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9화
순식간에 밀려난 레이블라가 다급히 황녀를 찾아 사람들을 헤집었다.
다행히 황녀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지옥에라도 다녀온 듯 하얗게 질린 채 황녀를 불렀다.
때마침, 황녀 또한 레이블라의 손을 놓쳐 당황하고 있었는지 이내 안도하는 낯으로 다가왔다.
“놀랐잖아.”
“저도요. 갑자기 이렇게 사람이 늘어날 줄 몰랐어요.”
“레이블라가 또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 손 꼭 잡고 가야겠다.”
황녀가 다시 손깍지를 끼며 씩 웃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순진하고 선해 보이던지. 레이블라는 이런 아이가 회귀 전 크게 고생했단 사실이 떠올라 문득 안쓰러워졌다. 누굴 동정할 처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신도 이럴진대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사람들이 황녀를 감싸고 도는 이유를 새삼 실감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블라도 웃으면서 황녀의 손을 마주 쥐었다. 그리고 다시금 함께 발을 내디뎠다.
찰나였지만 황녀를 잃어버린 것에 놀란 레이블라가 황녀와 이동하는 동안 어딘가에 있을 호위 기사를 눈으로 찾았다.
하지만 비밀리에 붙은 그들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빠르게 호위 기사 찾기를 포기한 레이블라는 다시금 황녀에게 집중했다.
‘역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위험해.’
아무래도 안전을 위해서 사람들이 조금 빠진 후에 등을 만들러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외곽으로 안내하려는데.
“레이블라, 저기 봐! 커다란 꽃등이야!”
갑자기 황녀가 돌발 행동을 저질렀다.
그녀가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자, 순식간에 인파에 휩쓸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앞쪽으로 수상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평범하게 생긴 사람인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모양새가 어쩐지 꺼림칙했다.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곧이어 알아차렸다. 상대가 누구를 노리고 있는지.
……피해야 해.
찰나의 생각과 함께 황녀를 제 뒤로 끌어당기려 했으나, 수상한 사내의 팔이 더 빨랐다. 그가 황녀를 잡아챌 것처럼 쭉 다가왔다.
레이블라는 그 손을 쳐내고 황녀를 등 뒤로 숨겼다. 사내의 손은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가 날카롭게 레이블라를 노려보았다.
살기가 도는 눈빛이었다.
“얼른, 도망치세요, 아가씨.”
“……왜 그래, 레이블라.”
눈앞의 사내를 경계하면서 레이블라가 주변을 보았다. 황제가 붙인 기사들을 찾으려 눈동자를 분주하게 굴렸으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커다란 소리에 반응하듯 또다시 사람이 밀려드는 통에 키가 작은 두 소녀가 완벽하게 가려졌다.
그리고 불쑥 황녀의 뒤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레이블라는 반사적으로 황녀를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동시에 목뒤가 크게 아픈가 싶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고야 말았다.
* * *
……라.
……블라.
레이블라!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끌리듯 눈을 뜨자, 낯선 풍경이 두 눈 가득 들어찼다. 나무로 된 낡디낡은 천장과 황녀.
……황녀?
“괜찮아?”
“아, 네…….”
아직도 정신이 완전히 들지 않은 듯 몽롱한 목소리로 대답한 레이블라가 서서히 기억을 더듬었다. 삽시간에 의식을 잃기 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황녀에게 해코지하려 했고, 자신이 막았던 것을.
레이블라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황녀를 보았다.
샅샅이 훑는 눈길이 집요했다.
“괘, 괜찮으세요, 전하?”
“응, 나는 괜찮아. 레이블라는?”
“저는 괜찮아요.”
강하게 충격을 받았는지, 목덜미가 욱신욱신하기는 했지만 견딜 만했다. 태연히 답하며 즉시 황녀의 목을 살폈다. 다행히 황녀의 목덜미에는 어떠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시죠? 머리가 아프다거나, 어디 욱신거리든가 그런 거 없으시죠?”
“정말 괜찮아. 레이블라는 걱정이 너무 많아.”
“그럼 다행이고요. 그런데 저희 어떻게 된 거예요?”
“그대로 끌려왔어. 눈 떠 보니 여기였고.”
……환장하겠네.
분명 황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따라붙은 기사들이 있었을 텐데, 왜 막지 못한 거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앞이 캄캄했다.
‘황제에게 죽는 거 아니겠지?’
솔직히 납치당한 일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구출될 테니까.
