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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1)화 (21/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1화

    그리고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짙은 체념,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보이던 모습이 몹시 신경 쓰였다.

    “나는 레이블라야.”

    그래서 뒤늦게나마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 이보다 더 어릴 적부터 갇힌 채 살며 사람과 섞인 적이 없었을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금은 편해질 수 있도록.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해. 전에 살던 집에 책이 많았거든. 모험가가 쓴 전기도 좋았고, 역사 이야기도 재미있었어. 사전도 즐겨 읽었어. 만약 다음에 오게 되면 식물학 사전을 빌려줄게. 그거 정말 재밌었거든. 도움도 많이 되었고.”

    “…….”

    “케빈슨이 쓴 모험록이 있는데, 그걸 보면서 나는 크면 여행을 다닐 거라고 다짐했었어. 커다란 배를 타고, 세상을 돌아보는 거야. 푸른 물결을 보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거지. 어때? 멋지지 않아?”

    “……그럼 뭐 해. 넌 나가지도 못 하잖아.”

    레이블라가 떠드는 내내 관심 없다는 양 잠자코 있던 소년이 시답잖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작게 비아냥거렸다. 그 반응에 레이블라는 곧바로 맞받아쳤다.

    “왜? 나 나갈 건데?”

    아, 하고 짧게 내뱉은 레이블라가 덧붙였다.

    “물론 황녀 전하께 쓰임이 다하면 말이지.”

    그들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을지 모르는 누군가에게 어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될 것 같아?”

    “당연하지. 나는 레이블라인걸.”

    “네가, 너인 게 뭐?”

    “나를 믿는다는 거지. 나는 자신이 있거든. 내 미래는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더 기쁜 일만 있을 거라는 자신.”

    레이블라가 씩 웃으면서 그를 보았다. 내내 무표정했던 소년의 눈망울이 일순 흔들렸다.

    “너도 행복해질 거야.”

    이 이야기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소년에게 무책임한 말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행복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레이블라가 속삭였다.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 조금만 나를 믿어 주었으면 좋을 텐데.

    레이블라는 주머니 속에 차마 꺼내지 못한 쪽지를 떠올리며 그에게 다시 말했다.

    꼭, 행복해질 거라고.

    * * *

    오늘도 황녀궁은 떠들썩했다.

    “정말로 이건 역사적인 발견입니다!”

    고지식하게 생긴 사내가 안경을 추켜세우며 감탄사를 연달아 토해 냈다. 얼굴은 붉게 상기된 채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이건 천재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생각입니다. 황녀님이 10년, 아니 100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천재라니…….”

    사내의 초롱초롱한 눈이 자그마한 아이에게로 향했다. 붉은 눈을 지닌 소녀가 수줍게 웃었다.

    “과찬이세요, 스승님.”

    “과찬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이건 100여 년간 아무도 풀지 못한 난제였단 말입니다. 그걸 이렇게 완벽하게 풀어내신 거라고요!”

    스승님으로 불린, 사내. 데릭 헤스키가 황녀의 말에 격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이 사실을 학계에 공표하고 싶은데,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 발견자의 이름은 당연히 황녀 전하가 될 것입니다.”

    “스승님께서 좋으시면, 저도 좋아요.”

    “저야 당연히 영광이지요. 이런 대발견을 제가 발표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껏 들뜬 목소리로 당장에라도 위대한 발견을 털어놓고 싶어 하는 데릭에게 상황을 곁눈질하던 레이블라는 한마디를 해 주고 싶었다.

    ‘……그거 원래 네 건데.’

    그 역사적인 천재가 바로 당신이라고.

    황녀의 스승이 아닌 학자로 계속 학문에 매진했다면 아마도 세기의 천재로 ‘데릭 헤스키’란 이름을 역사에 한 줄 새겼을 것이다. 역사적인 발견을 대리 발표한, 이름조차 제대로 남지 않을 그런 사람이 아니라.

    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황녀에게 무엇을 빼앗겼는지, 무슨 기회를 놓쳤는지.

    물론, 그 기회와 맞바꾸어 세기에 남을 황녀의 스승으로 남기는 하겠지만, 내심 궁금하기는 했다.

    두 가지의 선택지를 준다면, 저 사람은 무엇을 택할지.

    “레이블라.”

    “네. 전하.”

    황녀의 공부방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바느질하던 레이블라가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헤스키는 자리를 떠났고, 시녀장 라니엘 소이만이 황녀의 곁에 있었다.

    “계속 바느질한 거야?”

