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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0)화 (30/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0화

얍삽하게 생긴 사내였다. 그가 빵과 음료를 내려놓으며 능글능글한 투로 말했다.

“뭐야, 일어났나? 우리 귀하신 꼬맹이들.”

“너 누구야.”

황녀가 즉시 레이블라를 뒤로 숨기며 물었다. 토끼가 귀를 쫑긋 세우는 것 같은 모습에 사내가 피식 웃었다.

“꼴에 황녀라고 꽤 도도하십니다?”

“묻잖아. 너 누구야. 왜 우리를 납치한 거야.”

“알면 뭐 하게.”

“내가 누군지 모르고 이런 짓을 벌인 건 아니겠지. 나는 이 나라의 황녀다.”

“그래서 뭐. 그깟 황녀가 뭐 어쨌다고.”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하는 그를 보면서, 레이블라는 정말로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와, 이 세상에 황녀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구나.

그리고 하나 더.

‘이자는 황제에게 불만이 있는 사람이구나.’

제국민이라면 황녀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설정된 이야기이니까. 만약 그녀에게 적대감이 있는 이가 있다면, 그건 황제 때문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황녀에게 음식을 챙겨 주는 것을 보니 아직은 황녀를 죽일 생각이 없으며, 황녀를 통해 황제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생각임이 분명했다.

“꼬마야. 그냥 가만히 있어. 응? 주는 거 꿀떡꿀떡 받아먹으면서 얌전히만 있으면 화 안 낼 테니까.”

“정말, 가만히 있으면 살려 줄 거야?”

“그래. 당연하지. 이 오빠가 한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란다.”

키득키득.

“그러니까 널 데리러 올 사람이 여기에 올 때까지 조용히 있는 거다? 응?”

“누가 데리러 오는데.”

“글쎄? 네 아빠?”

황제를 언급하는 목소리에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이를 알아챈 황녀가 날카롭게 받아쳤다.

“아빠한테, 무슨 짓을 할 생각이야?”

“내가 뭐 하는지 알면 넌 뭐 하려고?”

“내가 먼저 묻잖아!”

“아, 이 꼬마 성질 더럽네. 입이라도 막아 버릴까.”

한숨과 함께 그가 일갈하자 황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사람답게 대우해 줄 때 얌전히 있어, 꼬마야.”

피식. 웃은 그가 손을 휘휘 흔들면서 다시 문을 빠져나갔다.

삐꺽삐꺽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이윽고 쿵, 문을 닫는 소리가 났다. 그에 황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레이블라의 손을 붙잡았다.

“도망가자.”

황녀의 목소리와 표정이 단호했다.

“레이블라, 저들은 우리를 죽일 거야.”

아니, 틀렸다. 저들은 죽이지 않을 것이다.

“여길 나가야만 무사할 수 있어. 너도, 나도. 그리고 우리 아빠도.”

“…….”

“무슨 짓을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있으면 위험해질 거야. 그러니까 나가야 해.”

“저는, 그냥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금 대화로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란 걸.

“저 사람 행동이 좀 수상해요. 그러니까 상황을 보는 게…….”

하지만 황녀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만약 네가 가지 않으면, 나 혼자서라도 갈 거야, 레이블라.”

자신이 여기에 묶여 있으면 황제까지 위험에 처하리라 여기는 것 같았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저들이 하는 말 따위 그저 도발이라는 사실을 알 텐데. 가족이 걸린 문제라 그런지 침착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하아.

“알겠어요. 전하를 믿을게요.”

말릴 수 없다면, 차라리 같이 가기라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황제가 올 시간이라도 번다면, 살 확률이 높을 테니까.

체념한 레이블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녀가 구멍을 덮어 둔 물건을 치웠다. 그리고 힘껏 틈을 벌리자, 아이 하나는 지나갈 구멍이 생겼다.

“내가 먼저 나갈게.”

“아니, 제가 일단 주변을 확인하…….”

황녀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틈에 몸을 끼워 넣은 후였다. 어쩔 수 없이 황녀가 나가는 것을 돕게 된 레이블라가 주변을 확인한 후에 틈을 가리며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리고 역시나.

“꼬맹이들?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 안 했어?”

능글맞은 녀석이 밖을 지키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지.”

사내가 턱을 쓸면서 말했다.

“톡톡 쏘아붙이던 꼬마가 보내 달란 소리를 한 번 안 하니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놔!”

그에게 붙잡힌 황녀가 놓아 달라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단단히 그녀를 붙들면서 사납게 말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지?”

그가 황녀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겠다는 듯, 목덜미를 움켜쥐려고 했다.

