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3화
“좋…….”
레이블라는 평소처럼 “좋아서!”라고 무심결에 답하려다가, 멈칫하고 말을 골랐다. 이제 대공 전하라는 사실을 안다고 말했었으니 말투를 달리해야 했다.
“그냥, 좋아서요.”
레이블라의 대답에 그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그래, 이상하기야 하겠지. 싸늘하게 대해도 마냥 좋다고 웃는 애가 또 어디에 있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웃음이 나서 다시 미소를 그리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긴. 이런 곳에 계속 찾아오는 사람이 제정신일 리가 없지.”
귀찮게.
그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그 말에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몇 번이나 찾아왔는데 단 한 번도 그녀를 쫓아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뿐인가. 옆에서 뭐라고 재잘거려도 그저 가만히 듣기만 하고. 얼마 전에는 이제 가야겠다는 말에 슬쩍 따라와 배웅한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오든 말든, 곁에서 떠들든 말든 멍하니 땅만 보고 있더니 큰 변화였다.
‘조금 가까워진 걸까?’
그렇다면 좋을 텐데.
이곳을 다시 찾아오는 데 있어 고민이 없던 것은 아니다. ‘너도 행복해질 거야.’라고 자신 있게 떠들어 댔지만 그러려면 황제를 상대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녀가 이곳을 찾는 게 되레 그에게 큰 부담이나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존재가 잘못 삼킨 가시처럼 자꾸만 목 언저리를 콕콕 찔렀다.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사람인데, 그 황폐한 궁에 혼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고민 끝에 다시 찾아왔다. 뻔뻔하게 얼굴을 내밀고 그에게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네었다.
의심하는 눈빛을 받으면서도,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잔뜩 세운 채 예민하게 구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곁을 지켰다.
마치, 아무도 돕지 않았던 과거의 ‘레이블라 펠리시티’ 같아서.
비체라발리 공작의 호의에 살아갈 의지를 얻었듯이, 그 마음을 전해 주고 싶었다.
물론, 이전처럼 모두의 미움만 받고 있는 상황이었더라면, 이곳을 찾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블라는 황녀와 친해졌고, 그에게 큰 걸림돌이 되지 않으리라고 여겼기에 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이 만남이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있고, 보고가 되는 상황이기는 했다.
너는 알까?
이곳에 오기까지 레이블라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소년은 모를 것이다.
“오늘은 무엇을 하셨어요?”
질문을 받은 레이블라를 무덤덤한 표정으로 보았다. 이런 곳에서 무슨 할 것이 있겠느냐는 듯이. 이에 레이블라가 신나서 답했다.
“그런 대공님을 위해 제가 책을 가져왔지요. 짜잔!”
레이블라는 품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흥미 없다는 눈길로 책 표지를 흘겨보았다.
“또 여행 가는 책이야?”
“재미있잖아요. 드넓은 바다! 볼을 스치는 산뜻한 바람!”
“짠 내 나는 바람이겠지.”
“짜도 시원한 바람일 거예요! 제 말이 맞는지 나중에 꼭 확인해 보세요. 아셨죠?”
레이블라가 대뜸 그에게 책을 안겨 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없어서 심심할 때는 저기 맞은편 방 책장으로 가 보세요. 그 방 책장 두 번째 칸에 제가 재미있는 책만 모아 두었어요.”
“다 이따위 것이겠지.”
“그렇긴 하지만요.”
레이블라는 소년이 그 책장에 한 번쯤 가 주기를 바랐다.
황량한 궁 안에서 무력하게 죽임당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소년이 희망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웃음 날 만한 이야기를 모아 두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그 책들 사이에 레이블라는 쪽지를 하나 넣어 두었다. 아이가 만약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면 도움이 될 수 있게끔.
‘지금이라도 당장 알려 주고 싶기는 하지만…….’
바로 알려 줄 수가 없었다. 지금의 소년이라면 어떤 정보를 주든 필요 없다 여길 것이다.
생을 향한 욕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지금도 그랬다.
잠시 관심을 주기는 했지만, 금세 저렇게 고개를 돌려 밖을 보았다.
항상 같은 창가에 앉아서 어딘가를 바라보는데, 그 시선이 가는 방향이 명확하지 않았고, 어떤 생각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늘 한참이나 있었다.
