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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8)화 (28/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8화

    뜬금없는 이야기에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응! 레이블라는 대단해. 그냥 있어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잖아.”

    이게 무슨 소리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건 다름 아닌 황녀였다.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그녀가 지닌 전파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농담하는 건가?’

    우상이라고 한 건 무슨 의미일까. 가뜩이나 그녀가 왜 자신에게 호감을 보였는지 의뭉스러웠는데, 혼란이 가중됐다.

    레이블라 펠리시티는 원작 소설 속에서도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사실 엑스트라라고 보기에도 어려웠다. 그런데 주인공인 황녀에게 우상이라 치켜세워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황녀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있지. 나 레이블라를 오랫동안 알았어.”

    “저를요?”

    “응. 나는 황궁에 있으니까 남들은 못 듣는 소식도 전해 들을 수 있었거든. 그래서 레이블라의 소식도 많이 들었어.”

    무슨 소식이지……?

    레이블라가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하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레이블라는 정말로 똑똑하고 멋진 사람이라고 들었어. 뭐든 잘하고, 무엇이든 알고 있다고.”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을까요?”

    제정신인가. 이 세상 유일신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인 놈이 누구지?

    황녀가 혼자만 알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은밀히 속삭이듯 말했다.

    “모두가 그랬어. 레이블라는 펠리시티잖아?”

    “그 가문 망했는데요.”

    “그렇다 해도 레이블라가 레이블라인 것은 변하지 않잖아? 나는 레이블라를 늘 동경해 왔어.”

    그 말과 함께 황녀의 눈빛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깊어졌다. 이어 입가에 미소가 고였지만, 그 미소에선 어쩐지 씁쓸함이 느껴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말들이 진심이라면, 그간 왜 황녀가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의문이 사라지진 않았다. 애초에 누가 황녀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일까. 펠리시티 가문에 숨어들어 있던 첩자? 아니면 아버지인 펠리시티 공작?

    ‘누구기에 모두라는 표현을 쓰는 거지?’

    정작 다과회에서 스쳤던 부인들은 가문에서 꼭꼭 숨겨 놓은 통에 그녀가 어떤 아이인지 처음 알았다는 듯 반응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더 캐묻기도 전에 황녀가 화제를 돌렸다.

    “축제는 재미있었어?”

    “축제요?”

    “응. 며칠 전에 갔던 축제. 어땠어?”

    오늘따라 황녀가 참 이상했다. 우상이니 뭐니 운운하더니 갑자기 이미 다 지난 축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미심쩍은 티를 내지 않은 채 레이블라는 성실히 답했다.

    “음, 처음에는 황녀 전하와 헤어져서 쓸쓸했지만, 사람 구경하면서 즐겁게 보냈어요. 전하께서는요?”

    “레이블라와 떨어져서 재미는 없었어. 같이 보고 싶었는데.”

    앗. 사실에 어긋나지 않게 답했는데, 아무래도 오답인 모양이었다. 레이블라가 즉시 답을 수습했다.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 그때 또 보러 가면 되죠!”

    “그럴까? 그럼 며칠 후에 ‘꽃 축제’가 있는데 가 볼래? 밤에 구경하면 정말로 예쁘다고 했어.”

    이놈의 나라는 무슨 축제가 이렇게 많지. 이래도 나라가 굴러가나.

    불만이 샘솟았지만 레이블라는 오랜만에 제게 호의적으로 구는 황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처럼 따라붙을 기사들도 많을 테니까. 별 문제 없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달빛이 내린 밤. 숙소 창문 너머에서 손을 흔드는 황녀를 발견했을 때, 레이블라는 이날의 결정을 절절하게 후회하고야 말았다.

    * * *

    “레이블라!”

    “……전하?”

    레이블라는 새카만 로브를 입은 황녀를 보면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달이 뜬 밤이었다. 분명 시녀장을 통해 한 시간 전에 황녀가 자러 갔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 그런데 왜 자고 있어야 할 황녀가 창문 너머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거지?

    게다가 황녀의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이 모두 갈색 빛깔을 띠고 있었다.

    일말의 불안감이 레이블라의 등줄기를 스쳤다.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다 방법이 있지.”

    우쭐하며 웃는 황녀의 얼굴에는 장난스러움이 가득했다.

    한껏 어깨를 으쓱하던 그녀가 레이블라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가자.”

    “어딜요?”

    “축제! 약속했잖아. 우리 같이 가기로.”

    “지금이요?”

    이 어두운 시각에?

    레이블라는 상체를 창밖으로 내밀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없었다. 사람이. 아무도.

    “설마, 전하와 저, 단둘이 가는 거예요?”

