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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7)화 (27/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7화

레이블라의 물음에 그가 쥐고 있던 책을 달랑 들었다.

“책을 읽으셨구나. 책은 재미있게 읽으셨어요?”

레이블라는 그가 읽고 있는 책을 보았다. 분명, 자신이 읽으라고 추천해 주었던 책이었다.

‘아직은 쪽지를 발견하지 못했나 보다.’

만약 발견했다면, 그것에 관해 물었을 테니까.

“그냥, 그래. 할 게 없어서 읽는 거야.”

“네. 알아요.”

레이블라가 퉁명스럽게 답하자, 그가 붉은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 시선만으로도 어쩐지 조금 기뻤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무슨 말을 하든 묵묵부답이라 내심 속상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무슨 일이냐 먼저 묻기도 하고 감정을 드러내 주다니.

확실히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보였던 그의 얼굴에서 약간의 생기가 감돌았다. 그 뚜렷한 변화가 즐거웠다.

“만약 앞으로 제가 오지 못하더라도, 제가 어디서든 대공님을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세요. 아셨죠?”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

“그냥요. 제 상황이 갑자기 변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지금 레이블라에게 주어진 자유는 황녀의 호의에 의한 것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녀가 좋게 봐 주고, 그녀가 아끼는 인재이기에 레이블라의 상황이 이전보다 편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다니지 않아도 괜찮았고, 두건을 쓰거나 고개를 숙이며 다니는 일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황녀의 마음이 바뀌어 레이블라를 외면한다면, 이전의 처지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를 만나러 오는 일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괜한 오해라도 생기면 그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을 테니까.

“아셨죠? 저는 언제나 대공님이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어요. 진심이에요.”

“……넌 그런 소리를 정말 아무렇지 않게 하더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됐어.”

“그럼 이름이라도 알려 주세요.”

냉큼 화제를 돌리며 이름을 요구하자 그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가차 없는 태도에 다시 웃음이 나왔다.

“진짜 고양이 같으시네요.”

“뭐?”

“앞으로 야옹이라고 불러야겠어요.”

책으로 시선을 돌리려던 그가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또다시 레이블라가 웃자, 그가 은근히 분한 표정을 지었다. 짜증스럽게 눈을 돌리는 모습이 유독 새침하고 귀여웠다.

레이블라가 턱을 괴고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좀 더 자라시면 칭찬도, 응원의 말을 하는 것도 익숙해지실 거예요. 많이 하게 되실 테니까요.”

“…….”

“기대되네요. 분명 그대로 크시면 멋진 사람이 되어서 제국의 수많은 여성 마음을 홀리시겠죠?”

벌써부터 북부 대공으로서 손색없는 외모를 지닌 아이인데 그대로만 자란다면 아마도 세기의 미남이 되지 않을까. 제국을 넘어서 대륙 모든 여성의 마음을 훔칠 것이 틀림없었다.

“확실히 대공님께서는 제국의 두 손가락 안에 드는 남자가 되실 거예요.”

“……두 손가락?”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레이블라가 덧붙였다.

“비체라발리 소공자님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아요.”

“소공자……?”

그의 살짝 미간이 찡그려지면서 평소보다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어라?

그가 타인에게 호기심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레이블라는 어쩐지 신이 난 마음에 해사한 미소를 띠며 조잘거렸다.

“네! 듣기로 비체라발리 소공자께선 정말 외모가 출중하시대요. 눈이 부실 만큼 환한 은발에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가 예술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요! 두 분께서 친해지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 세상의 주인공인 황녀의 선택을 받은 남자와 친해진다면, 그 또한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질 테니까.

진심으로 두 사람이 친해지길 바라며 비체라발리 소공자에 관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열심히 꺼내 들었다.

그러나 말이 길어질수록 소년의 표정에는 불쾌감이 어렸다.

그러더니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너 가.”

툭, 하고 처음으로 축객령을 내린 그가 간식을 얻어먹은 후 주인에게 볼일 없어진 고양이처럼 다른 방으로 휙 가 버렸다.

……왜지?

‘왜 화를 낸 거지?’

좋은 의미로 한 말인데.

레이블라는 달빛이 내리는 길을 걸으며 소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로선 비체라발리와 친해져서 나쁠 필요가 없을 텐데, 힌트를 줘도 틱틱거렸다.

‘내 마음도 몰라주고.’

진짜 너무했다.

‘고양이 같다니까.’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하악질을 하며 밀어내는 게 똑 닮아 있었다. 미운 짓을 하는데도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결국은 다시 찾게 되는 것도 그렇고.

