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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9)화 (19/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9화

“이만 가 봐야겠어요. 시식할 시간이에요.”

완벽한 정답을 내어놓은 레이블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이따 제가 다시 와도 되겠습니까?”

“제게 볼일이 남으셨어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아니요.”

레이블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기사들을 피해 다닐 이유가 없다면 이제 소년에 대해 알아보려 다녀야 했다.

혹시라도 그가 황녀의 광신도라서 황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시간을 내 달라고 하는 거라면, 정말로 거절하고 싶었다.

게다가 아까, 황녀에 대해 질문을 하고 답을 듣는 과정에서 그가 무언가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결연한 얼굴로 살짝 검에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저를 해치려 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가까이 두고 싶지는 않았다.

레이블라가 산뜻하게 인사하자,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한데,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다가 이내 결심한 듯 그가 말문을 열었다.

“혹시, 기사의 맹세에 대해 아십니까?”

“글쎄요. 저는 잘…… 그럼 전 이만 바빠서 가 볼게요!”

또다시 검으로 손을 가져가려는 것 같기에, 얼른 레이블라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뒤통수에서 자꾸만 시선이 느껴졌으나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저 발걸음을 바삐 놀릴 뿐이었다.

* * *

……그렇게 1기사단과의 접점은 끝인 줄 알았는데.

레이블라는 황녀의 시식을 하러 갔다가 황녀의 맞은편에 앉은 도미닉 칼슨과 딱 마주치고야 말았다.

여느 때보다 불편한 마음으로 식사 시간을 마친 후, 황녀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려는 레이블라를 그가 붙잡으며 흉흉한 기세로 물었다.

“네가 이든 경에게 약을 먹였나?”

마치, 자신의 수하를 죽이려고 했느냐 분노하는 것처럼.

칼슨 경의 기세에 놀란 레이블라가 눈을 홉 떴다. 하지만 그뿐. 긴장된 마음을 금세 추슬렀다.

“네. 제가 그분께 약을 드렸어요.”

잘못한 것이 없었으니까.

만약 그가 살아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무척 당황스러웠겠지만, 앞서 만났으니 떳떳할 수 있었다.

‘그분이 이든 경이구나.’

그러고 보니 이름을 듣지 못했었다. 마지막까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려던 것이, 설마 이름을 말하지 못해서였을까.

잠시 그를 생각한 레이블라가 다시금 칼슨 경을 바로 보며 차분하게 답을 이어 갔다.

“제가 드린 약은 가문에서 저에게 준 상비약이었어요.”

이 질문은 예상한 바였고, 답은 충분히 고민한 끝에 준비해 둔 상태였다.

“상비약?”

“예. 제 부모님이 저에게 주신 약이에요.”

예기치 않은 상황에 대비해 상비약을 지니고 다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실제 펠리시티엔 만병통치약이라 여겨지는 비밀의 약이 있었다. 현자인 톨비쉬 르랑이 만들었다는 것으로 그 재료와 제조 방법, 효능에 대해선 기밀에 부쳐졌다.

칼슨 또한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지 바로 그녀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제조법을 알고 있나?”

“아니요. 제가 아는 건 없어요. 혹시 릴릭카브 성에 가면 문헌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

“릴릭카브라면, 이전 펠리시티 영지 말인가?”

“수도의 저택은 제가 가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영지에 있는 릴릭카브의 성에는 약제소가 제법 크게 있었어요. 다양한 연구도 했고요. 현자이신 톨비쉬 르랑님께서 세우신 곳이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황제의 기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약제소가 전부 타 버렸다.

칼슨도 그것을 기억했는지, 순식간에 아쉬운 낯빛을 띠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사람을 보내서 그 정도의 명약이라면 기사들에게 지급하여 상비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테니.”

작게 중얼거린 그가 다시금 레이블라를 보았다. 표정에서는 미안함이 떠올랐다.

“갑자기 불러서 놀랐을 텐데, 미안하구나.”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괜찮아요.”

“사실 널 찾은 이유는 이든 경을 살려 주어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순서가 바뀌었지만 이든 경을 구해 주어서 고맙다.”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이든 경은 내게 정말로 동생과도 같은 소중한 녀석이다. 우리 기사단 모두에게 그렇지.”

