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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4)화 (34/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4화

레이블라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소년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따스한 빛깔의 붉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카락. 그녀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정말일까?

레이블라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에게로 가져갔다. 그의 볼에 손끝이 닿자, 보드라운 살결이 느껴졌다. 조금 차가운 듯싶었지만, 손바닥으로 살포시 감싸자 조금씩 온기가 감돌았다.

레이블라는 즉시 소년에게 매달리듯 끌어안았다.

“흐윽…….”

그리고 서러움을 토해 내며 울어 버렸다.

* * *

킁, 코를 푼 레이블라가 슬쩍 고개를 들어 눈앞의 소년을 보았다.

‘칼릭스 벤야 트리셰인.’

그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이름을 이렇게 듣게 될 줄이야.

“……고마워요.”

레이블라는 울어서 먹먹해진 목소리로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던 칼릭스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또다시 뚫어지라 그녀를 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저에게 할 말이 있는 아이, 아니 칼릭스라니. 정말로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알고 있던 그가 맞는 걸까?

“그런데 어떻게 온 거예요?”

그는 내내 황제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처지였는데, 이렇게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레이블라의 시선이 칼릭스의 뒤로 향했다. 그 자리엔 머리카락을 지닌 익숙한 얼굴의 기사가 있었다.

“기사님은 또 왜……?”

“일리어스 이든입니다, 시식가님.”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이름을 되짚어 주었다.

“저는…….”

그가 다시 입을 열며 무언가 말하려 하던 찰나.

하지만 그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눈앞이 작은 손으로 가려졌다. 손바닥의 주인은 칼릭스였다.

“네가 오지 않았으니까.”

여기에 어떻게 왔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오지 않았으니 찾으러 왔다는 것. 그게 당연하다는 듯한 답에 레이블라는 새삼 가슴이 따뜻해졌다.

펠리시티가 멸문한 이래로 지금까지 ‘레이블라’는 이 세계의 불순물과도 같았다. 황녀의 은혜를 입어 살게 되었을 뿐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또렷하게 인식해 주고, 필요로 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어쩐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정표가 생긴 기분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흐릿하게 보였던 세상에 초점이 잡히며 전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느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긴 어떻게…….”

다시 묻기도 전 대뜸 칼릭스가 턱 언저리를 톡 건드렸다. 저도 모르는 상처가 있었는지, 그의 손짓에 아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욱신욱신했다.

그녀의 앓는 소리에 칼릭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이 당장에라도 상처를 만든 이들을 다 죽일 기세였다.

그 나름대로 걱정하고, 염려하는 모습인 듯했다. 그릉그릉거리다 갑자기 손톱을 세우는 고양이 같아 레이블라가 웃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칼릭스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내밀어 이든에게도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레이블라.”

……응?

칼릭스가 지금 이름을 부른 건가?

레이블라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자 칼릭스가 나른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답했다.

“그냥.”

한 번이면 모를까. 두 번이나 이든과의 대화를 방해하는데 알아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친구 뺏길까 봐 무서운 거구나!’

레이블라가 키득대면서 칼릭스의 볼에 손을 가져갔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친구는 대공 전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

“부르지 말라니요?”

“이름, 알려 줬잖아. 편하게 해.”

“편하게 해도 돼요?”

이 아이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는 것이 마음속의 빗장을 푸는 것과 같은 것이었을까.

단지 이름 하나 나누었을 뿐인데, 길들여진 고양이처럼 구는 그가 몹시 귀여웠다. 레이블라가 지그시 보자, 그가 조금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알았어요, 아니 알았어, 칼릭스.”

“응.”

해사하게 웃는 모습이 정말 그답지 않았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왜 네가 지금 여기 있는데.”

그것도 황제의 기사까지 대동하면서.

레이블라가 재차 추궁하자, 칼릭스가 다시금 입을 닫았다. 말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그러자 이든이 끼어들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마을에서 멀어지기는 했지만, 혹시 위험한 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말로는 주변을 수색한다고 했지만, 저 때문에 대화를 하지 못하는 듯하여 눈치껏 빠져 주려는 것 같았다.

