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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0)화 (20/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0화

‘네가 그렇다면…… 그래. 좋다. 대신, 이 사실을 폐하께서도 아셔야 한다.’

소년과의 만남을 황제에게도 알려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거부감이 느껴졌지만, 레이블라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든 경과 함께 가거라. 길이 험해서 혼자는 가기 힘들 테니.’

감시할 사람을 붙이겠다는 소리였다. 이 또한 레이블라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황제에게 괜한 의심을 사서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래서 함께 왔고,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도를 그려 주었다고 해도 이 길이 정말로 맞는지 의심하느라 시간을 낭비했을 테니 말이다.

“아가씨, 아니, 시식가님.”

궁 앞에 도착하자, 이든이 레이블라를 불렀다.

그가 레이블라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단장님께서 이야기를 해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의 존재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네. 알고 있어요.”

칼슨도 몇 차례나 주의를 준 바였다. 소년의 존재가 알려지면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레이블라 펠리시티’를 아끼는 황녀를 생각해서라도 입조심, 몸조심하길 바란다고.

“시식가님을 생각해서라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을 권하고 싶지만, 부디 어디에서든 보는 눈과 귀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럴게요.”

저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이 이곳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말해 주는 듯했다. 레이블라가 티 안 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곳에 있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생기면 부르십시오.”

“같이 가지 않으시고요?”

“네,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레이블라는 굳이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 그 소년이 기사와의 동행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 길로 궁 안에 들어가자마자 레이블라를 맞이한 것은 자욱한 먼지였다. 굳이 왜 이런 곳에 머무르는 걸까.

황궁 안에 살고 있음에도 원작에 나온 적이 없는 존재.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엑스트라.

‘어쩐지 남 일 같지 않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소년이 누구인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약속대로 이름을 들으러 왔어요.”

레이블라는 복도 끝,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 앉아 무료한 듯, 혹은 지친 듯한 얼굴을 한 아이를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물었다.

“이름, 알려 주세요.”

레이블라는 제법 자신만만했다.

눈앞의 소년도 본인이 얼마나 찾기 어려운 곳에 있는지, 레이블라가 이곳을 찾은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가장 잘 알 테니까.

그러니까 레이블라는 그가 기꺼이 이름을 알려 주리라 생각했었다.

“그게 왜 궁금해?”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시선과 의심으로 가득한 질문이었다.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서요.”

“내가, 너랑?”

정말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그가 코웃음 쳤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돌아가. 다신 내 눈앞에 띄지 마.”

“그래서 정말로 알려 주지 않으시려고요?”

냉대를 받는 것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고맙고, 도와주고 싶어도 상대가 거부하면 그거로 끝이었다. 강요는 또 다른 폭력일 뿐이었다.

“진짜 힘들게 찾아왔는데.”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가. 누군가에게 묻지도 못하니 발품을 팔아야 하는데, 생각보다도 막막한 일이었다. 황궁은 미치도록 넓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아야 하지, 밤마다 살금살금 돌아다니고 있으면 도둑 체험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찾아 달라고 안 했는데.”

“생명의 은인이니 내가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난 답한 적 없어.”

“그렇긴 하지만.”

하긴. 생각해 보면 이 만남 자체가 그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었다.

‘선대 황태자의 아들일 테니까.’

처음에만 못 알아봤지, 그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폭군 황제가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어린 조카를 유폐시켰다는 이야기가 소설 속에 딱 한 번 등장했었으니까.

그 사실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던 이유는 유일하게 황족의 피를 이은 사람은 황녀뿐이라는 말이 작중 내내 언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그 조카가 죽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살아 있었지.’

돌이켜 보면 아주 어린 시절에, 아버지인 펠리시티 공작이 그녀에게 귀족의 작위와 서열에 관해 교육하면서 했던 말이 있었다.

‘현 제국에서 공작이 최고 작위는 아니란다. 우리 위에 또 다른 사람이 존재하지.’

그때는 그 말이 황제를 뜻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넌지시 저 아이의 존재를 알려 준 말이었다.

소년의 정체를 알고 나니, 문뜩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대충 그려졌다.

‘현 황제 리암 커티스 라스텔은 본래 황태자가 아니었어. 형이 황위에 오르는 즉위식 날 반역을 일으켰다고 했지.’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을 아이였다. 대륙 최고의 나라. 그 제국의 중심에서 태어난 존재. 현 황제만 아니었다면, 황위 계승자로서 지금쯤 모두에게 이름을 알렸을 텐데.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부모는 죽고, 홀로 유폐된 채 목숨만 부지하는 형국이었다.

‘아빠가 제대로 언급할 수 없었을 정도라면, 이 아이가 살아 있단 사실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거야.’

물론, 그렇게 만든 것은 황제일 테고.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황태자 자리에 있을 사람. 그 존재를 완벽하게 지울 수 있는 이는 이 제국에서 황제,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의문스러운 것은 언제부터 황궁에 있었냐는 점이었다.

황궁을 이렇게 버젓이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라면, 지금처럼 완벽하게 그 존재를 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특히, 황녀가 모를 수는 없었다.

‘황녀는 정말 모르는 것 같은데.’

알고 있었다면 그를 이렇게 내버려 둘 리 없고, 소설에서도 언급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엔 다른 곳에서 지냈고, 황궁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또한 이 외진 궁 안에 버려두고, 궁내를 돌아다니도록 가만히 두는 것도 수상쩍었다.

그렇게 의문스러운 점을 짚으며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한 가지 결론으로 수렴되었다.

‘역심을 품은 이들을 색출하려는 건가.’

황제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이 그의 존재를 알아챈다면 반역의 희망을 품고 접촉할 테니까.

반역으로 황위에 오른 자. 황제임에도 정통성이 떨어지는 인물.

소설 속에서 황제는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단 비난에 늘 시달렸다. 그래서 사랑하는 딸에게만큼은 조금의 티끌도 없는 완벽한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지금까지 조카를 살려 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황궁으로 부른 것이라면 그 쓰임이 다했단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대공을 중심으로 모이는 세력이 없나 확인하고 나면…….

‘죽이겠지.’

그리고 아마도 그 사실을 저 아이 또한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처음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소년의 눈빛에선 일말의 희망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서 다행이야.’

만약 그와 지금도 연락을 이어 가고 있었다면, 저 때문에 비체라발리 공작도, 저 아이도 위험에 빠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반역 가문의 생존자인 ‘레이블라 펠리시티’라는 인물을 매개로 두 사람이 연락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샀을 테니까. 아니, 어떻게든 엮으려 했을 것이다.

‘나를 경계할 만도 하네.’

황녀 대신 독을 먹고 쓰러졌단 이야기를 듣고 자신을 찾아와 해독초를 먹인 사람이니, 레이블라 펠리시티가 비체라발리 공작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비체라발리가 이전처럼 ‘황제의 개’로 취급되고 있다면 모를까, 지금은 비체라발리와 황제 사이의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그런 비체라발리와 연관 있는 아이가 자신에게 친밀한 척 다가온다면, 황제가 바랐던 대로 ‘반역’을 위한 접촉이라고 의심받기 딱 좋았다.

비체라발리의 첩자인 황궁의 기사가 반역을 위해 ‘레이블라 펠리시티’를 그에게 안내했다고.

……너무나도 억울한 오해지만.

생각을 정리한 레이블라가 그에게 말했다.

“내가 부담되면 더는 오지 않을게.”

“…….”

“하지만 오늘은 일단 왔으니까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이 만남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최대한 그와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었다.

같은 불행을 짊어진 그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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