함께 납치된 황녀는 무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결코 죽을 일이 없는 사람. 마지막까지 남는 승자.
게다가 장르는 힐링물. 상처 하나 없이 살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작중 최고의 아군. 황제가 그녀를 구해 주러 올 것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레이블라 자신이었다. 황녀와 야행에 나섰다 납치당한 죄를 뒤집어쓰고 황제에게 죽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렇게 온몸으로 황녀를 사수했건만.
‘진짜 이 세상 놈들은 하나같이 도움이 안 되네.’
아니, 애초에 자신은 억울했다. 이 꼬꼬마의 몸으로 막았잖아. 일을 못 한 건 기사들이잖아?
이 정도면 황제도 정상 참작을 해 주어야 했다. 양심이 있다면 호위 기사들을 탓하지, 자신을 탓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 지금부터라도 잘하자.’
지금부터 얌전히, 황녀를 보호하면서 잘 지켜 낸다면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하?”
“응, 레이블라.”
“지금, 뭐 하고 계세요?”
레이블라의 물음에 황녀가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도망가야지.”
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지금 황녀가 독자들의 화병을 돋우는 민폐 여주 같은 행동을 하려는 듯했다.
“저기, 전하?”
“응.”
“폐하께서 구하러 오실 거예요.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당신의 아버지는 딸이 바다 밑바닥에 있다 해도 찾아올 사람이니, 그냥 기다리는 게 상책인데 왜 허튼짓을 하려는 것일까.
황녀의 머리카락 색과 눈 색깔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으로 보아 납치되고 시간이 꽤 지났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황제는 모든 정보망을 동원하여 딸을 찾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아니, 이미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을 터. 바로 근처에 있을지도 몰랐다.
레이블라는 그런 마음에서 달래듯 이야기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황녀의 포옹이었다.
황녀는 레이블라를 어린 동생을 어르듯 꼬옥 안아 주면서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 레이블라. 내가 꼭 구해 줄게.”
그녀를 제지하는 이유가 단순히 불안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황녀가 든든한 언니 행세를 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불안감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이성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한 레이블라는 조용하게 주변을 탐색했다.
‘사람은 없는 거 같은데.’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아도 인기척이 들리지는 않았다. 가만히 문으로 다가가 귀를 대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조심스럽게 문에서 멀어진 레이블라가 톡톡 바닥을 두드렸다. 나무 바닥은 마감이 잘된 편은 아닌지 작은 충격에도 큰 소리가 났다. 누가 다가온다면 반드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이다.
일단 안심한 레이블라가 고개를 돌리자, 때마침 그녀를 보고 있던 황녀와 눈이 마주쳤다. 황녀가 눈웃음을 치면서 이리로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가까이 가자, 작은 틈이 보였다. 바깥에서 바람이 솔솔 새어 들고 있었다. 황녀가 속삭였다.
“여길 통해 나가면 나갈 수 있어.”
그건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나?’
아무도 지키지 않고 있는 데다, 대놓고 도망칠 구석까지.
귀한 황녀를 납치하면서 이런 구멍을 확인하지 않았다고?
‘아니, 황녀가 있어서 운이 좋은 건가?’
생각해 보면 주인공들은 언제나 남들은 발견하지 못하는 루트를 극적으로 찾아내서 도망치기도 하니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발견한 이상 그냥 두기에는 아까웠다. 레이블라는 조심스럽게 작은 구멍을 살폈다. 구멍 밖으로 흙바닥이 있고 검게 물든 울창한 숲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는 밤이며 지금 있는 장소는 숲속인 것 같았다.
‘여길 통해 탈출하면 안전하게, 황녀가 티끌도 다치지 않고 황제에게 갈 수 있을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납치범들에게 쫓기다가 풀에 쓸리고, 나무에 긁힐 것이 분명했다.
그럴 바엔 그대로 있는 것이 좋기는 한데.
‘하지만 황녀가 탈출하려는 노력을 먼저 보여야 할 수도 있어.’
늘 정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 주인공을 구해 준다는 설정도 일단 주인공이 노력을 한다는 전제가 깔려야만 한다.
‘납치범들이 황녀를 납치한 이유를 알아야 결정할 수 있겠네.’
그들이 황녀를 살려 둘 생각이라면, 굳이 탈출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본보기를 위해 죽이려고 한다면, 황녀의 말처럼 여기를 통해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때마침. 삐그덕 소리가 났다. 레이블라가 다급히 작은 구멍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그때를 기다린 것처럼, 사내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