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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4)화 (24/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4화

    ‘진짜 조용히 있어야지.’

    그래도 펠리시티처럼 멸문하지 않은 게 어디일까. 울컥하는 마음을 삼킨 레이블라는 이미 망해 버린 브라운가의 영애에게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빠르게 시식을 끝내고자 얼른 다른 디저트를 입에 넣었다.

    “아, 참. 비체라발리 소공자에 관한 소식을 들었어요.”

    미셸의 이야기에 황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정말이냐는 듯 묻는 눈빛에 미셸이 끄덕였다.

    “전하께서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 조금 알아봤어요. 다행히 최근에 루빈디시 영지를 다녀온 사람이 있어서 어렵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지낸대?”

    “잘 지낸다고 들었어요. 성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받은 소식이니 거짓은 아닐 거예요.”

    “아픈 곳은 없고?”

    “네, 몸도 건강하시고 수업도 잘 듣고 계신다고 했어요. 최근에는 영지 경영에 대해 배우는지, 황립 학교에서 근무하던 교수가 종종 드나든다고 들었어요.”

    “그렇구나…….”

    그제야 황녀가 안도하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고 웃었다. 미셸은 그런 황녀가 귀여운 듯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곧 윗사람을 함부로 귀여워하는 것도 무례라는 것을 깨닫고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루빈디시도 최근 활발해졌다고 해요. 전쟁에 나갔던 이들이 다 돌아와서인지 사람들도 넘친다고요.”

    “하지만 곧 다시 다들 전쟁에 나서지 않을까요? 아버지께서 비체라발리 공작님이 출정하신다고 말씀하신 것 같아서…….”

    “저도 들었어요. 그 이야기.”

    미셸이 도나의 말에 수긍하며 덧붙였다.

    “저택 사용인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비체라발리 공작님께서 이번 전쟁에 출정하라는 명을 거부하신다는 이야기에 민심이 좋지 않았어요.”

    “왜 거부하시는 걸까요. 비체라발리 공작님께서는 무패의 기사라고 들었는데…….”

    “이번에 전쟁을 일으킨 연합국 중에는 황녀 전하를 모욕한 나라도 있어요. 공작께서 황녀 전하를 생각하신다면 반드시 출전하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희 저택 사용인들이 모두 저와 같은 생각이에요.”

    “다들 황녀 전하를 사랑하신다는 이야기지요? 저희 저택도 그래요. 저희 사용인들도 모두 황녀 전하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초롱초롱해져요. 오늘도 뵈러 간다고 했더니 평소보다 힘내 주더라고요.”

    “다들 나를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너무 기뻐.”

    황녀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세 소녀가 서로를 보면서 키득키득 웃는데, 모두 무척이나 즐거운 얼굴이었다.

    레이블라는 이제 자신이 빠져 주어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멀리서 돌아본 세 소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 * *

    ‘물고기가 신기하기는 하네.’

    레이블라가 빼꼼히 들여다본 호수 안에는 무지갯빛을 내는 커다란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세 소녀가 아름답다고 연신 말하던 물고기가 이것인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자 아까 소녀들이 타고 놀던 놀잇배도 보였다. 황제가 뱃놀이를 즐기는 딸을 위해 만든 배는 무척이나 귀하고 튼튼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뱃놀이를 할 때의 황녀는 단순히 호수가 아닌 자기 아빠의 넘치는 사랑 속에서 노니는 것처럼 여겨졌다.

    ‘내 이야기에도 그렇게 반응했겠지.’

    레이블라는 조금 전, 세 소녀가 말하던 ‘브라운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무렇지 않게 망하는 게 당연하다며, 웃던 아이들의 모습.

    아마 펠리시티가 멸문한 일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은 이야깃거리였을 것이다. 황녀를 향한 황제의 애정 표현을 사사건건 방해해 온 데다, 황녀에게 반발했으니 사라져야 마땅하다고.

    “이 호수가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면 좋을 텐데.”

    씁쓸한 마음을 솔솔 부는 바람에 흩날려 보내며 레이블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다가와 레이블라의 어깨를 톡, 쳤다.

    고개를 돌리자, 황녀가 서 있었다. 뒤로는 도나와 미셸이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레이블라. 미안해.”

    ……응?

    갑작스러운 사과에 레이블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이 전쟁에 나갈지도 모른다고 하니 심란해진 거지?”

    으응?

