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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5)화 (25/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5화

‘잘 어울리네.’

그녀가 바깥으로 나가겠다고 하자, 시종들이 황녀의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을 바꾸는 약을 가져왔다. 그래서 머리카락은 갈색이 되었고, 눈동자는 초록빛으로 변했다.

덩달아 레이블라의 머리카락 또한 갈색빛을 띠게 되었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너무나도 눈에 띈다는 시녀장의 제안 때문이었다.

“과일 사탕이래!”

소녀가 살랑살랑 흔드는 막대기 끝에 달린 투명한 사탕 속에는 과일이 들어 있었다.

“맛있어. 얼른 먹어 봐.”

귤이 든 사탕을 입에 넣으며 황녀가 해맑게 웃었다. 레이블라는 시식도 거치지 않은 음식을 입에 넣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황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다른 손에 쥐고 있는 과일 사탕을 내밀며 흔들었다. 레이블라는 감사하다고 말하며 사탕을 받아 들었다.

“도나와 미셸 영애는 조금 있다가 도착한다고 하니까, 저기 저 공연 보고 있을까?”

황녀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어느 서커스 공연장을 향했다.

‘차라리 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낫긴 하겠지.’

레이블라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신이 난 황녀가 앞으로 나아갔다.

레이블라가 이끌리듯 따라가려던 그때. 황녀가 누군가와 스치듯 부딪치면서 머리에 꽂혀 있던 꽃 모양 핀이 바닥에 떨어졌다.

황녀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신이 난 걸음을 바삐 놀렸다.

꽃 모양 핀은 황녀가 생일 때 도나에게 받은 선물이라고 했다. 무척 소중히 여기는 터라, 늘 도나와 만날 때만 하는 핀이라고 했었다.

레이블라는 기사들이 황녀를 따라가는 것을 확인하고 즉시 바닥의 핀을 주웠다.

그리고 황녀를 뒤따라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서커스가 열리던 장소에서 인파가 쏟아지듯 나왔다.

레이블라는 사람들 틈새로 파고들며 황녀에게 다가가고자 했지만, 기사들이 관람객들을 내쫓기라도 한 건지 다들 다급히 움직이는 통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 지나 인파가 흩어지는 것을 지켜본 후에야, 레이블라는 서커스가 진행되는 막사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내부는 한산했기에 레이블라는 쉽게 황녀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 있지?’

아무리 둘러봐도 황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황녀 주변을 맴돌고 있을 기사들 또한 보이지 않았다.

‘설마, 납치당한 건 아니겠지?’

아니다. 납치를 당했다면 기사들이 우르르 뛰쳐 나와서 황녀를 찾기 위해 돌아다닐 테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럼 그사이에 다른 곳에 간 걸까?’

아무 말도 없이 다른 곳에 간다고?

설마, 버리고 간 건가?

‘아니야. 황녀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

버릴 거면 수도 중심이 아니라 오지 산간에 갖다 버리는 게 더 확실했다.

‘그럼 인파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웠거나, 내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갔거나 둘 중 하나겠네.’

사람이 많아서 위험할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잠시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이곳에서 우연히 다른 영애를 만났고, 거기에 신경이 쏠려서 시녀 하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둘 중 무슨 이유이든 간에 황녀와 떨어졌다는 사실만이 선연했다.

……어떡하지?

‘내가 미아가 되어 버렸네?’

그것도 황녀가 아끼고 아끼는 핀만 달랑 들고서.

이 상황, 괜찮은 거 맞겠지?

‘……돌아가야 할까?’

일단 더 찾아다녀 볼까 생각했지만, 작디작은 어린아이의 몸으로 헤집고 다녀 봤자 인파에 또 쓸려갈 것 같았다.

‘황녀 성격이라면 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찾으러 올지도 몰라.’

많은 인파 때문에, 안전을 위해 잠시 물러났던 것이라면 곧, 서커스를 보기 위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듯했다. 혹은 시녀 하나를 잊어버린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고 해도, 마지막으로 서로를 본 장소이니 이곳을 찾을 터였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조금 기다려 보기로 했다.

공연장의 문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은 레이블라는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다들 행복해 보이네.’

부모의 손을 잡고 다니는 아이들도, 부모의 품에 안긴 아이들도.

깍지 낀 손을 흔들며 지나다니는 연인들과 사람들로 붐비는 가판대에서 물건을 팔며 웃는 상인들.

행복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다.

