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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1)화 (31/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1화

황제처럼 자신이 죽길 바라는 게 아니고서야 그런 곳에 보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편지에서 시선을 거둔 채, 책상 위에 올려 둔 보랏빛 꽃을 보았다. 자연스럽게 소녀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날은 그가 황궁에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부모를 만나게 해 주마.’

평생을 유폐된 채 살다 황제로부터 살인 예고와 다름없는 초대장을 받고 오게 된 황궁이었다.

황궁에 온 이래로 황제가 그에게 내린 명령은 한 가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 쓸모를 다 해라.’

이 궁에서 지내며 역심을 품고 모여드는 이들을 색출하라, 즉 미끼 노릇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정말로 제 인생이 쓰레기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세 살 무렵에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홀로 북부의 차가운 성에 처박힌 채 지내 왔었다.

그 생활은 끔찍하리만큼 고통스러웠다. 황실의 정통 후계에게 전해지는 진귀한 능력, 즉 드래곤의 힘을 누르는 구속구가 채워진 채 지내는 삶은 늘 물속에 잠긴 듯 숨이 막혔다. 그 고통은 가끔 미칠 것 같은 외로움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구속구는 겉보기엔 가느다란 줄처럼 보였기에 한때는 몸부림치며 반항도 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드래곤의 힘이 강력하다고 한들, 저보다 더 강했던 초대 황제의 힘으로 만든 구속구를 벗길 수는 없었다.

그 고통 속에서도 삶이 이어졌다. 다른 이와 교류는 물론, 오고 가는 것조차 원하는 대로 할 수 없고,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나날들.

태어난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는 죽음을 받아들인 채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순간에. 그녀가 나타났다.

‘참 친절한 분들이신가 봐.’

분홍빛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나타난 아이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모에 대해 제멋대로 말하지를 않나.

‘앞으로는, 늘 좋은 일만 있을 거야.’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던 미래에 관해 떠들지를 않나.

‘너는 행복해지겠구나.’

‘내 힘을 나누어 주는 거야. 네가 행복한 미래를 볼 수 있게.’

‘행복’이라는. 그게 무엇인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스스럼없이 꺼내었다.

그는 황녀궁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볼 때마다 말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지금껏 살아남은 이유는 그저 황제의 변덕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어머니와 함께 죽이려던 것을, 그날, 하필 그날 발현된 빌어먹을 드래곤의 힘 때문에 살아남았을 뿐이라고.

언젠가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가축처럼 그렇게 길러졌을 뿐이라고.

그런 자신에게 미래? 행복? 있을 리가 없었다.

역시나 첩자일까?

그가 의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며 다가온 이들은 여태껏 그런 사람들뿐이었으니까. 황제의 명으로 찾아와 제힘에 관심을 보이고, 그 능력을 연구하려는 작자들. 황제의 명령으로 그의 심중을 떠보려는 족속들.

게다가 그녀는 아버지와 자신이 어머니에게 선물로 주려고 길렀던 꽃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비웃음과 함께 눈을 감아 버렸다. 얼른 그 멍청한 아이를 잊어버리겠다고. 계속해서 무시하겠노라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생각났다.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멍청하다고 비난하면서도 그녀의 말이 귓가에 여운처럼 남고, 그녀가 잡아 줬던 손의 온기가 손끝에 맺혀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해 몰래 알아보았다. 알아내기는 쉬웠다. 모두가 그녀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으니까.

레이블라 펠리시티.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펠리시티 공작가의 마지막 핏줄.

그녀가 독을 먹었다고 했다. 곧 죽을 거라고.

‘지금은 그래. 세상 사람들 다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불행한 것 같고.’

‘하지만 나도 행복해질 거야.’

‘난 그럴 자신이 있거든.’

행복할 자신이 있다며 당당하게 외치던 그녀의 죽음을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속 시원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말로 죽는 걸까.

기이한 감정이 일었다.

소녀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 살아남아 저 사람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해 줬으면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찾고 있다는 ‘라플’을 들고 찾아갔었다.