    “응!”

    맙소사.

    “오늘은 좀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도 낮에 호위 기사분들을 데리고…….”

    “괜찮아! 나 밤에도 자주 다녀 봤어. 얼른 가자. 레이블라를 위해 약도 가져왔어.”

    그 말과 함께 황녀는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었다. 이전에 황녀와 함께 나갔을 때 먹은 적이 있었던 머리 색을 바꾸어 주는 마법약이었다.

    황녀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로브와 함께 약을 건네 왔다. 너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했다는 듯이, 당당하게.

    “……주, 준비를 모두 하셨네요.”

    “응, 잘했지?”

    예고도 없이 철저하게 준비해 온 것이 몹시 당혹스러웠지만, 생각해 보면 이게 황녀의 본 모습이기는 했다. 소설 속에서도 회귀 후 황궁을 버리고 자기 삶을 살겠다며 몰래 밖을 오가곤 했었으니까.

    “얼른 가자. 응?”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데.

    ‘황제가 호위를 붙여 뒀을 테니 괜찮겠지……?’

    황녀가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을 하고 있으니,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숨을 삼키며 레이블라가 마지못해 의자를 밟고 창틀을 넘어섰다.

    겨우 창틀에 닿는 작은 키의 두 소녀는 그날 밤, 함께 황궁을 빠져나갔다.

    * * *

    축제의 현장에 도착한 순간, 레이블라는 황녀가 굳이 밤에 오자고 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전 축제 때 인파로 붐비었던 거리가 그사이 화려하고 아름답게 변해 있었다. 거리에는 알록달록한 꽃들이 가득했고, 거리의 조명 역시 꽃 모양의 등으로 시시각각 빛깔을 달리하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눈이 닿는 곳곳마다 꽃 모양의 장식들이 있었고, 사람들의 머리에도 꽃들이 꽂혀 있어서 보고만 있어도 향긋한 내음이 풍기는 듯했다.

    “오길 잘했다, 그치?”

    황녀의 물음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이토록 화려한 광경은 처음 보았으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축제인가요? 꽃 기념일 같은 건가요?”

    “아. 그거.”

    레이블라의 물음에 황녀가 키득대며 웃었다.

    “내가 아빠에게 꽃을 키워서 선물한 적이 있었거든. 내가 직접 키웠다는 사실을 알고 아빠가 너무 기뻐하시면서 축제를 지정했어. 그때 내가 키운 꽃이 저건데…….”

    황녀는 자기가 몇 살 때 무슨 꽃을 피웠고,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세세하게 설명했다. 그 일을 말하는 동안 황녀의 얼굴에서는 기쁨과 뿌듯함, 자랑스러운 감정이 넘쳐났다.

    “의미 있는 날이네요. 축제로 지정될 만해요.”

    “그럴까?”

    “그럼요. 덕분에 아가씨께서 이렇게 그날 일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계시잖아요.”

    “아가씨라고 부르는 거야? 내 이름 불러도 된다고 했잖아.”

    “제가 어떻게 그래요.”

    황궁을 벗어나기 전에 황녀에게 ‘바깥에서는 위험하니까 내 이름을 불러 줘.’라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레이블라는 그러지 못했다.

    지금도 분명 따라붙은 황제의 그림자들이 있을 것이다.

    황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소식이 황제의 귀에 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아는데 어찌 그럴 수 있나.

    “레이블라는 고집이 세.”

    “네. 좀 그렇죠?”

    레이블라의 순순한 인정에 황녀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좋아. 같이 밖에 나와서 더 좋아.”

    “네, 저도요.”

    “오늘 즐거운 추억 만들자.”

    “네, 아가씨.”

    황녀가 레이블라의 손을 꼭 붙잡으며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레이블라의 손을 다급히 끌어당겼다.

    “지금 강가 쪽에서 꽃등을 뿌린대! 가 보자!”

    잔뜩 신이 난 황녀가 레이블라를 이끌면서 앞서 나갔다. 자주 나와서 이 구역을 다 꿰뚫고 있다고, 자신만 믿으라며 언니 행세를 하려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그렇게 도착한 강에는 황녀의 말처럼 예쁘게 종이를 접어 만든 꽃등이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다.

    커다란 강을 꽃등이 가득 채우고 있는 광경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아름다웠다.

    “우리도 저거 하나 만들까?”

    “직접 만들 수도 있어요?”

    “응. 저기 저쪽에…….”

    황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이왕 온 거 꽃등을 만들어 띄우면 좋을 것 같았다. 곧장 줄을 서기 위해 나서려는데 갑작스럽게 몰려드는 인파에 황녀의 손을 놓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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