‘이렇게 보니 이 세상에서 정말 나만 동떨어진 것 같네.’

찾아 주는 사람도, 함께 걸을 사람도 없는 인생이라니.

‘보이지는 않지만 힘든 사람이 많기는 할 거야.’

어딘가에는 외롭고 쓸쓸하게, 힘겹고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도 분명 존재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의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 보이니, 이 세상에서 나 홀로 불행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행복이 뭐 별건가?’

멸문당하며 부모님을 모두 잃었을 때만 해도, 세상이 끝난 줄로만 알았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아무 의미가 없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즐거운 일이 제법 생겼다.

하늘이 화창하게 맑은 날. 커다란 나무 아래 앉아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쪽잠을 자는 것도 즐거웠고,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귀퉁이에 앉아 정원수에서 몰래 따 온 과일을 씹으며 달콤함을 느낄 때도 꽤 행복했었다.

붉은 눈의 소년과 만나 대화를 나눌 때도 절로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앞으로는 더 행복해질 거지만.’

지금보다 열 배, 스무 배 행복해져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저를 부러워할 날이 분명 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힘이 솟았다. 미소가 입가에 스며들었다.

‘황녀는 언제 오려나.’

빨리 찾으러 왔으면 좋겠다.

* * *

‘……정말 날 완전히 잊어버렸나.’

그렇지 않고서야 한 시간이 가깝도록 기다려도 소식이 없을 리 없었다.

기사들도, 함께 나온 시녀도. 황녀도. ‘레이블라’라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 존재감이 이렇게 없었나.’

하긴. 생각해 보면 황궁에서 돌아다닐 때도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레이블라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 이름 한 줄 등장하지 않으니, 존재감마저 흐린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야. 다른 곳에 너무 정신이 팔려서 모를 수도 있어.’

진짜로 영애들을 만났거나, 또 재미있는 것을 찾아서 온 정신이 쏠려서 잊어버렸을지도.

‘엄마 기다리는 미아 같네.’

곁에서 우는 저 아이처럼.

레이블라의 시선이 제 옆에 앉은 작은 아이에게로 향했다.

조금 전 울면서 나타난 네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아이가 울면서 다가왔을 때만 해도 금세 부모가 그녀를 찾으러 올 줄 알았었다. 괜히 다가갔다가 울렸다는 오해라도 받을까 싶어서 가만히 두고 보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부모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훌쩍훌쩍 울기만 했다.

그 탓에 슬슬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고 있었다.

동생 관리 안 하냐고.

시끄러우니 얼른 달래라고.

억울한 누명에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으나, 사실 레이블라 또한 신경 쓰인 터였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엄마 잃어버렸어?”

하고.

내내 훌쩍이던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아이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행동하더라?’

일단 아이가 사라졌단 걸 알아차리면 놀라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면서 아이 이름을 부를 것이다. 여기저기 헤집으면서 아이를 찾기도 할 테고, 그러다가 수도 경비대를 찾을 것이 틀림없었다.

‘경비대로 데려다주면 되겠네.’

생각을 마친 레이블라가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 찾으러 갈까? 저쪽에 가면 수도 경비대 기사 아저씨들이 있어. 그쪽에 있으면 엄마가 찾으러 올 거야.”

“……어, 엄마가 가만히 있으랬어. 꼭, 찾으러 온다구.”

“엄마가 엄마랑 헤어지면 그 자리에 있으라고 했어? 꼭 찾으러 온다고?”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쫓아오지 말라는 시그널 아닌가.’

꼭 애 버릴 때 보면 그러던데…….

조금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아이의 행색을 보니 눈물로 꾀죄죄해진 얼굴을 제외하면 정성스럽게 땋은 머리에 손톱이나 입술, 외부로 드러난 몸은 깨끗했다.

부모의 애정 어린 손길이 닿은 아이임이 틀림없었다.

혹시 이 주변에 산다면, 부모의 얼굴이나 이름을 물어서 찾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엄마는 어떻게 생겼어?”

“엄마처럼…….”

“……그래, 엄마처럼 생겼구나. 아빠는 아빠처럼 생겼고?”

아이의 고개가 까딱였다.

“엄마, 아빠 이름은?”

아이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일생에 둘도 없는 위기에 빠진 터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냥 기다리는 게 낫겠다.’

조금 더 기다리다가 오지 않으면, 아이와 함께 경비대로 가는 편이 좋을 듯했다.

하지만 그전에 아이의 눈물을 그치게 할 필요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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