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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2)화 (22/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2화

    황녀의 물음에 라니엘이 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무서운 얼굴로 모두에게 잡아내라고 엄명을 내리셨으니 곧 잡힐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니엘의 말처럼 황녀의 주변에서 연이어 발견된 독으로 인해 황제의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범인은 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정체는 2부에서나 나올 테니 말이다.

    ‘이제 독이 발견되지 않을 거고.’

    10년 후에 잡힌 범인들은 과거의 일은 테스트에 불과하고 목표는 황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였다고 자백했었다.

    황제가 황녀에게 정이 들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죽여야 가장 타격이 크기 때문에 기다렸다고.

    황제가 자신들처럼 가족을 잃은 슬픔을 느껴 보게 하고 싶어서 일을 꾸몄다고 했었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이 독이 겨냥하는 상대는 황녀가 아니라, 황제였다.

    “나는 괜찮아. 다만 레이블라가 자꾸 위험해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야.”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번에도 괜찮았는걸요.”

    레이블라가 씩씩하게 말했다. 황녀는 레이블라를 동생 보듯 대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레이블라가 건강해져서 다행이야.”

    “네. 저도 건강해져서 황녀 전하를 도울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입에 발린 소리를 하자, 황녀가 기쁜 듯이 웃었다.

    “레이블라는 말을 정말 예쁘게 해.”

    “말뿐 아니라 모두 진심이에요. 제가 지금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전하의 따사로운 마음 덕분인걸요!”

    “그렇게 생각해?”

    “그럼요. 전하께서 저에게 잘해 주시니까, 그 기쁨이 온몸으로 드러나나 봐요. 저 행복해 보이지 않나요?”

    그리 물으며 평소보다도 생글생글 미소 지어 보였다.

    “응. 잘 지내는 것 같아서 기뻐. 다른 사람들이랑도 친하게 지내는 거 같고.”

    ……친한가?

    레이블라는 황녀가 오해할 만한 일이 있었나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황녀궁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었다. 이전에는 시식을 위해 음식을 건네거나 가까이 다가올 때 불쾌해하는 기분이 팍팍 풍겼었는데, 요즈음은 손길이 조금 다정해진 것 같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눈빛만으로도 욕을 한 사발 쏟아붓던 시녀들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진 것 같기도 하고.

    이전에는 백 명이면 백 명 모두 저를 두고 욕했다면, 지금은 백 명 중 삼, 사십 정도?

    거기다 최근 황녀가 먹는 음식에 들어갈 식재료 검사를 위해 조리실로 갔을 때, 요리장이 따로 먹을 것을 챙겨 주기도 했다.

    ……찝찝해서 먹지는 않았지만.

    ‘어제 청소 담당 시녀들도 이상했지.’

    해독을 하고 일어난 다음 날,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방을 청소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시녀들이 들이닥쳤었다. 보통 이럴 때면 눈치껏 비켜 줘야 해서 잠시 자리를 벗어났다가 돌아왔는데.

    놀랍게도 청소가 말끔히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자기들이 하고 싶었나 보다, 했는데. 두 번, 세 번 이어지니 건강을 신경 써 주는 건가? 싶기는 했었다.

    ‘내가 이제 완벽한 조연이 되어 버린 건가.’

    어쩐지 복잡한 심경이 되었지만, 레이블라는 마냥 감사하다는 듯 웃었다. 활짝, 밝은 표정으로 황녀에게 말했다.

    “제가 누리는 기쁨은 모두 황녀 전하께서 저를 신경 써 주셨기 때문이에요!”

    “아니야. 레이블라가 모두와 잘 지내게 된 건, 다들 마음씨가 착해서지. 괴롭히는 사람은 없지?”

    당연히 아직도 있었다.

    처음보다는 확실히 덜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나가면서 펠리시티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독이 든 음식을 먹었을 때도 차라리 그때 죽지 그랬냐며 저주를 퍼붓거나, 되레 범인으로 의심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레이블라는 그 일들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그저 힘차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역시나, 황녀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그렇지? 다들 착하고 좋은 사람이니까.”

    “맞아요. 모두 친절하고, 다정하세요.”

    그게 주인공이 보는 세상이겠지.

    솔직히 레이블라로서는 저를 괴롭히는 수많은 사람보다 황녀가 이상했다.

    어째서 이 아이는 자신에게 이토록 친절하게 구는 걸까.

    ‘주인공이라서 그런가?’

    ‘햇살 여주’이니 주변에 있는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투철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혹시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이야기해! 내가 혼내 줄게.”

