리아 햄프턴이 새침하게 말했다.
“분명 내가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도 했어. 그건 미안해. 그래도 그땐 어쩔 수가 없었어.”
“알고 있어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해 주면 내가 고맙고. 어쨌든 잘 왔어. 앞으로 잘 부탁해, 레이블라.”
“네! 열심히 할게요!”
씩씩하게 웃으면서 답하는 것과 동시에 직속 시녀로서의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직속 시녀로서의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시녀장이 말했던 것처럼 처음에는 그저 자잘한 심부름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곁에서 지켜보면서 황녀가 필요한 물건을 제때제때 조달하는 일들. 황녀가 목마른 듯 보이면 재빨리 물을 찾아 건네는 식의 사소한 일들이었다.
그건 그간 레이블라가 종종 해 왔던 일과 다르지 않아서 업무에는 금세 적응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오후가 되었다.
레이블라는 황녀가 흐트러뜨린 책장을 정리하기 위해 황녀의 집무실에서 있었다. 곁에서 황녀는 한 시간 내도록 한숨만 푹푹 쉬어 댔다.
나 힘든 일 있어요, 하고 하소연하듯 행동하고 있으니 무시하려고 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레이블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고민이 있으세요?”
“응, 편지를 써야 하는데…….”
황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지만, 선뜻 더 자세히 말하기는 곤란했는지 우물거리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블라가 말했다.
“무슨 말을 쓰실지 잘 모르시겠어요?”
“응…….”
“시작 부분이 어려우신가요?”
황녀가 끄덕였다. 상심한 눈동자가 향한 책상 위에는 구겨진 종이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다.
“보통은 날씨 이야기로 시작하지요, 가볍게.”
“그건 너무 평범하지 않아? 오랜만에 연락하는 건데…….”
황녀는 못마땅한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분이세요?”
“응. 조금 오래됐어. 그래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그럼 그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면 좋지 않을까요?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 잘 지내니, 보고 싶다, 하고요.”
“……그건 좀 부끄러운데.”
“남자분이세요?”
황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서 레이블라는 편지 상대를 직감할 수 있었다.
‘남주구나.’
로이안 비체라발리.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그러니까 황녀가 6살 무렵에 만나면서 인연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삼촌의 집에서 머물던 로이안이 비체라발리 영지로 돌아가면서 만나지 못한 지는 약 반년이 지난 상태였다.
“굉장히 멋진 분이겠어요. 전하께서 이렇게 조심스럽게 편지를 쓰시는 것을 보면요.”
“응, 굉장해.”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자 황녀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무지무지하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따뜻한 마음씨를 잃지 않은 아이야. 늘 다정하고 착해. 그리고 무엇이든 금세 익히고, 검도 잘 써. 또…….”
황녀는 끊임없이 로이안에 관해 털어놓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만남이 애틋하기는 했지.’
이 세상의 남자 주인공, 로이안은 비체라발리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임에도 외가의 가문에서 자라 왔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이 오랫동안 전장을 누비느라 그에게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를 양육한 삼촌은 무척이나 쓰레기 같은 인물이었다. 로이안을 통해 비체라발리를 제 가문으로 흡수하려는 야망을 품고서 그를 제 말만 듣는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당한 폭행과 세뇌로 그의 세상은 어둡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문뜩 탈출하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하고 집을 나와 헤매는데, 그때 사업을 위해 몰래 밖으로 나왔던 황녀와 마주쳤다.
로이안은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양아치를 흠씬 패주고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는데, 그럼에도 황녀는 한눈에 그를 알아봤다. 전생에서 로이안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황녀는 엉망이 된 그를 돌보아 주었고, 비체라발리 공작령에 연락해 저택 사람들로 인계해 주었다.
‘그때 남주가 처음으로 인간다운 대우를 받고 황녀를 은인으로 여기게 되었지.’
그 마음이 사랑으로 커진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햇살 여주는 그 존재만으로 사람들을 빠져들게 하니까.
“헤어지기 전 모습이 마음에 걸려. 가기 싫어하는 걸 억지로 보낸 것 같아서…… 계속 걱정했었거든.”
“원망하실까 봐서요?”
“응, 조금. 내 편지를 반기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렇지 않을 거예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니신 분이라면서요. 다정한 분이니 그 마음 이미 이해하고 계실 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그분께서는 어쩌면 지금도 전하를 생각하고 계실지도 몰라요.”
‘어쩌면’이 아니라, 확실히.
황녀의 도움으로 비체라발리로 돌아간 로이안은 황녀를 늘 생각하면서 황녀의 곁에 설 수 있는 남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수련에 매진했으니까.
“레이블라의 말을 들으니까 어쩐지 쓸 수 있을 거 같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황녀가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처음부터 쓰려는지 편지지를 찾았는데, 없었다.
레이블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황녀의 곁에 선 시녀장에게로 향했다.
라니엘은 황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채지 못한 듯 멍하게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평소 그녀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