그곳에서 그녀에게 꽃잎을 직접 따서 먹인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잡은 손을 뿌리치기가 어려워서. 그에게 절실하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런데 자신의 행동으로 그녀의 안색이 좋아지는 것을 보자,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늘 이 세상에서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누군가에게 절실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저도 한 번쯤은 쓸모 있는 역할을 했단 사실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소녀는 알고 있을까.

그날 궁으로 돌아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그 이후, 그의 비밀을 알고 있단 쪽지를 받고 도발임을 알면서도 넘어간 것 역시 그저 소녀가 건강해진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그를 찾아내겠다고 했을 때 내심 기대했다는 것도. 소녀가 언제 그가 있는 곳을 찾아올까 싶어 내내 기다렸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었다.

이름을 말해 주지 않고 버틴 이유도 우스웠다.

소녀가 호기심에 한 번이라도 더 와 주길 바랐으니까.

그는 다시 한번 제 손에 들린 편지를 보았다. 그녀의 마음이 깃든 글귀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나는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 삶은 어떤 삶일까.

[드넓은 바다! 산뜻한 바람!]

함께 바다를 보면서 실바람을 맞는 그런 삶일까.

“……보고 싶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그리움을 표하고 나니 감정이 점점 부풀어 올라 주체하기 어려워졌다.

지금 당장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녀를 멀리서라도 보기 위해 황녀궁 쪽으로 향하는 걸음이 들떴다.

그랬는데.

“제발, 아무 일 없이 돌아오셔야 할 텐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그 쳐죽일 놈들이 감히 전하를 납치하다니.”

황녀궁의 분위기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그 가운데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니 황녀와 레이블라가 함께 바깥 축제에 나갔다가 납치를 당했다고 했다.

피가 서늘하게 식었다.

그때였다.

“찾았습니다! 전하께서 오십니다!”

황녀를 찾았다는 소식에 모두가 환호했다. 그래서 그 역시 안도했었다.

레이블라도 금방 돌아오리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그녀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고, 다른 이들도 그녀의 행방에 대해 더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직접 찾으러라도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신세도 아니었고, 그럴 힘도 없었다. 개처럼 묶여 사는 처지에,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화가 났다.

이토록 심장이 조일 만큼 답답했던 적도 처음이었다.

‘물론, 나도 행복해질 거고. 나는 그럴 자신이 있거든.’

자신과 같이 앞길이 막막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던 소녀.

회색빛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제 색채로 빛나던 소녀.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이제 자신이 움직여야 할 때였다.

“숨어 있는 거 다 알아.”

황녀궁에서 빠져나온 그는 자신을 항상 지켜보고 있는 녀석들에게 말했다.

“지금 폐하께 갈 것이다. 전하도록.”

처음으로 원하는 게 생겼다.

다시 만나면 제일 먼저 자신의 이름을 소녀의 마음속에 새겨 줄 작정이었다.

* * *

“아무도 없어요?”

“저기요!”

쿵, 쿵. 레이블라는 저를 가둔 작은 상자를 힘껏 두드려 보았지만, 새끼 쥐가 기어가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적막한 공간에 제 목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와…… 진짜, 이게 현실이라니.’

아무리 다들 주인공에게만 미쳐 있다고 해도 그렇지, 같이 납치된 아이의 행방을 살피지 않은 게 황당했다.

‘일부러 버리고 간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었다. 상식적으로 소리치고 쿵쿵 쳐 대는데 제국 최고의 기사들이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여기서 죽으라는 건가.’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이렇게 버리고 갈 이유가 없었다.

“……내가 죽을 줄 알아?”

아니, 언젠가 죽더라도 기필코 황제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야겠다 억울함이 풀릴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레이블라는 잠시 동작을 멈춘 채 호흡을 고르며 있는 힘껏 머리로 상자 뚜껑을 밀어 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도저히 뚜껑이 움직이지 않았다. 끙끙 밀어 올리다가 힘이 빠져 늘어졌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쿵.

소리가 나면서 무언가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답답하게 꽉 막혀 있던 상자 안으로 신선한 공기가 훅 끼쳤다.

‘……응?’

레이블라가 눈을 크게 뜬 채 멈춰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구겨진 몸을 펼치며 상자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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