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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3)화 (33/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3화

‘그래 봤자 이놈들도 완전히 정상은 아닌 것 같지만.’

길 잃은 어린아이를 과하게 경계하지 않나, 수면제를 먹여 재우지를 않나, 경비대가 보낸 게 아니냐며 죽일지 말지를 운운한다는 점에서 이들도 정상인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제대로 전력을 갖춰서 황제에게 대항한다면, 조금 도와줄 생각도 있는데…….’

기대하기엔 당장 하는 행동이 삼류 아마추어였다. 황제에게 들키면 그의 칼질 한 방에 전멸할 수준이었다. 이런 놈들과 얽혔다가는 눈 깜짝할 새에 땅속 친구들과 만날지도 몰랐다.

‘역시 틈을 봐서 달아나야겠어.’

의심이 많은 자들이니 순순히 보내 달라고 해도 보내 주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되는대로 도망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파악이 되면 떠나야겠다.’

다시 숲으로 들어가든,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가든 방향을 정한 다음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만약 숲으로 들어가게 되면 동물을 쫓는 약초를 뜯어야겠어.’

밤새도록 들려온 늑대 울음소리를 떠올리며 레이블라가 무심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뜩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방향을 정한다 해도…… 그다음은?’

황제와 기사들은 자신을 버렸고, 가문은 망해 버린 지 오래였다

막상 여기서 무사히 도망쳐도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레이블라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떡하지?

새삼스럽게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레이블라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버렸다.

* * *

톰과 제시의 집에 머문 지 사흘이 지났다.

레이블라는 그간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두 사람이 누구인지, 이 마을이 어떻게 형성된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인적이 없는 숲속 깊은 곳에 위치한 이 마을은 제국 내 발 디딜 데 없는 이들이 모여 만든 곳이었다. 대략 이십 명 안팎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톰과 제시는 톰의 강제 징집을 피해 도망쳤다가 이곳에 다다랐고, 며칠 전 이 집을 다녀간 낯선 사내는 전쟁 중에 도망친 탈영병이었다.

한때 황실에 가구를 납품할 정도로 유명한 가구 제작자였다는 자도 있었다. 황녀가 책상에 찧어 혹이 났다는 이유로 처벌당하며 가업을 잃고 고리대금에 손을 댔다가 막대한 빚을 갚지 못해 이곳에 숨어 살고 있다나.

사정은 정말이지 가지각색이었다. 공통점이라면 황제와 황녀 때문에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경범죄까지 저지르게 될 정도로 궁지에 몰린 경험들이 있단 사실이었다.

물론, 그 이야기를 그들이 레이블라에게 직접 해 주지는 않았다. 레이블라는 저녁마다 수면제를 먹어야 했는데, 그녀가 잠든 척하고 있는 사이, 톰과 제시의 집에 모인 사람들이 하소연하듯 털어놓은 이야기를 엿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레이블라는 탈출을 결심했다.

‘오늘은 톰이 빌리와 경비를 서는 날이라고 했지.’

며칠에 걸쳐 살펴본 결과, 이 마을 사람들은 매일같이 짝을 이루어 정찰을 돌고 있었다. 마을을 함께 지키며 결속력을 다지기 위함이자, 변심한 이가 마을을 혼자 탈출하여 황궁에 고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며칠 전, 톰에게 가장 먼저 발견되었던 것도 그날이 톰이 빌리와 경비를 서는 날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제시는 자고 있겠지?’

조심스럽게 문으로 가서 귀를 대 보니, 밖이 조용했다. 벌써 지평선 가까이 있던 별이 하늘 높이 뜬 시각이니 지금쯤 제시는 꿈나라를 거닐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휴우.

작게 숨을 고른 레이블라가 침대에 누군가 자고 있는 것처럼 이불을 뭉쳐 꾸며 내고 창문을 열었다. 빼꼼히 밖을 내다보자, 다행히 근처를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 며칠 수면제를 먹고 계속 자는 척하며 사람들을 방심시킨 보람이 있었다.

‘나무 그림자가 가장 짧을 때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어.’

레이블라는 창문과 가장 가까운 나무의 그림자를 확인하고 조심조심 창틀을 넘어 뛰어내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기려는데.

“큰일 났습니다! 수상한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순식간에 사위가 밝아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레이블라가 즉시 방으로 되돌아가려고 했지만, 덜컹. 소리와 함께 제시가 문을 열고 레이블라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가……?”

잘근, 입술을 깨문 레이블라가 가까운 사각지대로 몸을 숨겼다.

‘제발 나가. 침대로 가지 마.’

침대로 갔다가 자신이 없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그간 거짓말을 모두 들키게 된다. 수면제가 통하지 않았다는 것도, 내내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렇게 되면 결말은 둘 중 하나였다. 평생 이곳에 갇힌 채 살거나, 죽임당하거나.

