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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7)화 (37/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7화

    ‘너는 어떻게 그렇게 사랑받는 걸까?’

    그녀의 주변은 언제나 떠들썩했다. 특히 어른이 된 레이블라는 더욱 그랬다. 연회장에 레이블라가 있으면 웃음꽃이 피고, 행복이 넘쳐흘렀다.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분명 그들은 처음 본 사이일 텐데. 그런데도 그들은 레이블라에게 친근함을 드러내면서 호감을 마음껏 쏟아 냈다.

    ‘너는 무엇이 그렇게 특별한 걸까?’

    무엇이 그리 다르기에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데도 그렇게 쉽게 남의 호의를 얻는 걸까?

    ‘나는,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데.’

    에리나에게 있어서 사람의 호의란 노력하고,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전생엔 그러지 못해서 쓸쓸하게 홀로 죽어 나갔다.

    하지만 레이블라에겐 사람의 호의를 얻는 것도, 목숨을 걸듯 큰 용기를 내는 것도 쉽고 간단한 느낌이었다.

    그게 너무 부럽고, 또…….

    “……전하?”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에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절친한 친구 도나 재클린이 친근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계세요?”

    “아, 아니야.”

    “네에.”

    도나는 순한 아이답게 별말 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구나, 하고 끄덕끄덕했다. 그러고는 걱정 어린 눈길을 보내 왔다.

    “건강은 괜찮으신 거죠? 안색이 흐린데.”

    “응. 괜찮아. 갑자기 해를 봐서 그런가 봐.”

    “그럼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차가 시원해요.”

    “응.”

    도나의 손짓에 에리나가 그녀에게로 다가가려다가 멈칫했다. 돌아선 그녀가 휙, 창문에 커튼을 치자 마법 커튼이 외부의 소음을 단숨에 먹어 버렸다.

    삽시간에 내부가 조용해졌다.

    그와 동시에 에리나의 마음도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 * *

    본격적으로 시녀로서 일하기 전, 시녀장이 준 포상 휴가가 이어졌다. 하지만 말이 좋아 휴가지, 궁에 사는 이상 진정한 휴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깨닫는 하루하루였다.

    “레이블라, 이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이렇게 하면 될까?”

    “고마워! 그런데 말이야…….”

    어쩌다가 신입 시녀를 도와줬던 게 소문이라도 났는지 부쩍 레이블라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휴가 기간에 갈 곳이 없어 황녀궁에 머물고 있으니 접근성이 좋고 특히나 한가해 보이는 것이 주원인이었다.

    덕분에 쉰 것은 고작 사흘뿐이었고, 레이블라는 그 기간 내내 시녀들을 도와야만 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차라리 일하는 게 낫겠다 싶었던 레이블라는 휴가 나흘째에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복장을 갖추고 숙소를 나섰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황녀의 부재 소식이었다.

    “저, 전하께서는 어제 태양궁으로 가셨어. 황제 폐하를 뵙고 싶다고 했거든.”

    황녀의 직속 시녀 중 하나인 데이지 네빈스가 레이블라를 보자마자 어색해하면서도 황녀가 황제에게 갔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그냥 휴가를 이어 가기로 했다. 황제를 만나는 건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돌아갈까.’

    준비한 시간은 아쉽지만, 괜히 더 기웃대며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돌아가려고 했는데.

    “저기.”

    누군가 레이블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자, 어쩐지 세련되어 보이는 외양의 시녀가 서 있었다.

    ‘아, 황녀 의상 담당.’

    황녀의 의상을 담당하는 시녀 중 한 사람이었다. 이름은 시아 테런트.

    “저기, 한가하면 나 좀 도와줄래?”

    “무슨 일인데요?”

    “전하께서 얼마 후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입어야 할 의상을 고르는 중인데, 오늘 늦게 돌아오실 거라고 해서…….”

    한마디로 황녀가 입어야 할 의상을 맞춰 보기 위해 대역을 해 줄 어린아이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레이블라는 흔쾌히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도울게요.”

    “고마워, 그럼 갈까?”

    “네!”

    뭐가 그리 급한지 순식간에 앞서 나가는 그녀를 보면서 레이블라가 뒤따라 걸었다.

    * * *

    도착한 곳은 황녀의 옷방이었다. 커다란 옷방 한쪽에 작은 방이 딸려 있었는데, 그곳이 시아 테런트의 전용 작업실인 모양이었다.

    방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인 그림들이었다.

    ‘옷 그림이네.’

    그림 속 아이의 옷은 보기만 해도 발랄하고 앙증맞은 것이 꼭 황녀를 위한 맞춤옷처럼 보였다. 세련되고, 예뻤다.