    “말씀만으로 감사드려요.”

    “아니야. 레이블라가 요즈음 내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데.”

    황녀는 활짝 펼친 다섯 손가락 중 하나를 접으며 말했다.

    “오늘도 레이블라 덕분에 헤스키 스승님께서 주신 과제도 무사히 마쳤어. 그리고 이틀 전에는 아빠가 내주신 질문에 대한 답도 드렸어. 또…… 아! 다과회도 성공적이었고 그리고, 그리고…….”

    다섯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다 못해 열 손가락 모두를 접은 황녀가 다시 그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하나하나 듣고 있자니 새삼 황궁에 온 뒤 시간이 제법 흘렀음을 깨달았다.

    ‘벌써 석 달쯤 지났나?’

    처음 왔을 때만 해도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고, 들숨과 날숨을 따라 장미 가시가 드나들며 폐부를 찌르는 기분이었다.

    지친 나머지 밤이 되면 내일 아침이 오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천국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현 상황에 안주할 생각은 없지만.

    “전하. 간식 시간이에요.”

    노크 소리와 함께 황녀의 음식을 담당하는 시녀, 줄리아 햄프턴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블라는 재빨리 청소 도구를 정리하고 깨끗한 물수건에 손을 닦아 내었다. 그리고 황녀의 곁으로 다가가는데,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기자기하게 예쁜 디저트 동산 끄트머리에 웬 투박한 과일이 하나 덜렁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손질되지 않은, 바로 따서 가져온 듯한 과일이었다.

    “이게 뭐야?”

    황녀가 묻자, 줄리아가 아, 하고 답했다.

    “아. 이건 저 아이 것이에요. 따로 빼 둔다는 것을 그냥 들고 와 버렸어요. 송구합니다.”

    “레이블라 거야?”

    “예. 저 아이 식사예요.”

    레이블라는 자신의 식사라는 말에 놀라 그녀를 보았다. 황녀 또한 시녀의 말이 의아했는지 되물었다.

    “레이블라 식사가 왜 과일이야?”

    “저 아이가 아침을 못 먹은 것 같다고 해서…….”

    “시식했잖아? 게다가 나도 챙겨 줬는걸.”

    “그래도 그게…… 시식가들은 가끔 그렇더라고요. 가끔 음식이 몸에 받지 않을 때가 있어요.”

    “레이블라, 정말이야?”

    걱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황녀를 향해 레이블라가 해맑은 미소를 보였다.

    “보시다시피 멀쩡해요.”

    그리고 줄리아를 향해 말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블라가 꾸벅 인사하면서 그녀가 내미는 과일을 받아 들었다.

    시식에 들어가기 전, 먼저 한입 베어 물었다. 신맛이 전혀 없는, 달기만 한 과일이었다.

    ‘……이 과일에 뭔가 한 건 아니겠지?’

    살짝 고개를 들어 살피니 새침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응시하는 줄리아 시녀의 얼굴이 어딘가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지?

    황녀가 그런 줄리아와 레이블라를 번갈아 보고 배시시 웃었다.

    “역시, 레이블라가 모두와 친해져서 다행이야.”

    * * *

    레이블라는 황녀의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부정했지만, 다시 한번 살펴보니 정말로 사람들의 태도가 유순해졌음을 깨달았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레이블라는 이 또한 황녀의 영향력이라고 생각했다. 황녀가 시식가에게 잘해 주니, 황녀를 따르는 사람들 또한 ‘황녀에게도 다 뜻이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믿고 따라 주는 것이라고.

    그래서 혹시 ‘주인공을 적대하는 엑스트라’로서 지니고 있던 데드 플래그가 사라진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네가 누구 때문에 그 목숨을 지키고 있는지 잊지 말도록.’

    살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하던 황제를 생각하자, 잠시나마 부풀었던 기대가 푹 꺼졌다.

    지금이야 해독초가 있어서 숨통이 트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식가는 죽음과 맞닿아 있는 자리였고, ‘펠리시티’인 이상 사소한 잘못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태도가 변한 게 사실일지언정, 황녀의 마음에 따라 갈대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언제든지 바뀔 호의라니 마냥 달갑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갑갑한 마음에 포옥,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자 숨소리에 반응하듯 차디찬 붉은빛 눈동자가 레이블라를 응시해 왔다.

    이상하게도 그 냉랭한 반응에 웃음이 나왔다.

    역시, 이런 느낌이 좋다고.

    이곳에 오니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리고 입가에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왜 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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