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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6)화 (26/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6화

벌써 너무 많이 울어서 처음보다 기력이 떨어진 것이 보였다. 이러다가는 엄마를 만나기 전에 픽 쓰러질지도 몰랐다.

“꼭 엄마가 찾으러 오실 거야. 걱정하지 마.”

“…….”

“그러니까 음, 언니가 엄마 오실 때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줄게.”

그래서 레이블라는 지난 황녀의 다과회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쏙 뺏었던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

레이블라가 한 손에 고이 쥐고 있던 황녀의 핀을 꺼내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에, 엄청 예쁘고 사랑스러운 공주님이 있었는데…….”

* * *

“그래서여?”

초롱초롱하게 눈을 뜬 아이가 레이블라를 향해 물었다. 아이의 곁에는 또 다른 낯선 소년이, 또 그 옆에는 또 다른 낯선 아이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주변에는 레이블라와 엄마를 잃은 아이 단 둘뿐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눈물을 그치며 웃고, 손뼉을 치기 시작하자 주변을 거닐던 동네 꼬마들이 하나둘씩 모이더니 후줄근한 옷을 입은, 아마도 구걸을 하며 지내는 듯한 거리의 아이들도 이곳에 몰려들었다.

그 뒤로 아이들의 부모로 보이는 이들도 멀찍이 서 있었다.

바글바글했다. 사람이. 마치 공연을 관람하는 것처럼.

이래도 되나?

‘펠리시티라는 거 들키면 이 사람들한테 밟히는 거 아닌가…….’

황녀의 보호를 받는 황궁에서조차 여전히 그녀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 존재했다. 바깥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레이블라는 혹시나 해서 머리를 매만졌다. 아직 머리카락 색은 갈색빛을 띠고 있었다.

‘언제 약효가 다할지 모르니 얼른 끝내야겠다.’

레이블라는 재빨리 자신이 펼쳐 놓은 동화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왕자님과 함께 돌아온 공주님은 왕자님의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해졌답니다!”

“와아아!”

이야기가 끝을 맺자 모두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이어 이야기를 곱씹던 아이들이 저마다 궁금증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얼굴에 점 찍고 돌아온 공주님은 행복해졌어여?”

“바보야! 처음 만났던 왕자님이 죽었으니까 행복하겠지! 그놈이 공주님을 죽이려고 했잖아.”

점점 모이는 사람들 때문에 당황해 이야기가 길어지고, 저도 모르게 막장 요소를 열심히 집어넣다 보니 이게 동화인지, 막장 드라마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탄생했지만, 어쨌든 모두가 즐거워해서 다행이었다.

기지개를 켜면서 고개를 돌리자, 처음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어 주었던 아이가 보였다. 곁에는 아이를 꼭 빼닮은 어른이 아이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사람들에 섞여서 대화하는 사이, 가족을 찾은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안도하면서, 혹시나 돌아왔을지도 모를 황녀를 찾았지만, 여전히 황녀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알아서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듯했다.

결심을 마친 레이블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디디려는데,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녀를 에워싼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그녀를 보면서 무언가를 더 기대하는 눈치였다. 함께 놀았으면 좋겠다고.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거절할까 싶었지만, 아직은 하늘에 해가 환히 떠 있었고, 조금은 더 여기서 시간을 보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때마침 어디선가 들려오는 선율도 있고.

“춤출까?”

레이블라가 작은 손을 내밀어 한 아이의 손을 맞잡자 아이들이 실을 엮은 것처럼 와르르 딸려 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이들과 레이블라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가득 피어났다.

* * *

“참, 신기한 사람이네요.”

멀찍이서 레이블라의 모습을 지켜보던 미셸이 작게 중얼거렸다. 곁에 선 황녀 또한 눈앞에 펼쳐진 훈훈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다과회에서도 그랬지만, 은근히 사람의 호의를 얻는 일에 능숙한 것 같아요.”

“그렇지? 레이블라는 참 대단해.”

조금 굳어 있나 싶던 황녀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순수한 호의를 드러냈다. 미셸은 그 모습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하. 그렇게 기뻐하실 일이 아니에요.”

“응? 왜?”

황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미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황녀를 보았다.