그래서 제발, 침대로 가지 않기를 빌었건만.

“……없어?”

젠장.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잡히지 않길 바라며 달아나는 것이 전부였다.

레이블라는 짧은 팔다리를 힘껏 움직였다.

* * *

“여기는?”

“없어.”

사람들의 술렁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블라는 수풀 깊숙이 숨긴 몸이 드러날까 싶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최대한 몸을 둥글게 말며 웅크렸다.

“그 쪼그만 게 우리를 갖고 노네.”

“그 꼬맹이가 분명 외부와 연락을 한 게 분명해. 아까 나타났다던 그 새끼들과 한패일 거야.”

“수면제를 먹은 아이가 어떻게 도망칠 수 있지? 역시 훈련된 첩자인가?”

“빌어먹을 자식들.”

이를 으득 갈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이상했어. 갑자기 숲에서 아이라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게 말이 돼?”

“아까 나타난 그놈들은 어떻게 됐어?”

“마을 근처까지 온 것 같아. 어차피 그 꼬맹이가 마을 주변을 수색하는 그놈들과 한패겠지. 그놈들이 누군지 확인하러 갔던 녀석들과는 여전히 연락이 안 돼?”

대화를 듣고 있자니, 저들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는 듯했다.

‘진짜 잡히면 죽겠구나.’

처음엔 경비대와 한패라고 오해하더니, 이젠 누구랑 한패로 엮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오해를 풀기엔 너무 먼 곳까지 와 버렸다.

‘얼른 빠져나가야 하는데.’

저들이 지리를 더 잘 파악하고 있다 보니, 도망치기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제시가 쳐들어왔을 때, 잠에서 깨어 산책 나온 척 연기라도 할 걸 그랬나.

‘게다가 이제 라플이 없어.’

처음에는 해독초가 수면제에도 효과를 발휘할지 걱정했으나, 다행히 제대로 수면제도 무효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저들이 음식에 수면제를 넣을 때마다 해독초를 먹었더니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약 자백제라도 먹는 날에는 돌이킬 수 없게 되니 한시라도 빨리 달아나는 게 최선이었다.

‘하필 왜 오늘 수상한 놈들이 나타나서.’

이쯤 되니 신이 저주를 내려서 이렇게 재수 없는 일만 일어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신전에라도 한번 가야지.’

빌어먹을 신에게 욕이라도 좀 하게.

그러려면 일단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며칠 전에만 해도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무척 막막한 심정이었으나, 이성을 차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레이블라는 바리베 왕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돈 벌 방법은 있으니 여비 버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어린아이의 몸이라 많이 불리하기는 하겠지만, 정보상에 찾아간다면 어떻게든 될 터였다. 그들에게 군침이 돌 만한 정보를 무엇이든 내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차피 황궁에서는 날 찾지 않을 거야. 달아날 수 있어.’

지금껏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황녀 또한 자신을 찾지 않는 게 분명했다. 황녀만 체념한다면야 황제도 ‘레이블라 펠리시티’쯤은 죽었다고 생각하며 넘길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이 기회였다. 소설의 영향력 아래에서 달아날 기회. 이 빌어먹을 나라에서 벗어날 완벽한 적기.

레이블라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신이 기회를 준다면, 당연히 받아먹을 작정이었다.

‘……갔나?’

어느새 수풀 근처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사위가 조용해졌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나가야 하는데.

어쩐지 불길했다. 조용하기는 한데, 폭풍 전 고요 같은 느낌이랄까.

등골이 섬찟해지는 것이, 뭔가 이상한…….

“꼬마야. 언제까지 거기 있으려고?”

빌어먹을.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어른들의 소리에 고개를 들자, 사내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이블라가 시선을 들자 그의 눈이 살짝 웃는가 싶더니 곧장 그가 레이블라의 몸을 낚아채듯 들어 올렸다.

“너 누구야.”

“……윽.”

“누가 보냈어? 응? 말해 봐.”

어깻죽지를 쥔 손아귀 힘이 강해지자 레이블라가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 그의 팔을 쥐어뜯었다. 강하게 긁히자, 그가 큰 소리를 내며 손에 힘을 풀었다.

이내 할퀴어진 피부를 본 그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표정이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너……!”

높아지는 목소리만큼이나 손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 손이 레이블라를 향해 내려왔다.

레이블라는 곧 닥칠 고통을 참아 내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을 떠 보니 사내는 레이블라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이내 그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한 사람.

“……칼릭스 벤야 트리셰인.”

붉은 눈동자의 소년.

“잊지 마. 내 이름이니까.”

그가 핏빛과 함께 레이블라의 마음속에 이름을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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