‘다음에는 호수에 있는 무지갯빛 물고기를 보러 가자고 해야겠다.’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궁에서 잘 나오지 않으려고 하지만, 밤이고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장소라면 괜찮지 않을까.

다음을 기약하며 배시시 웃음을 짓고 있자니, 어느새 황녀궁이 가까워졌다.

그제야 피로가 느껴지며 곧 쉴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이런 곳을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싶어서.

‘에이 말도 안 돼.’

저게 어떻게 집이야.

떠오른 생각을 거부하면서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데…….

‘응?’

황녀궁 안 분수대 근처에 황금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있었다.

황녀였다.

잠옷을 입은 채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커다란 분수대 앞에 선 아이의 모습은 마치 그림처럼 보였다.

‘왜 저러고 있지?’

어쩐지 등지고 선 황녀의 모습이 힘이 없어 보였다. 원래라면 잠이 들었어야 할 시간에 나와 있는 것을 보니 조금 심란한 일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로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못 본 거야.’

최근 황녀가 자신을 피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가가 봤자 좋은 꼴도 못 볼 테고,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렇게 갈 길을 가려고 했는데.

황녀가 대뜸 분수대 쪽으로 다가가 물 가까이 고개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저러다가 빠지는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황녀였다. 별 이상한 사건 사고에 휘말리는 주인공.

마음 같아서는 무시하고 싶은데, 저기서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싶어졌다. 만약 물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황제에게 보고될 가능성이 컸다.

‘아, 이 빌어먹을 엑스트라 인생.’

한숨을 내쉰 레이블라가 재빨리 황녀에게로 다가갔다. 인기척에도 황녀는 알아채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놀라지 않게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먼저 부르려고 했는데.

“왁!”

갑자기 황녀가 벌떡 일어나면서 돌아섰다. 깜짝 놀란 레이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들이켜자 그녀가 까르르 웃었다.

청량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랐어?”

“……네.”

진짜 놀랐다. 황녀가 이런 장난을 칠 거로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더더욱.

괜히 놀란 가슴을 쓸면서 다가가는데, 황녀가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빙그르르 돌았다.

그때 황녀가 휘청거리면서 그대로 몸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다급히 레이블라가 황녀에게 손을 뻗어 허공에 뜬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힘껏 당겼다.

다행히 황녀는 레이블라의 손에 끌려갔지만, 대신 레이블라는 황녀와 자리를 교체하듯 넘어지며 그대로 물에 빠져 버렸다.

“레이블라!”

“괜찮으세요?”

벌떡 일어난 레이블라가 즉시 황녀에게 물었다. 황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레이블라를 보며 끄덕였다. 레이블라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다.

“다친 곳은 없으시고요? 넘어지진 않으셨어요?”

“으, 응.”

“정말요? 제가 심하게 당겼는데 팔목은 어때요? 잠깐 제가 봐도 될까요, 전하?”

황녀가 얌전히 팔을 내밀자 레이블라의 시선이 꼼꼼하게 그녀의 손목을 훑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촘촘하게 살폈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모든 곳이 멀쩡했다. 그제야 레이블라의 입에서 안도가 흘러나왔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전하.”

“다행이야?”

“그럼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신 전하께 무슨 흠이라도 생겼을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진담이었다. 황녀가 넘어지려는 모습을 본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며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었다.

만약 그대로 넘어졌더라면, 물에 빠졌다면 어땠을지…….

물기를 터는 강아지처럼 부르르 몸서리를 치자 황녀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레이블라. 나는 네가 더 걱정스러워. 괜찮아?”

“저야 뭐 늘 괜…… 아.”

레이블라는 그제야 자신의 몸을 보았다. 물에 푹 젖어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춥지 않으세요? 제가 젖은 손으로 황녀 전하의 몸에 손을 대서…….”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는.”

“혹시 모르니까, 당장 들어가시는 게 좋겠어요.”

“그보다 레이블라가 빨리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감기 걸릴 거야.”

“아. 그럼 잠시 비켜 주세요. 물이 튈 수도 있으니까요.”

레이블라가 손짓으로 황녀를 밀어내자, 그녀가 멀찍이 떨어졌다. 혹시 물 한 방울이라도 튀지 않을까 염려하며 레이블라가 조심조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되는대로 옷을 구기며 물을 짜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녀가 중얼거렸다.

“역시. 레이블라는 내 우상이야.”

……응?

“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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