“…….”

“게다가 그때 그 상처는 나를 구하려다가 다친 거였다. 그러니, 너는 내 은인을 살린 것과도 같아.”

평민이랍시고 신관이나 마법사의 치료도 못 받고 있었기에 기사단 내에서 배척이라도 당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레이블라가 해사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별거 아니었어요. 제가 한 일이 단장님을 도왔다니 그것만으로도 기뻐요!”

씩씩한 대답에 칼슨이 조금 놀란 눈으로 레이블라를 보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구나.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해 보아라.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좋으니.”

그 말에 문득 황궁을 나가고 싶냐던 이든 경의 물음이 떠올랐다.

황궁을 떠날 수 있게 도와 달라면 해 줄까.

의미 없는 가정은 금세 지워 버렸다. 칼슨은 황실에 충성하는 기사였으니까.

“괜찮아요. 제가 큰일을 한 것도 아닌걸요.”

“지금이 아니라도 좋다. 언제든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나를 찾아와.”

“네, 그럴게요.”

최대한 소설 등장인물과 얽히고 싶지 않은 레이블라로서는 절대로 찾을 일은 없겠지만…… 아니, 잠깐.

‘혹시 이 사람이라면…….’

순간 루비빛 눈동자의 소년을 떠올린 레이블라가 멈칫했다.

황제의 측근인 그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레이블라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저기, 그럼 혹시…….”

* * *

‘……정말 여기라고?’

레이블라는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년이 머문다는 궁 주변은 빼곡하게 커다란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정원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잡초들로 수북했다. 분수대는 물이 말라서 이끼가 잔뜩 꼈고, 나무는 시들시들한 채였으며, 돌 장식은 깨지거나 쓰러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그 중심에 있는 궁이 멀쩡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커다란 덩굴이 건물을 휘감고 있어서, 오래된 유적지 같은 모양이었다.

‘오는 길도 심상치 않더라니.’

궁으로 향하는 큰 길이 닦여 있을 법도 한데, 이곳으로 오는 내도록 울창하게 자란 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러니 내가 못 찾았지.’

망자의 숲 안에 지도에도 없는 궁이라니. 찾을 수가 없는 게 당연했다.

“조심하십시오. 넘어지십니다.”

경고와 함께 레이블라 앞으로 두꺼운 팔이 내밀어졌다. 레이블라의 시선이 손끝부터 거슬러 올라가 그 주인에게 닿았다.

밀밭처럼 예쁜 머리카락을 지닌 기사, 이든 경이었다.

“길이 험합니다. 앞을 잘 보시고 걸으십시오.”

“감사합니다.”

레이블라가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올리자, 그의 다정한 눈빛이 맞아 주었다.

한 번 싱긋 웃어 준 레이블라는 며칠 전 도미닉 칼슨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분을 왜 또 만나려 하지?’

그저 소년의 외양을 언급하며 궁 안에 있는지 물었을 뿐인데, 칼슨이 내뱉은 첫 마디였다.

그 답에 레이블라는 흠칫 놀랐다.

‘그 아이와 만났던 걸 알고 있구나.’

그래서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나 그가 해독초에 관한 사실도 알까 싶어서 눈치를 보았으나, 그것에 관해서는 아는 기색이 없었다. 아마도 성묘하던 날 만난 것은 알고 있지만, 이후 만남에 관해서는 모르는 듯했다.

그래서 해독초에 관한 내용은 과감히 생략할 수 있었다.

‘숲 근처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는데, 제게 큰 도움을 주셔서요. 제 은인과도 같은 분이시라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레이블라의 이야기에 칼슨이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작은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사정은 이해했지만, 그래도 그분을 만나는 건 너에게 위험하다.’

‘위험하다니요?’

‘그게…….’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그분을 주시하고 계셔. 가까이하면 너 또한 그 위험에 휩쓸릴 수 있어.’

그는 제가 한 말이 조금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풀어 설명했다.

‘그분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아. 너처럼.’

‘…….’

‘그래도 만나겠느냐?’

역시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듯했다. 이대로 무시하면 없던 일이 되겠지만…….

잠시 고민하던 레이블라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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