    “와, 그림이 많네요. 직접 그리셨어요?”

    레이블라가 질문하자, 시아가 양손 가득 옷을 들고 오면서 답했다.

    “그래. 전하를 생각하면서 그려 본 거야.”

    “그렇구나. 정말 예뻐요. 시중에 있는 옷들보다 더요.”

    “그, 그래?”

    “네!”

    사실, 옷에 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런 레이블라가 보기에도 특출나게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만들어 팔아도 아이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을 수 있을 듯했다.

    ‘아, 이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

    이제 보니 원작에 언급된 적이 있었다. 의상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고 손재주가 뛰어나며 센스가 특출 난 시녀 하나가 있다고.

    그 재능을 바쳐 주인공에게만 헌신하는 존재.

    ‘10년 후에 황녀의 의상은 다 이 사람 손에서 나오게 된다지.’

    주인공을 위해서만 옷을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녀만이 자신에게 영감을 준다나 뭐라나.

    그녀의 정체를 알고 보니 옷이 또 다르게 보였다.

    ‘황녀를 위해서만 만들기엔 재능이 아깝네.’

    이런 실력이라면 황녀의 의상 담당을 넘어 더 이름을 떨칠 수 있을 텐데.

    그녀가 의상실을 차린다면 분명 제국의 패션을 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상실 차릴 생각은 없으세요?”

    “그럴 만한 돈도, 재능도 없는걸. 음, 이쪽으로 와 볼래?”

    그녀가 대충 흘리듯 답했다. 레이블라가 커다란 거울 앞에 서자 그녀가 금발 가발을 씌워 주었다.

    “이렇게 보니 또 다른 느낌이구나. 금발도 잘 어울리네.”

    “그런가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레이블라가 두 눈을 깜빡이며 제 모습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으니, 시아가 웃었다.

    “하지만 너는 분홍빛 머리가 더 잘 어울려. 생기가 넘치고, 더 사랑스럽네.”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당연한 이야기인데. 자, 그럼 이 옷을 앞에 대 보면…….”

    옷에 심취한 사람답게, 디테일하게 옷을 살펴보고 액세서리를 맞추는 모습이 프로다웠다. 덕분에 그저 서서 보기만 하는데도 제법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제가 보기엔 재능이 넘치시는 것 같아요.”

    “그, 그렇게 보여?”

    “그럼요. 지금까지 황녀 전하의 의상을 맡아 오셨지요? 어딜 나서든 모두가 전하의 의상 센스를 칭찬했었거든요. 저만의 생각은 아닐 거예요.”

    “그건 전하께서 내 옷을 제대로 입어 주셨기 때문이야. 전하께서 빛이 나니까.”

    “황녀 전하께 빛이 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테런트 시녀님의 능력이 출중한 것도 맞아요. 틀림없어요.”

    레이블라가 씩 웃으면서 말하자, 시아가 픽 웃었다.

    “나에게 그런 칭찬을 해도 너에게 해 줄 건 없는데.”

    “그런 걸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옷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음, 그랬지. 그래서 어릴 때는 혼이 많이 났었어.”

    “테런트가는 백작 가문이니까 그랬겠네요.”

    “그렇지. 귀족은 좋은 옷을 입는 사람이지 수선하는 사람이 아니라며, 많이 혼났어.”

    “힘드셨겠어요.”

    “그래서 지금이 정말 좋아. 황녀 전하께서 내가 만든 옷을 입어 주신다는 것만으로 행복해.”

    모두가 반대했던 일을 결국 해내었으니, 자랑스럽게 여길 만도 했다. 그리고 그런 해방감을 느끼게 해 준 황녀에게 헌신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옷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으세요?”

    “그냥. 사람들이 무슨 드레스를 입나, 평소엔 무얼 입나 관심이 많았어.”

    “황녀 전하의 일로 옷을 처음 만들어 보신 건가요?”

    “아니. 동생. 여동생이 하나 있거든.”

    시아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가장 처음 만들어 본 옷은 여동생의 것이야. 누군가 내가 만든 옷을 입은 걸 처음 보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어린 시절을 추억하듯, 그녀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이내 그녀가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땐 그랬었지. 많은 사람이 내 옷을 입는 걸 보고 싶었어.”

    “그렇게 될 거예요!”

    10년 후, 황녀가 데뷔탕트를 치르고 나면 모두가 의상 담당의 존재를 궁금해하게 될 것이었다. 원작에선 황녀의 옷을 만드는 일에 만족하는 것으로 그쳤단 게 여전히 아쉬웠다. 그녀가 좀 더 꿈을 크게 품었으면 좋겠다 싶어 몇 마디 더 중얼거렸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시녀님이 만든 옷을 입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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