레이블라는 그런 이든에게 고마움의 표시 겸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그가 멀어진 뒤, 레이블라가 다시 칼릭스를 응시했다. 이든이 사라진 걸 확인한 소년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황제에게 국경으로 가겠다고 했어.”

“내가 남긴 쪽지, 봤구나?”

칼릭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한 얼굴로 순순히 끄덕이는 모습에 레이블라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켜 주겠다고, 수호천사가 되어 주겠노라 했는데. 살기 위한 방법이랍시고 알려 준 게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전쟁터에 나가라는 것이었으니까.

“미안해.”

“어차피 일어났을 일이야.”

“하지만…….”

“처음부터 황제는 날 죽일 생각이었어. 내가 그 방법을 제안했을 뿐이지. 황제도 기꺼이 받아들였고.”

“…….”

“그것보다, 레이블라. 그게 왜 내가 살 길이라는 건지, 난 그게 알고 싶어.”

궁금한 게 당연했다. 왜 갑자기 전쟁에 나서야 하는지, 알고 싶을 테니까.

레이블라가 답했다.

“그건 그 전쟁에 비체라발리 공작님도 나갈 예정이기 때문이야.”

비체라발리를 언급하는 말에 칼릭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지금은 출전을 거부하고 있지만, 언제가 됐든 출전하실 거야. 그리고 참전만 한다면 비체라발리 공작님은 반드시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 거야. 공작님에겐 그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방법이 있거든.”

소설 속에서 비체라발리 공작은 정말로 힘겨운 전쟁을 치렀다. 개전되자마자 적의 강렬한 저항에 수많은 아군이 죽고, 지원 또한 제때 도착하지 않아 희생이 배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비체라발리는 적의 수장에게 항복을 받아 냈고, 그들을 이용하여 반역까지 저질렀었다. 그 끝이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모든 것이 황녀의 뜻대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황제와 황녀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지대. 그게 바로 그 전쟁터라고 판단했다.

칼릭스가 그 전쟁에서 살아남기만 한다면, 더 나아가 전공을 쌓고 자기 세력을 만들어 온다면, 황제조차도 마음대로 건드릴 수 없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나는 네가 비체라발리 공작님과 협력했으면 좋겠어. 네가 트리셰인 대공가라고 하니 더더욱.”

“트리셰인을 알아?”

“아빠에게 들었어. 공작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다고. 자만하지 말라고 하셨거든. 그때 폐기된 귀족 계보에서 트리셰인을 봤어.”

다만, 그녀가 태어날 즈음에 멸문했다고 하여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었다.

“트리셰인은 북쪽 땅을 다스리는 가문이라고 들었어.”

그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가문을 아느냐고 물은 사람치고 반응이 건조했다. 하지만 대화 자체에는 호기심이 서리는지, 살며시 상체가 가까워졌다.

그러자 레이블라가 목소리를 작게 줄이며 속닥거리듯 말했다.

“북쪽에는 비체라발리 공작이 오랫동안 찾았던 금속이 묻혀 있어.”

“……금속?”

“아다만티움.”

아다만티움, 절대 파괴되지 않는다는 금속 물질이었다.

이건 2부가 시작될 10년 후에 황녀가 발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이블라는 그 아이디어를 기꺼이 칼릭스를 위해 쓰기로 했다. 어차피 황녀 또한 누군가에게 훔친 아이디어로 역전을 이룬 것이니 이 정도에 죄책감을 느끼고 싶진 않았다.

“그것으로 비체라발리 공작의 환심을 사. 비체라발리가 널 구해 줄 거야.”

그렇다고 반역에 얽히지는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이상 언급하기에는 위험하니 아껴 두기로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네가 검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야.”

승리를 점치고 들어간다 한들, 전장은 위험한 장소였다. 어린 소년이 살아남기에는 어려웠다. 그나마 자기 몸을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칼릭스는 레이블라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기만 했다. 전쟁에 나가야만 하는 이유는 이해한 듯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체념 어린 눈동자였다.

그의 속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살려고 발악해 봤자, 끝내 황제의 손에 죽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겠지.

오랜 억압의 결과였다. 속상해진 레이블라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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