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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2)화 (32/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2화

    밖으로 나왔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커다란 돌이었다. 아마도 저게 상자 위를 막고 있었을 것이다.

    “그 미친놈들이 진짜 날 죽일 셈이었나 봐.”

    황녀를 위협했던 사내를 떠올리며 레이블라는 이를 갈았다.

    사위는 어둑하고 고요했다. 정말로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벌칙도 아니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버려졌다는 것을.

    엉금엉금 기어서 갇혀 있던 방을 나가자, 제법 큰 오두막 안의 전경이 눈에 밟혔다.

    습격을 받은 듯, 방 안 물건은 모두 엎어지거나 깨져서 바닥을 나뒹굴었고,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흥건했다. 아마도 꽤 치열한 접전이 있던 게 틀림없었다.

    부상자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모두 기사들에게 끌려간 듯했다.

    레이블라는 가까운 바닥에 굴러다니는 칼을 들고 제 손을 묶은 끈을 잘라 내었다. 그리고 자욱한 피 냄새를 피하고자 재빨리 오두막을 벗어났다.

    ‘상식적으로는 여기서 구조를 기다리는 게 맞기는 한데.’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땐 제자리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그거야 구하러 올 사람이 있다는 가정하에서였다.

    이 세상에 레이블라 펠리시티를 찾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레이블라 펠리시티를 구할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아침까지 기다렸다 움직이기에, 여긴 위험해.’

    황제와 기사들이 납치범 일당을 모두 처리한 듯싶었지만 잔당이 없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다시 이곳을 찾기라도 한다면 위험해질 것이었다.

    ‘물줄기를 따라가야 하나?’

    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마을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물줄기를 따라가면 깊은 숲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레이블라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어가자 다행히 물줄기가 있었다.

    ‘이걸 따라가면 되겠다.’

    혹시나 길을 잃을 것을 대비하여 레이블라는 출발지에 있는 나무에 작은 표식을 그려 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허기가 들 때면 근처에 있는 열매를 따 먹고, 졸리면 쪽잠을 자고, 시시때때로 표식을 남기면서 걸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수풀들 사이로 인가가 보였다.

    드디어 살았다는 안도감이 차올랐다. 끝없이 이어지는 숲을 보며 느꼈던 불안감이 한순간에 날아가자 겨우 버티고 있던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풀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누군가 목격한 듯했다. 레이블라에게 다가온 사람은 평범하게 생긴 젊은 남성이었다.

    “아가, 왜 그러고 있니?”

    “…….”

    “어쩌다가. 왜 숲에서 혼자 나오는 거니?”

    다정한 표정으로 온화한 목소리를 내며 물었지만, 그의 눈은 조금도 웃지 않고 있었다.

    설마, 황녀를 납치한 녀석들과 한패인 걸까?

    눈앞의 사람이 납치범들과 한패라면 마을도 안전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잔뜩 경계심이 일었지만, 레이블라는 끓어오르는 예민함을 억누르며 그를 만나 비로소 안도한 것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훌쩍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엄마가 왜? 엄마 잃어버렸어?”

    레이블라가 천천히 끄덕이며 울먹였다. 사내의 눈동자에 동정심이 깃들었다.

    “어디서?”

    레이블라가 숲 어딘가를 가리키자 그가 그쪽을 가만히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상황을 가늠하는 모양새였다.

    레이블라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떨구며 재빨리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빠져나와 더러운 옷. 너덜너덜해진 신발과 치맛단. 대충 물에서 씻어 넘긴 탓에 꼬질꼬질해진 소매.

    아마 얼굴도 그렇게 깨끗하지는 못할 터였다.

    “여긴 어떻게 왔어?”

    “엄마가, 길 잃어버리면 물에 뜬 나뭇잎 따라가라고…….”

    “그래서 나뭇잎 따라왔어?”

    끄덕끄덕.

    “그거 말고는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생각나?”

    “좋은 곳에 가자고 했어요…….”

    레이블라의 이야기에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마도 마지막 말로 ‘아이가 버림받았구나’하고 짐작한 듯했다.

    “그럼…….”

    꼬르륵.

    때마침 들려오는 허기진 소리에 그가 질문을 멈추고 미소를 지었다. 커다란 손이 레이블라 머리에 얹어졌다.

    “그럼 잠시 아저씨 집에 갈까? 아저씨 집에 고소한 빵이랑 따뜻한 우유가 있는데.”

    아직 이 사람의 정체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함부로 따라가기에는 꺼림칙했다.