    “네. 전하. 이제 다 끝났어요.”

    “그런 거 하지 말고 나랑 공부하자니까.”

    황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저는 들어도 모르는걸요.”

    “그럴 리가 없잖아. 레이블라가 얼마나 똑똑한데.”

    “과한 칭찬이세요. 전하께서는 조금 전에 세기의 발견을 하셨잖아요!”

    “……듣고 있었어?”

    “물론이죠! 같이 기뻐하고 싶었지만, 수업 도중이라 꾹 참고 있었을 뿐이에요.”

    “정말?”

    “그럼요! 그러니까 지금 축하해 드려도 될까요?”

    라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레이블라가 힘차게 손뼉 치며 연신 축하한다고, 대단하다고 외쳤다. 그리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그녀의 총명함에 찬사를 날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사회생활 진짜 힘드네.’

    이러니 내가 수업을 같이 안 듣지. 눈치껏 들러리 역할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게다가 모른 척해야 하잖아.’

    솔직히 말하면 황녀가 지금 배우는 모든 것은 레이블라가 더 어린 시절에 배우고, 익힌 내용이었다. 펠리시티의 스파르타 교육 덕분이었다.

    그러니 들어 봤자 새로운 것이 없었고, 지루하기만 할 뿐인데. 그걸 드러낼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황녀, 에리나니까.

    황녀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상황인데 뜬금없이 엑스트라가 끼어들어 똑똑한 체하면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는가. 특히 황녀에게 해를 끼친 가문의 자손이 그랬다?

    ‘황녀의 공을 가로채려고 악을 쓴다는 소리나 듣겠지.’

    괜한 누명을 쓸 바에야 차라리 그럴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더 나았다.

    그래서 내내 피하고 있었는데, 황녀는 포기가 안 되는 모양인지, 가끔 불러서 이렇게 공부방에 앉혀 두고는 했다.

    그럴 때면 레이블라는 졸거나, 다른 일감을 받아 와서 처리하곤 했다.

    덕분에 데릭의 미움을 잔뜩 받는 건 덤이었다.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은 무식하고 무능한 것보다 더 큰 죄입니다.’라나 뭐라나.

    “하지만 나는 레이블라가 공부했으면 좋겠어. 레이블라랑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은데.”

    “저랑요? 에이, 저는 도움이 안 될 거예요.”

    “그치만…….”

    “전하.”

    황녀의 투덜거림에 시녀장, 라니엘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전하께서는 총명한 분이세요. 아무리 저 아이가 똑똑하다 하더라도, 전하의 수업을 함께 따라가기는 힘들 거예요.”

    “맞아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걸요.”

    레이블라가 순진한 표정을 지어내며 라니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황녀가 잠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나랑 있는 게 싫은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지체 없이 답하자 그제야 황녀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잘 지내서 다행이야!”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나?

    며칠 전에 독이 든 음식도 먹었는데.

    레이블라가 떠올린 생각을 황녀 또한 떠올렸는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 얼마 전에 큰일 날 뻔했지.”

    “하지만 전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지금은 괜찮아요.”

    나흘 전, 황녀의 점심을 시식하다가 독이 든 음식을 먹었었다. 꽤 강한 독이어서 바로 반응이 왔는데, 다행히 황녀를 만나러 왔던 신관이 있어서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황녀의 명령 때문에 받을 수 있었던 치료였다.

    물론, 그가 없었다고 해도 해독초로 낫기는 했겠지만.

    ‘그래도 그때 먹었으면 라플의 존재를 들켰을 거야.’

    타인에게 해독초의 존재를 들키는 일은 최대한 삼가고 싶었다. 가능하면 황궁을 떠나는 날까지.

    “최근에 독이 자주 나타나는 것 같아.”

    황녀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날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 걸까?”

    “아니에요, 전하. 절대로 그런 생각 하시면 안 돼요.”

    시녀장 라니엘이 즉시 반박했다.

    “전하께서는 그저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모두에게 웃음과 행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독을 보낸 자는 그 은혜를 모르는 짐승이지요.”

    “그럴까?”

    “네. 저를 믿으세요, 전하. 제 말이 진실이에요.”

    힘주어 말하는 라니엘의 모습은 정말로 황녀의 첫 번째 광신도다웠다.

    그녀의 진심 어린 말에 황녀가 배시시 웃었다. 그제야 라니엘의 굳은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돌아왔다.

    “레이블라가 먹었던 독은 아직도 누가 가져왔는지 잡히지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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