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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8)화 (38/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8화

두 손을 맞잡은 채 예언하듯 말하자, 시아의 얼굴에 조금씩 ‘정말 그럴까?’ 하는 기대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시녀님이 만든 옷에 모두들 행복해할 거예요. 만드는 사람이 이렇게 즐거워하는데, 그 옷을 입고 어떻게 울상을 지을 수 있겠어요?”

“넌 참 말도 예쁘게 한다.”

그녀가 귀엽다는 듯이 레이블라의 머리를 쓸었다.

“어쩐지, 너를 위한 옷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황녀 전하가 아니라요?”

“그냥 문뜩. 너에게 꼭 맞는 옷이 생각났어. 어디 보자…….”

들고 있던 옷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시아가 다급히 책상으로 다가가 펜을 들었다.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금세 새하얀 종이 위에 그림이 그려졌다.

“예뻐요!”

“그래?”

“네. 이 장식도 참 예뻐요. 혹시 드레스를 만들어서 팔리지 않을까 걱정되신다면, 처음에는 액세서리류도 괜찮을 것 같아요. 손수건, 넥타이, 머리 장식 같은 거요. 그런 건 관심 없으세요?”

“있지.”

이야기와 동시에 그녀가 또다시 생각난 것을 그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집중력과 함께 빠르게 그려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레이블라는 문득 칼릭스가 보고 싶어졌다.

‘칼릭스도 언젠가 저런 날이 올까?’

무언가에 미친 듯이 열정을 쏟으며 행복해할 날이.

우리에게도 찾아올까?

‘보러 가야겠다.’

시아에게 더는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레이블라가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쿵, 문이 닫힌 줄도 모르는 작은 공간에서는 사각사각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 * *

“칼릭스!”

레이블라가 커다란 문을 열면서 소리치자, 창틀에 앉아 있던 칼릭스가 훌쩍 뛰어내리며 다가왔다.

재깍 반겨 주는 모습이 신기해서 레이블라가 가만히 응시하자, 칼릭스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무슨 문제냐는 듯이 마주 보았다.

그 뻔뻔한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한참을 키득대며 웃다가 칼릭스가 레이블라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칼릭스는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 변화가 너무 기껍고 즐거워서 레이블라는 잡힌 손을 흔들흔들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잘 있었어? 식사는. 내가 가져다준 음식은 다 먹었고?”

“응.”

“맛있었지? 또 가져다줄게. 요즈음 나 음식 정말 잘 나오거든.”

“괜찮아. 너도 먹어야지.”

“난 과일이 더 좋아. 아직은. 나보다는 칼릭스가 더 중요해. 우리 칼릭스. 전쟁터에 가기 전에 살도 찌우고 근육도 늘려야지!”

칼릭스가 검을 다룰 줄 안다는 것과 그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이미 두 눈으로 확인한 상태였다. 그렇다 해도 그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칼릭스가 전쟁터로 가기 전까지 그가 다치지 않게,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끔 도와주고 싶었다.

“그거 말인데.”

칼릭스가 난감한 기색으로 입술을 달싹이다 작은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전장에 갈 날이 정해졌어.”

“……벌써?”

황제는 진심으로 쓰레기였다. 그간 이런 곳에 처박아 놓더니, 내보낼 땐 왜 이렇게 빠른지.

“언젠데?”

“얼마 남지 않았어.”

“……언제인지 말해 주지 않을 거지?”

레이블라의 물음에 그가 미안한 듯 웃었다. 레이블라는 그 미소를 보면서 어쩐지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내가 공녀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애초에 전장에 가도록 내버려 두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전장으로 보낸다 하더라도 펠리시티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를 지원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 작은 아이가 전쟁터에서 얼마나 힘든 일을 겪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불가피한 살육을 저지르며 겪을 충격과 고통을 생각하니 울고 싶어졌지만, 입술을 꼭 깨물고 웃었다.

활짝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우리 그럼 그때까지 추억을 만들자!”

“추억?”

“응. 행복한 기억을 많이 남겨 둬야지. 무섭고 힘든 상황이 오면 기억 창고를 열어 보는 거야.”

물질적인 지원은 할 수 없지만, 정신적인 기둥이라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 기억을 되새기면서 꼭 다시 나와 만나고 싶다고 생각해 줘. 나도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너의 이정표가 될 테니, 힘든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응?”

“응.”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그 웃음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레이블라는 고개를 휘휘 저어 쓸데없는 감정을 날리고 다시 그를 보았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레이블라가 손뼉을 쳤다.