    “아니에요! 비체라발리 공작님과는 아무런 연이 없어요. 이전에 도움을 한 번 주셔서 감사 인사드린 게 전부예요.”

    레이블라는 즉시 변명했다. 작은 오해라도 남겨 두어선 안 될 것 같단 판단에서였다.

    “앞으로도 아마 공작님을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 저랑 상관없으니까요.”

    냉정하게 선을 긋듯 말하자, 황녀가 그제야 아, 하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비체라발리와 펠리시티는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못했지.”

    펠리시티와 비체라발리는 가문의 성향상 태양과 달처럼 동시에 뜰 수 없는 관계였다. 건국 이래로 펠리시티는 황실의 방만을 저지하는 가문으로, 늘 황실과 적대해 왔지만, 비체라발리는 황제파의 중심이었다.

    그렇다고 비체라발리가 황실에 충성을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제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주인인 황제의 목도 물어 버릴 만큼 제멋대로였고 나쁜 일에도 서슴없이 손을 벌렸다.

    족으로서의 명예를 중시하는 펠리시티와는 섞일 수 없었다. 물과 기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레이블라가 두 가문의 사이를 운운하는 황녀의 말에 동의하듯 끄덕이자, 가만히 보던 황녀가 레이블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만큼이나 작은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 게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라서 레이블라가 어색하게 웃자, 황녀가 함께 웃었다.

    “레이블라, 축제에 갈래?”

    “축제요?”

    “응. 며칠 뒤에 영애들과 같이 가기로 했는데, 레이블라도 같이 가자.”

    아니, 여주인공과 함께 축제라니.

    납치 사건이 일어나거나 양아치들에게 시비가 걸리기 딱 좋은 장소잖아?

    스멀스멀 밀려드는 거부감에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황녀의 눈이 너무나도 초롱초롱했다.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게다가 뒤쪽에서는 도나와 미셸이 두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아니, 아니었다. 곁을 지키는 시녀들 모두가 부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기쁜 듯이 양손을 잡으며 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황녀가 활짝 미소 지었다.

    동시에 쿵, 소리가 났다.

    돌아보자, 레이블라가 선 반대편 호수의 가장자리가 커다란 삽으로 파낸 것처럼 무너져 있었다.

    산사태라도 난 것처럼 흙이 미끄러지듯 물속으로 흘러내리고, 흙이 사라지며 빈자리로 물이 쪼르륵 흘러들었다.

    마치, 앞으로 일어날 불길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 * *

    보통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축제 에피소드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남주를 만나서 사건·사고에 휘말리거나.

    혼자서 사건·사고에 휘말리거나.

    그러니 레이블라로서는 황녀가 축제에 참여하는 것을 말리고 싶었다. 만약 축제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가는 그 무시무시한 황제에 의해 목이 달아날 것이다.

    하지만 황녀는 친구와 함께하는 축제에 대한 기대감으로 매일같이 설레어했고, 레이블라는 그 설렘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지금이라도 축제에 참가하지 않는 방안도 고려해 보았으나, 혼자 빠져 봤자…….

    ‘왜 황녀를 말리지 않았지?’

    라면서 책잡힐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매한가지니, 차라리 황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눈치껏 막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따라왔는데.

    ‘……피곤하다.’

    잔뜩 긴장한 탓인지 시작부터 지쳤다.

    반면에 황녀는 무척이나 신이 난 상태였다. 분홍색 로브를 쓰고 뽀작뽀작 걸어 다니면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이였다.

    어찌나 활발하게 움직이는지 동행한 기사 두 명이 황녀의 행동반경을 모두 통제하느라, 잔뜩 예민해진 것이 보일 정도라고 해야 하나.

    ‘뭐, 단둘만 온 건 아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보이지 않는 곳곳에 정말로 많은 기사가 숨어 있었다. 소설에서도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기사들이 있다고 언급되었기에 레이블라는 금방 알아차렸다.

    그들은 황녀의 동심을 지켜 주기 위함인지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며 황녀의 동선에 맞춰 길을 터 주었다.

    그 덕에 황녀는 인파에 치이지 않고 편안히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황녀는 못 알아챈 듯했지만.

    이럴 때 보면 둔한 건지, 순진한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레이블라. 이거 먹어 봤어?”

    벌써 꼬치를 세 개나 먹고, 솜사탕 하나도 말끔하게 처리한 황녀가 레이블라를 향해 막대기를 내밀었다.

    기대감 어린 눈동자의 색은 녹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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