황녀는 언제 마주해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그 자리에 가만히만 있어도 사람들의 미소가 모이고, 행복이 고이게끔 했다.

거기다 영특하고 영민하니, 사랑해 마지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셸의 시선이 황녀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다과회에서도 그랬다고 들었다. 우는 귀족 아이들을 순식간에 달래고, 아이들의 미소를 얻어 냈다고.

미처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탓에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 눈앞의 광경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번지고, 함께 끼어들고 싶어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건, 참 위험했다.

“전하께서는 저 아이를 아끼시지요.”

“응, 대단하잖아.”

아무것도 모른 채 순진한 미소를 짓는 황녀를 보면서 미셸은 다짐했다.

이 세상을 아름답다고만 여기는 황녀를 지켜야겠다고.

“한 가지만 기억해 주세요. 전하. 태양은 언제나 하나뿐이어야 한다는 것을요.”

태양은 언제나 하나이기에 귀하다는 것을.

황녀가 잊지 말기를 바랐다.

* * *

“레이블라.”

“네. 전하.”

황녀의 부름에 레이블라가 답하며 고개를 들자, 창문 너머에서 황녀가 가만히 레이블라를 응시해 왔다. 수업하러 가던 길이었는지, 그녀의 품에는 두꺼운 책이 있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세요?”

레이블라가 묻자, 그녀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무것도 아니야.” 하면서 다시금 시선을 거두었다.

그대로 멀어지는 그녀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가 있었다.

‘……뭐지?’

축제에 다녀오고 수일이 지났다. 그때부터 황녀가 조금 이상했다.

‘내가 그날 뭔가 잘못했나?’

레이블라는 그날 일을 잠시 떠올렸다.

얼마간 아이들과 놀다가, 모두가 축제 분위기에 들떠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조심스럽게 빠져나와 수도 경비대에 자진 신고했었다.

소식을 들은 시녀 줄리아 햄프턴이 데리러 와 주었을 때, 레이블라는 자신이 궁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황녀에게 전해 달라고 청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녀가 돌아왔을 때 레이블라는 직접 사죄를 했다.

‘걱정했었어.’

‘죄송해요. 제가 실수로 전하를 놓치는 바람에…… 많이 걱정하셨어요?’

‘응. 하지만 괜찮아. 레이블라가 건강하게 돌아왔으니까. 이제 그만 쉬어.’

‘식사는요?’

‘글쎄. 밖에서 이것저것 먹고 와서 생각이 없네.’

그래도 혹시나 식사하거나 간식을 먹을 때가 있을지도 모르니 방에서 대기하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비켜 준 것이 마지막이었다.

황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끼던 핀도 그날 바로 돌려주었기에 큰 문제가 있지는 않았는데.

왠지 다음날부터 황녀의 태도가 조금 이상해졌다.

그녀를 대할 때의 눈빛이 이전과 조금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정확히 무어라 꼬집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비단 그것을 느낀 것이 당사자인 레이블라뿐만은 아니었는지, 다른 시녀들도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전처럼 시비를 거는 이는 없었지만, 다들 황녀를 따라 태도가 딱딱해졌다.

사실 이것이 더 익숙한 상황이었기에 속상하지는 않았으나 불안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정말 저도 모르는 사이에 크게 잘못해서 황녀의 눈 밖에 난 것이라면, 그래서 황제가 황녀 곁에서 쓸모를 다한 레이블라를 처리하라고 한다면.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하아, 레이블라가 한숨을 내쉬며 분홍색 머리칼을 배배 꼬았다.

* * *

“무슨 일인데.”

짙은 한숨 소리에 반응하듯 붉은 눈동자의 소년이 레이블라에게 물었다.

레이블라는 턱을 괸 채 무심하게 창 너머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왕의 여자들이 미쳐 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요.”

“……뭐?”

“들이댈 때는 언제고 이유도 없이 멀어지는데 왕이라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하니, 답답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하여튼 남자는 참하게 자기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을 만나야 해요.”

혼자 중얼대던 레이블라가 뒤늦게 아차, 싶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소년이 약간은 당황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레이블라가 눈을 깜빡이며 뻔뻔한 표정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다가 왠지 허탈해져서 픽 웃어 버렸다.

“오늘은 무엇을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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