“칼릭스. 지금 나랑 같이 갈 곳이 있어.”

“어디?”

“따라와. 먼 곳이 아니니까.”

레이블라가 그에게 잡힌 손을 달랑달랑 흔들면서 칭얼거리자 그가 피식 웃으면서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레이블라는 그런 칼릭스에게 팔짱을 끼면서 키득 웃었다.

* * *

레이블라가 그를 이끈 곳은 정령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호수. 레이블라는 이곳에 황녀와 함께 왔었다고 했다.

“이거 봐. 칼릭스. 여기 물고기.”

칼릭스는 저의 팔을 흔들며 채근하는 레이블라의 손끝을 따라 물속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무지갯빛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밤에 보면 더 예쁠 것 같았는데, 역시 그랬어.”

레이블라가 손을 가져가자 물고기가 그녀의 손이 밥인 줄 알았는지 입으로 콕콕 손끝을 두들겼다. 그녀가 키득거렸다.

“이거 보여 주고 싶었어. 어때? 예쁘지?”

“응, 예뻐.”

칼릭스의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자연스럽게 답한 것처럼 레이블라는 예뻤다. 막 피어난 봄꽃인 양 사랑스러운 분홍빛 머리카락에 콕콕 찔러 보고 싶을 만큼 포슬포슬한 볼. 눈매는 크고 도도해 보였으나 웃으면 살포시 내려가서 인상이 순해졌다. 웃을 때도, 울 때도, 화를 내거나 호기심에 눈을 반짝일 때도 그녀는 늘 예뻤다.

그 모두가 예쁘고 사랑스럽다 찬양하는 황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뿜어내는 분위기는 어찌나 청량한지. 그 청량함이 공기를 타고 폐부까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칼릭스?”

물고기를 보던 레이블라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봄의 나무처럼 싱그러운 초록빛 눈동자 속에 그가 담겼다.

칼릭스는 그 눈동자 속에 들어찬 자신을 볼 때면 가슴이 벅차올라 그녀를 꼭 안아 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황제의 눈을 의식한 그녀가 허락해 주지 않았기에 마주 잡지 않은 손을 꼬옥 쥐었다가 펴면서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그런데…….

“우리 칼릭스. 누나가 물고기 본다고 섭섭했구나?”

이제는 자신이 조금 편해졌는지, 가끔 레이블라가 능청스럽게 장난을 칠 때가 있었다. 마치 상대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그의 생각을 기민하게 알아챈 레이블라가 그를 안아 주었다.

칼릭스는 응석을 부리듯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그러고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누가 누나야.”

“정신적으로는 내가 누나가 아닐까? 내가 아는 것도 더 많을걸?”

조금 못마땅하지만, 그건 확실했다. 레이블라는 아는 것도 많았고, 그가 따라가지 못할 만큼 생각도 깊었다.

황제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전장으로 나서라니. 그로서는 생각도 못 한 방법이었으나, 그녀는 찾았고, 그 길을 알려 주었다.

칼릭스는 레이블라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정작 그 대단한 생각을 한 그녀는 이런 것밖에 생각하지 못했다며 자책하고 있지만…….

‘내가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다면, 그건 네 덕분이야, 레이블라.’

감옥 같은 황궁에서 시름시름 죽어 가는 것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좀 더 많은 것을 듣고, 보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조금 더 살아 보려고 발버둥쳐 볼 생각이었다. 제 죽음으로 인해 레이블라가 슬퍼하면 안 되니까. 그녀는 웃는 것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사람이기에 울리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방법은 있었다. 황실의 피로 전해지는 ‘드래곤의 힘’.

황실의 핏줄을 타고 내려온다는 드래곤의 힘은 역사상 단 세 사람에게서만 발현되었다. 초대 황제, 2대 황제, 그리고 칼릭스.

초대 황제와 2대 황제는 수천의 적을 무찌르고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역사서에 쓰여 있을 만큼 엄청난 무력을 자랑했었다.

그러니 칼릭스 또한 그 힘이 제대로 발현하여 다룰 수만 있게 된다면, 그깟 전쟁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 대단한 황제조차도 이 힘을 이용하고자 그를 실험용 쥐처럼 취급하지 않았나.

‘황제에게 이용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해서라면.’

내내 외면하기만 했던 그 힘을 키워 볼 생각이었다. 레이블라의 곁에 있으려면 공고한 지위와 그 자리를 지킬 힘이 필요할 테니까.

다만 걱정은.

“레이블라.”

“응?”

“나 잊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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