    그렇다고 그의 제안을 뿌리칠 상황도 못 되었다. 거절했다가 괜한 의심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모두 빠진 지금은 그에게서 달아날 방법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니, 차라리 마을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살피는 게 유리할 듯했다.

    생각을 마친 레이블라가 끄덕이며 팔을 뻗자 그가 웃으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렇게 그의 집으로 향했다.

    * * *

    “아가가 잘 먹네.”

    레이블라는 딱딱한 빵을 우물우물 씹으며 눈앞의 사내와 여성을 응시했다.

    사내, 톰은 그녀를 마을 안으로 데려왔던 사람이고, 곁에는 그의 부인, 제시였다.

    ‘어디서 아이를 주워왔어요?’

    ‘어머, 꼬질꼬질하구나. 아줌마가 씻겨 줄게.’

    ‘씻고 보니 정말 이쁘네. 아줌마 딸 할래?’

    처음에는 황녀와 자신을 납치한 사람들과 한패인가 의심하며 경계했지만, 분위기상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손을 내미는 정 많은 사람들로 보였다.

    제시는 레이블라를 보자마자 숲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고 달래며 따스하게 안아 주었고 깨끗이 씻긴 다음 기꺼이 자신들의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착한 사람들이었다.

    ‘……음식에 뭔가 넣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할 뻔했어.’

    레이블라는 꿀꺽, 우유를 삼키며 생각했다.

    ‘늘 라플을 갖고 있어서 다행이야.’

    언제 어디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레이블라는 품속에 늘 해독초를 챙기고 다녔다. 허름한 주머니 안에 넣어 둬서인지 납치당했을 때도,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도 모두 크게 신경 쓰지 않아 다행이었다.

    ‘무슨 약이지?’

    독? 아니면 자백제?

    ‘뭐가 됐든 라플이 해독해 주겠지.’

    지금 해독초를 먹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레이블라는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들이 먹인 약의 효능을 확인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꾸며 내기 위해서였다.

    독이라면 괴로운 척하며 방심하게 만든 다음 달아나면 될 일이었고, 자백제였다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속이는 것이 안전할 테니까.

    “서쪽 마을에서 온 아이일까요? 그쪽이 최근 흉년이 들었다면서요.”

    “그 마을이라면 여기서 하루 정도 거리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기는 해.”

    레이블라는 배가 불러 졸린 척하면서 그들의 말에 착실하게 귀를 기울였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생각하면서.

    그런데 얼마지 나지 않아 정말로 짙은 졸음이 밀려왔다.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고, 견디려고 해도 견딜 수 없는 졸음.

    ‘수면제는 라플로 해결이 되나……?’

    레이블라는 덮쳐 오는 수마에 못 이겨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다가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면서 재빨리 꽃잎을 입에 넣었다.

    그러자 그들의 시선이 레이블라에게로 향했다.

    “아가가 많이 졸리구나.”

    키득. 제시가 미소 지으며 다가와 레이블라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작은 방으로 데려가 포근한 침대에 눕혔다.

    “편히 자렴.”

    토닥이는 손길에 레이블라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깨어 있어야지, 내 몸은 내가 지켜야지, 하며 정신을 붙들려 했지만 그만 까무룩 잠이 들고야 말았다.

    * * *

    “……해?”

    “……겠, ……지.”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자, 이번에도 역시 낯선 천장이 보였다.

    잠깐 졸았던 사이에 해가 숨어 버렸는지, 사방은 고요한 어둠이 내린 채였다.

    “어때? 의심스러운 구석은?”

    처음 듣는 사내의 목소리에 톰이 답했다.

    “글쎄, 아직은.”

    “괜히 마음 주지 마. 혹시 경비대가 보낸 녀석이면 죽여야 하니까.”

    “알고 있어. 그나저나 숲 안쪽에서 보이던 수상한 놈들은 어떻게 됐어?”

    “아직 정찰 갔던 녀석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어. 이틀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별일 없겠죠?”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제길. 그 빌어먹을 황제 놈만 죽어 버리면 이런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톰이 이를 으득 갈면서 황제를 향한 불만을 드러냈다.

    이에 동조하듯 수많은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그 황태자 전하께서 그대로 즉위하셨어야 했어. 그랬다면 우리가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그때가 좋았어.”

    필터 없이 쏟아지는 말들이 살벌했으나, 그럼에도 말리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황제에게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마을인가?’

    세상에. 그런 바람직한 인간들이 존재한다니.

    멀쩡한 사람들이 있기는 했구나. 이 미친 제국에도 조금은 희망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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