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6화
“아닙니다. 처음 일이 벌어졌을 때 가서 구해 드렸어야 하는데…….”
이든 경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크게 없었을 것이다. 최고의 기사로 일컬어지는 황제와 그 휘하의 모든 기사가 ‘레이블라 펠리시티’를 알아채지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당시 레이블라는 황제와 그 기사들이 황녀만을 데리고 떠난 뒤, 홀로 오두막을 탈출해 물길을 따라가는 내내 기사들을 원망했었다.
왜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일부러 모르는 척한 건지 의심하면서.
그러나 그들은 당시 ‘레이블라 펠리시티’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고 했다.
황녀를 데리고 돌아갈 때, 무언가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게 ‘사람’이라고는 여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이없는 변명이었지만, 레이블라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이 세상에서 엑스트라보다 못한 존재로 살며 억울했던 적이야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체념하는 눈초리에 그 생각을 읽어 낸 것인지, 이든이 잠시 침묵을 지키며 레이블라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한쪽 무릎을 꿇으며 눈높이를 마주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으면 저를 찾아 주십시오, 아셨지요?”
“왜요?”
“대답하십시오. 아셨지요?”
은근히 밀어붙이는 말투에 레이블라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도 이든은 한동안 안심하지 못하겠다는 듯 안절부절못하다가, 이내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아가씨.”
……도대체 왜 이러지?
* * *
“너는 앞으로 황녀 전하의 직속 시녀다.”
황녀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말도 안 되는 명령이 떨어졌다. 황녀의 바로 곁에서 시중을 드는 일을 맡으라는 명령이었다.
‘이제 새 시식가가 왔으니 레이블라는 쉬어도 좋아.’
황녀의 말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레이블라로서는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라는 이유로 지금껏 피해 왔던 자리이기도 했다.
솔직히 이제까지는 그냥 ‘그럴 것이다’라는 추측에 가까웠다면, 이번 납치 사건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황녀의 곁에 있으면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황녀와 멀어질 각오를 하고 돌아왔건만.
갑자기 뭐라고요?
“시녀장님, 저는 아직 어리고 그럴 능력이 없어요. 그냥 전하를 위해 황궁을 청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이미 결정된 일이니 받아들이거라.”
……도대체 왜 이러세요? 저 죽이고 싶으세요?
“레이블라.”
시녀장, 라니엘 소이가 나지막이 레이블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에게 이름을 불리는 것은 처음인지라 레이블라가 바짝 긴장한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너는 잘못을 저질렀다. 황녀 전하께서 혼자 나가신다고 했을 때 나에게 알리지 않았고, 홀로 따라나섰다가 납치를 당했지.”
이어지는 지적들에 레이블라의 고개가 푹 숙어졌다.
“하지만 너는 잘해 주었어.”
계속된 질책을 받을까 싶었는데, 이어진 말은 뜻밖에도 칭찬이었다.
“황녀 전하를 위해 몸을 던졌다지.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
“고개를 들어. 너는 최선을 다했어.”
레이블라가 그녀의 명령에 천천히 고개를 들자, 라니엘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마주 보며 말했다. 황녀궁에서 일하게 된 후로 매일같이 보아 왔건만, 처음으로 보는 표정이었다.
레이블라가 놀라자, 그녀가 살짝 멋쩍어하는 모습을 보였다가 금세 지우고 할 말을 이어 갔다.
“부담 갖지 말렴. 너는 잘할 수 있을 테니. 황녀 전하의 직속 시녀라고는 하지만 처음에는 다른 직속 시녀들의 잡일을 도맡게 될 거야.”
아무래도 라니엘은 레이블라가 직속 시녀 자리를 거부하는 이유가 납치를 막지 못한 죄책감에서 비롯했다고 짐작하는 듯했다.
‘여기서 더 거절하면 괜한 오해를 살 거 같네.’
레이블라로서는 쓸데없는 오해를 사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라니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럼 고생 많았으니 그만 쉬어. 전하께서 너에게 휴가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일주일간 포상 휴가를 줄 테니 방에서 푹 쉬어라.”
원래대로라면 본가로 돌아가야 하지만, 집이 없는 걸 아니 황궁의 숙소에서 쉬라는 뜻이었다. 레이블라는 그러겠다고 하고 시녀장의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수많은 시선이 레이블라에게로 쏟아졌다.
그들 또한 무언가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좋은 소문일지, 나쁜 소문일지.
내심 궁금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쉬기로 했다. 오랜만에 방에 도착한 레이블라는 그대로 잠이 들고야 말았다.