그때, 레이블라가 나섰다.

“놔주세요.”

“왜? 네가 대신 죽고 싶어?”

“제가 전하를 꼬드긴 거예요. 그쪽 눈빛이 더러우니 빨리 피하자고요.”

“야.”

“그러니 그만 전하에게서 그 더러운 손 떼세요.”

경고하듯 말하자 그가 웃었다. 그러더니 황녀를 놓고 다가왔다. 그리고 곧장 그의 손에 밀쳐졌다.

“건방지네, 꼬마야. 너는 지금 당장 죽어도 상관없는데.”

“…….”

“응? 분홍 머리 아가씨.”

레이블라가 다시 몸을 일으키기 전 황녀를 보며 눈짓으로 말했다.

자신이 붙들고 있을 테니 얼른 도망가라고.

빨리, 지금이 기회라고.

만약 그녀가 도망간다면 레이블라는 남자를 잡을 생각이었다. 잠시라도 그를 막아 황녀가 달아날 틈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황녀라도 내보내면 자신을 다시 구하러 올 테니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의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는지, 황녀는 그저 돌을 쥔 채 입을 앙다물었다. 저놈을 공격하겠다는 듯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또 둘 다 잡히잖아, 바보야.

차라리 가만히라도 있든가, 도대체 왜 이렇게 도발을 못 해서 안달인 걸까.

생각하기 무섭게 황녀가 남자를 향해 돌을 던졌다.

레이블라는 결국 황녀의 허튼짓을 막기 위해 제 몸을 던져 남자에게 부딪쳤다. 그리고 황녀가 던진 돌멩이에 머리를 부딪치며, 넘어졌다.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레이블라!”

놀라 다가온 황녀를 보며 레이블라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제발, 폐하를 믿으세요…….”

제발, 믿고 좀 기다려라. 주인공아.

그 말을 끝으로, 까마득한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 좁은 나무 상자 안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싶었는데.

“찾았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레이블라는 다급히 제 위치를 알리고자 소리를 질렀다. 여기라고. 여기 있다고. 하지만 막상 내뱉어지는 소리는 “읍!” “읍읍!”하는 틀어막힌 소리뿐이었다.

‘이 나쁜 놈.’

잠시 의식을 잃은 사이 입을 틀어막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손마저 묶어서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은 어찌나 불편한지. 작은 상자에 욱여넣은 듯 답답했다.

다행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 조금만 인기척을 낸다면, 어떻게 해서든 제가 여기 있음을 알린다면 구해질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쿵쿵. 상자를 두들겨 제가 있음을 알렸지만 황녀의 울음에 묻혀 버렸다.

읍읍, 소리를 내어 이곳에 있음을 외쳤으나, 황녀의 더 큰 울음에 가려져 버렸다.

“돌아가자. 집으로.”

악을 쓰고 온몸을 비틀어 제 존재감을 표했으나, 허무한 몸짓일 뿐이었다.

결국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채 인기척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엑스트라 인생.’

레이블라가 제 처지를 한탄함과 동시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지고야 말았다.

* * *

달빛 아래 폐허와 다름없는 궁.

인기척조차 나지 않은 조용한 궁 안 창가에는 오늘도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집요하게 훑는 중이었다.

몇 번이나 읽었는지, 종이의 끝은 이미 너덜너덜하게 말려들었고, 그의 손길을 따라 작게 구겨진 구석도 있었다.

그렇게 닳도록 읽었음에도 소년은 여전히 쪽지에 담긴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제게 편지를 남긴 소녀에 대해 생각했다.

‘함께 행복해져요, 우리.’

‘나중에는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그녀는 늘 그에게 행복과 미래를 이야기해 왔다. 희망을 말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런데 이 편지의 내용은 그 모든 것을 뒤집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자원해서 전쟁터로 가길 바라.’ 그게 요지였으니까.

‘넌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걸까?’

편지에는 지금 벌어지는 전쟁에 나가길 바란다며, 이런 생각밖에 해낼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무력함, 미안함이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쟁터로 가라는 말은 단호해서, 냉정함마저 느껴졌다.

어째서 전쟁에 참전하라 운운하는 걸까.

현재 전장에선 굉장한 난전이 펼쳐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연합국이 초반에 기세를 몰아붙이고자, 온 힘을 다해 제국과 혈전을 벌인 탓이었다.

매일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게 아니면 누군가는 전장을 이탈해 도주 중이라는 정보가 속속 황궁으로 도착했다.

그런 곳에 가라니.

‘황제의 첩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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