그 모습은 다 타 버린 재처럼 보이기도 했고, 바람 불면 훅 꺼져 버릴 촛불처럼 보이기도 했다.
위태위태해서 보고 있는 자신이 더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스스로의 힘으로 발견해 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믿어 주었으면 했다.
소년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앞으로 10년 가까이 이어지는 제국과 페릴세테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의 전쟁에 참전하는 길뿐이라는 것을.
* * *
오랜만에 황궁이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황녀의 기지로 가족을 되찾게 된 도나 재클린, 그리고.
“물고기가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한낱 미물일 뿐이에요. 아름다움과 패션 감각에 있어선 황녀 전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요.”
새초롬하게 말하는 화려한 외모의 소녀는 미셸 탈리아였다. 도나 재클린과 같은 후작가의 영애로 올해 열셋이 되었는데 황녀의 패션 감각에 반해 그녀를 추종하게 된 영원한 아군이었다.
황녀의 초대를 받아 황궁에 온 두 사람은 황녀와 함께 정령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황궁의 호수에서 뱃놀이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었다.
그다음 웃음으로 쏟아 낸 에너지를 보충하고자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물론 전하의 발끝에도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정령의 축복을 받은 물에서 사는 물고기라 그런지 무척 신비로웠어요.”
“그건 그래요. 영롱하기는 하더군요.”
“정령이 키웠다는 축복의 나무도 궁금해요. 저 물고기만큼이나 신비로울까요?”
“루빈디시에 있는 나무 말이지? 그거 나도 궁금해! 조만간 가 보려고. 다녀오면 내가 이야기해 줄게.”
황녀의 이야기에 도나가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며 혹시 가능하면 저도 꼭 데려가 달라고 하며 키득거렸다.
“그대가 레이블라인가요?”
한창 황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미셸이 황녀의 곁에 서 있던 레이블라를 향해 물었다.
갑작스러운 관심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시식하고 있던 레이블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대에 대해서는 황녀 전하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영민하시다구요.”
흐음, 하면서 훑어보는 눈길이 면접관처럼 깐깐했다. 음식을 씹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때, 곁에 있던 도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도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다과회에서도 봤고요.”
“저는 그때 참석을 하지 못했지만, 그대가 활약했다는 소식은 황녀 전하께 전해 들었어요. 그리고 도나 영애도 계속해서 이야기했고요.”
미셸의 이야기에 도나가 수줍게 양 볼을 물들였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었다.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게 부러워서…… 그때 저는 전하께 폐만 끼쳤으니까요.”
도나는 다과회 당일, 브라운가의 영애와 있었던 마찰을 떠올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자기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게 굴던 미셸이 새침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좀 더 당당하게 행동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요? 그런 거에게 책잡히면 후작가의 명예가 떨어져요.”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저보다 어린 도나를 향한 눈빛에는 질책보다는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브라운가가 영지로 돌아가서 아쉬워요. 그게 아니었다면 제가 복수를 했을 텐데 말이지요.”
그날 이후 브라운가의 사업이 폭삭 망한 것이 이유라고 했다. 주변에 손을 내밀어 보려고 했지만, 황녀와 척을 진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폐하께서 전하를 많이 아끼셔서 다행이에요.”
“역시, 아빠가 한 것 같아?”
“그렇게 단기간에 큰 사업체를 망가뜨릴 수 있는 사람이 이 제국에 또 누가 있겠어요?”
“……아빠도, 차암.”
포옥 한숨을 내쉬면서 내가 못 살아, 하고 중얼거리는 황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빠의 사랑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이 그리 싫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 황녀의 미소를 보는 이들의 얼굴에도 흐뭇한 기색이 묻어났다. 아껴 주고 싶단 마음이 뭉클 샘솟는 사랑스러운 자태에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로 훈훈한 분위기였다.
단 한 사람, 시식하느라 자리를 지키고 있던 레이블라를 제외하고는.
‘얘들 진짜 무섭네.’
분명 분위기는 훈훈한 꽃밭인데, 대화 내용이 참으로 파격적이었다.
이게 정녕 일곱 살, 열 살, 열세 살이 할 이야기인가.
순진한 얼굴들로 사람 하나 담갔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바로 앞에서 보고 있자니, 아이들이 마냥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무척 무서운 아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