오랜만의 꿀 같은 휴식이었다.
* * *
“이틀이 순식간에 사라졌어…….”
레이블라는 몽롱한 눈으로 창 너머를 보며 중얼거렸다. 언제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눈을 떠 보니 벌써 이틀이나 지나 있었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것은 사이사이 다녀간 시녀들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식사하라고 깨웠지. 음식 진짜 화려했던 거 같은데.’
잠결에 일어나서 뭔가를 먹었는데, 그때는 시식하는 줄만 알았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졸면서도 받아먹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시식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식가가 왔다고 했으니까. 그렇다고 꿈이라고 하기에는…….
레이블라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향했다. 황녀가 먹을 법한, 고급 음식들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황녀의 직속 시녀라고 해서 그런가?’
황궁에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 하늘과 땅 차이의 변화였다.
‘날도 좋은데, 칼릭스를 만나러 갈까?’
문뜩 칼릭스의 궁이 생각났다. 그곳은 제대로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았고, 사람들마저 거의 드나들지 않으니 식사는 엉망일 것이다.
‘이 음식 가져가면 좋아하려나?’
가져가자!
혹시 모르니 개중 맛있고 건강에 도움될 만한 음식들은 조금씩 입에 넣어 보고 빈 통에 옮겨 담았다.
그렇게 하나둘 음식을 챙기고 있는데…… 창문 너머에서 쿵, 소리가 들려왔다.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밖을 확인하자, 시녀 하나가 볼품없이 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맡에 물건들이 와르르 흐트러져 있었다.
‘민망하겠다.’
벌떡 일어나서 붉히는 얼굴이 낯설었다.
‘교육을 채 마치기 전에 온 사람인가 보다.’
뒷수습하는 모습을 보니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며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인 모양이었다.
주변에 도와줄 사람은 없어 보이고, 그냥 두고 보기에는 어쩐지 남 일 같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레이블라가 창틀을 넘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태연하게 흐트러진 물건을 한곳에 담고, 시녀의 옷을 살펴서 맵시를 다듬어 주었다.
“고, 고마워…….”
광대뼈에 주근깨를 담은 소녀가 수줍게 감사를 표했다.
‘키가 크네.’
나이는 열셋, 열넷?
갈색 머리카락에 순박하게 생긴 아이였다.
“아니에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으, 응.”
“다행이에요. 다음부터는 조심해서 다니세요. 지금 들고 있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다 황녀 전하 앞으로 나온 물품이거든요. 흠집 나면 큰일 나요.”
소녀가 수업을 듣는 학생처럼 끄덕끄덕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크리스털 룸이 어디인지 알고 있어?”
“아. 거기 찾기 어렵죠. 저기 저쪽으로…… 아니, 제가 같이 가 드릴게요.”
레이블라가 소녀에게서 짐을 일부 받아서 앞서 걷기 시작했다. 소녀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연신 감사하다고 말하며 쫓아왔다.
“어린 것 같은데 엄청 잘 아는구나. 언제 왔어?”
“저도 얼마 안 됐어요.”
“무슨 일 하는데?”
“시식, 아니. 전하 직속 시녀예요.”
“어? 그럼 엄청 높은 사람 아니야?”
“아니에요. 저는 그냥 편하게 대해 주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펠리시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지금 이렇게 이야기 나눈 걸 후회할 수도 있었다. 레이블라는 그녀가 흑역사를 만들고 괜히 원망하지 않길 바랐다.
“잠깐. 그러고 보니 굉장히 어린데 대단한 시녀가 있다고 들었어. 그거 너, 아니 시녀님 맞죠?”
“……?”
대단한 시녀님이라니. 이런 반응이 나올 리가 없는데. 그 소문에 ‘그 시녀가 펠리시티다’라는 건 없었나?
“그 시녀님이 황녀 전하의 은혜를 입고 황녀 전하를 몇 번이나 구하셨다고…… 독도 대신 먹고, 납치도 막아 주고! 어머, 그 시녀님이세요? 정말요?”
이야기만 들으면 분명 저를 말하는 것이 맞았다. 레이블라가 끄덕끄덕하자, 소녀가 꺄악! 하고 소리 질렀다.
“만나고 싶었어요! 제 우상이에요!”
……네?
* * *
와하하.
청량하게 퍼지는 소녀들의 목소리에 황녀, 에리나의 시선이 창 너머로 향했다. 낯선 시녀들 여럿 가운데, 그 중심에 분홍빛 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있었다.
레이블라 펠리시티.
그녀의 벗이자, 우상인 소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