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5화
“여기를 봐. 황제나 황녀에게 한을 품은 사람들이 여기 다 모여 있더라. 이런 곳이 있는 줄 알고 있었어?”
그가 천천히 고개 저었다.
“다 다른 이유로 황제와 황녀를 미워하더라.”
황궁에서 지낼 적엔 상상도 못 한 풍경이었다. 그도 그럴 게 모두가 황녀를 지지하고 따르는 줄로만 알았으니까. 그러지 않는 사람이 돌연변이 취급을 당했다.
“그런데도 다들 잘 살더라. 증오나 원망으로 자기 미래를 망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가족을 꾸리고, 결혼을 하고, 함께 나아갈 미래에 관해 저녁마다 이야기하고 있었어.”
짧은 시간 머무른 것에 불과했지만, 모두가 우울하고 복수에만 미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즐겁게 사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을 거야.”
그 미래가 멀지 않게 느껴졌다.
“지금도 웃음이 나잖아.”
너는 전쟁터로 가야 하고, 나는 황궁으로 돌아가 다시황녀의 아래에서 시식가로 지내야 한다 해도, 바라는 미래가 있는 이상 우리는 웃을 수 있으니까.
“행복해지자, 칼릭스.”
“……응, 행복해지자.”
레이블라의 미소를 따라 칼릭스의 얼굴에서도 꽃처럼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키득키득. 소년과 소녀가 다시금 웃으면서 손을 꼭 잡았다. 행복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황궁에 도착했다.
* * *
“레이블라!”
황녀궁에 도착하자마자 금발의 소녀가 와락 다가와서 안겼다. 레이블라는 당황한 눈빛으로 그녀를 밀어냈다.
“전하! 저 지금 엄청 더러워요!”
“으앙, 레이블라!”
레이블라는 얼른 그녀를 데려가 달라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모두 울음을 터트리는 황녀를 보며 덩달아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환장하겠네.
“나는, 나는 네가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보니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황녀가 던진 돌을 맞고 쓰러졌을 때, 이마 쪽에 피가 철철 났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 상처는 어떻게 된 거지?’
분명 피가 날 정도의 큰 상처였는데 상자 안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멀쩡해진 상태였다. 마을에 가서 거울로 보았을 땐 그 흔적조차 없었다.
‘이상하네. 누가 치료 마법으로 치료해 준 건가?’
대체 누가?
“크흡, 레이블라. 괜찮아? 이제 아프지 않아?”
“네, 저는 괜찮아요. 전하께서는요?”
“나는 당연히 괜찮지. 레이블라가 지켜 줬는걸.”
알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를 지키느라 이 한 몸 얼마나 불살랐는지.
알면, 황제의 분노에서 지켜 주지 않을래?
황제를 생각하자 다시금 한숨이 나왔다.
‘도망치고 싶다…….’
그 미친놈이 무슨 개소리를 하며 죄를 물을지.
칼릭스만 아니었다면, 이 빌어먹을 황궁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텐데.
‘같이 도망갈까?’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 칼릭스가 그녀에게 물었었다.
정말로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안 그래도 혼자 항구로 가서 도망칠 작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황제가 자신을 죽었다고 착각한 상황을 전제했다.
‘칼릭스 네가 왔으니까 황제는 내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지금 이 상황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고.’
황제가 칼릭스의 출궁을 허락하면서 일리어스 이든 하나만 붙여서 보냈을 리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감시역이 있을 테고, 그 사람이 그녀가 살아 있음을 황제에게 보고할 것이다.
‘나를 왜 그냥 두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이때다 싶어 도망가 봤자 황제에게서 벗어날 수 없단 거야.’
얼마간 황제에게 쫓겨 보았기에, ‘도망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인지 알고 있었다.
‘제 발로 돌아가야 해.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살아.’
황궁으로 돌아간다면 칼릭스는 전장으로 내몰릴 테고, 레이블라에겐 평소와 같이 목숨을 건 시식가로서의 일상이 되풀이될 것이다.
‘돌아간다 해도 이전과는 확실히 다를 거야. 우리 힘껏 살아가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렇지?’
나중에 무사히 어른이 되면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보자고 약속하며 소년과 손을 잡고 돌아왔다.
그 약속이 있는 이상, 이대로 황제에게 죽을 수는 없었다.
생각을 갈무리한 레이블라는 대뜸 쿵 소리가 나게 무릎을 꿇고 머리도 바닥에 박았다. 마치 주인에게 복종하는 강아지처럼.
“레, 레이블라?”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지켜 드리지 못했어요.”
마음먹고 돌아온 이상, 억울하게 상황에 끌려다니지만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납치 사건 때 자신이 한 일을 모두에게 밝히고, 그 공로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했다.
레이블라는 제 목적 달성을 위해 아낌없이 무릎을 희생했다.
“지키지 못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어서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전하께서 도망치시도록 도와야 했는데…….”
“아니야! 나 대신 맞은 거잖아. 그놈이 날 죽이려고 했으니까!”
황녀의 이야기에 주변이 삽시간에 술렁거렸다.
“뭐? 감히 우리 황녀 전하를 죽이려고 했어?”
“그 쳐죽일 새끼. 내가 당장……!”
“우리 전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다니. 저분이 어떤 분인데.”
“그나저나 저 아이가 전하 대신 맞았다니…….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 크게 다친 곳은 없으셨던 것 같아요.”
“저 아이도 아직 어린데…….”
“황녀 전하를 위하는 마음이 참 대견하네요.”
레이블라는 수군대는 시녀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레이블라는 죄인처럼 부르며 더욱더 죄인처럼 고개 숙였다. 황녀가 그런 레이블라를 힘껏 일으켰다.
“절대,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마. 누가 뭐래도 레이블라는 나를 위해 주었어. 내 생명의 은인이야.”
봤냐! 황제야. 황녀가 그렇다고 한다.
“전하…….”
“고마워, 레이블라.”
다시금 황녀가 레이블라를 안아주었다. 그 품에 기대면서 레이블라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런 장면을 퍼뜨려 두었으니 자신을 두고 황녀의 납치범과 한패라느니, 납치를 사주했느니 같은 이상한 의심은 받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일단락되었으니 다시금 시식가로…….
“이제 새 시식가가 왔으니 레이블라는 쉬어도 좋아.”
“……네?”
시식가가 아니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전하, 대화는 끝내셨습니까?”
당황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주위로 황궁 제1 기사단 소속 기사 다섯이 모여 있었다.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은 케인 애슐리. 1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그럼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황녀가 고민 한 번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조금 전까지 생명의 은인 운운하더니 이렇게 매몰차게 버리시기 있어요?
애절한 표정으로 황녀를 보았으나,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씩 웃을 뿐이었다.
* * *
하아.
커다란 문을 닫고 나오면서, 레이블라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곁에 따라붙으면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일리어스 이든. 이든 경이었다.
“네, 고마워요, 기사님.”
황녀의 눈앞에서 기사들에게 끌려갈 때만 해도 꼼짝없이 죽는 줄만 알았다. 황녀를 구해 주었든 말든 어쨌든 황녀가 납치당한 죄를 뒤집어씌워서 황제가 죽이려나 보다, 하고.
혹시 만약에라도 자기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꼼꼼히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었는데.
‘황녀 전하를 구한 은인에게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다.’
마주 앉은 1기사단의 단장 도미닉 칼슨의 한 마디에 바짝 날을 세웠던 감정이 탁 풀렸다.
‘참고인 조사일 뿐이니 묻는 말에만 답하면 된다.’
그는 약속대로 시종일관 부드러운 분위기가 되게끔 노력해 주었다. 과자와 음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잘 기억이 나지 않은 부분이 많아 모호한 대답을 했음에도 흔쾌히 넘어가 주었다.
기사단은 이미 황녀를 납치한 세력에 대한 파악을 마친 뒤였다. 지금 이 조사는 형식적인 것이었으며, ‘레이블라 펠리시티’에게는 문제가 없고 오히려 황녀를 지켰기에 상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까지 만들어 둔 상태였다.
그 결론을 이끄는 데 앞선 것이 바로 이든 경이라고 했다.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어요.”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황녀와 납치되었을 당시 이든 경은 오두막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 대신 돌아오지 않는 레이블라를 두고 ‘납치범과 한패’라느니, ‘집안의 복수를 위해 납치범들을 고용했다’라는 식의 헛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정말 감사해요.”
그런 데다가 칼릭스와 함께 그녀를 구하러 와 주기까지 했다.
레이블라는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하지만 이든 경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