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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8)화 (18/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8화

    ‘그래서 나 의심받는 중인가?’

    그게 아니라면 흉흉한 분위기로 찾고 있을 리가 없잖아?

    ‘진짜로 오해한 거면 어떡하지?’

    해독초의 존재를 밝히면 오해가 풀리기야 하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의 존재가 밝혀지면, 해독초의 효능을 무효로 하는 또 다른 독이 생겨날 테니까. 나중에 진짜 독에 당했을 때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아. 모르겠다. 대충 모른 척하자.’

    그를 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그에게 준 것은 그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 그 기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해독초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 미친 세상이 또 무슨 억지를 쓸지 모르니 웬만하면 기사들을 만나지 않게 황녀궁에서 떠나지 않는 게 좋겠어.’

    이 빌어먹을 소설 속 세상은 그녀에게 유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하필 그 아이를 찾아보려고 할 때 이런 일이 생기네.’

    레이블라는 제 생명의 은인인 루비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에게서 목숨과도 같은 해독초들을 선물받으며, 레이블라가 선언했었다.

    ‘또 만나자고 큰소리쳤는데.’

    소년의 정체를 아는 체하며 ‘내가 찾아갈 테니 그때 이름을 알려 달라!’고 말했는데, 하필 그 직후부터 바빠도 너무 바빴다.

    황녀는 시도 때도 없이 찾지, 황녀를 피해 잡일을 자처했다가 다과회까지 돕느라 도무지 쉴 틈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제야 여유가 생겨서 제대로 찾아보려고 했건만.

    ‘어딨으려나…….’

    그간 레이블라가 가만히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내내 두 귀를 열고, 수면 시간도 쪼개어 가며 그가 황궁 안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려 다녔다.

    하지만 그에 대한 어떤 정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직접 발품을 팔아 외부인이 사용할 만한 궁을 돌아보았으나 어디에도 소년은 없고, 무덤 쪽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의 존재를 숨기는 것처럼.

    ‘어디서 지내는지 알려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이름조차 말해 주지 않는 아이라서 직접 다가가겠다고 선언한 것인데 상황만 복잡해졌다.

    ‘일단 지금은 지금 일만 생각하자.’

    작게 한숨을 쉰 레이블라는 소년에 관한 생각을 밀어 넣었다.

    지금은 쓸모없는 일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 * *

    ‘이제 청소도 익숙해졌네.’

    레이블라는 제가 청소한 방을 둘러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방 하나를 정리하는 데만 해도 꼬박 하루가 걸려서 자는 시간마저 줄여야 했었는데.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요령을 익혀서인지 세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쉴 틈도 생겼다.

    ‘다음 시식까지 시간이 있으니 잠시 쉬다가 샤워할까.’

    황녀의 곁에서 음식을 먹어야 하니 늘 청결함을 유지해야 했다. 잡일을 하다 보면 먼지가 묻거나 옷이 더러워질 일이 많아서 하루에 두 번, 세 번 씻어야 했지만, 레이블라는 기꺼이 하고 있었다.

    뭐가 됐든 죽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쉴까.’

    청소도구를 정리한 레이블라가 창 너머 큰 나무 아래로 향했다. 턱 하니 앉아서 나무에 기대고 있으니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바람은 솔솔 불고, 바람에 묻은 꽃의 향기가 은은하게 코끝으로 스며들어 포근한 느낌에 잠겨 드는 때였다. 저도 모르게 노곤해진 레이블라가 얕은 잠에 들려는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묵직한 발걸음에 놀란 레이블라가 다급히 눈을 뜨자, 역시나 기사의 발이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깨셨습니까?”

    조금 당황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고개를 들자, 푸른 눈동자의 기사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지?’

    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기사였다. 가을의 벼처럼 예쁜 빛깔의 백금발에 푸른 두 눈동자. 깨끗한 피부. 루비빛 눈동자를 지녔던 소년만큼은 아니지만, 영애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을 것 같은 훈훈한 외모였다.

    묘하게 순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낯선 이의 등장에 빤히 쳐다만 보고 있자,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말투에는 기사 특유의 딱딱함이 묻어났다.

    기사.

    ‘잡으러 왔나?’

    약간은 몽롱했던 정신이 번뜩 깨어나며 레이블라의 눈빛에 경계심이 서렸다. 이에 그가 조금 머쓱하다는 듯 한 걸음 물러서며 상체를 낮추었다. 눈높이가 조금은 비슷해졌다.

    “피곤하신 것 같아 멀리서 뵙고 가려고 했는데, 반가운 나머지 그만…….”

    ……반가워?

    만난 적이 있었나?

    레이블라가 기억을 헤집으며 고개를 살며시 옆으로 기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 응?

    “아.”

    그때 그 사람이잖아? 해독초 먹인 기사!

    ‘……안 죽었어?’

    레이블라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자, 이제야 알아보는 기색에 안도한 듯 그가 긴장한 표정을 풀고 웃었다. 인상이 조금 더 순해졌다.

    “몰라보실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때는 좀 많이 엉망이어서…….”

    엉망이기는 했었다. 상처는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지만, 핏물과 먼지, 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머리 색조차 제대로 알 수가 없었으니까.

    괜히 반가워서 다시 한번 그를 보았다. 멀끔해진 모습을 보니 뿌듯함에 미소가 나왔다.

    “이제 괜찮아요?”

    “예, 덕분에 살았습니다.”

    “……기억해요?”

    “예. 아가씨께서 저를 다독이시며 무언가를 먹이셨죠.”

    해독초를 먹인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레이블라는 주제가 해독제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살아 계셔서 다행이에요! 저는 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무슨 일이라니요?”

    “저를 찾는 분들 분위기가 흉흉했다길래…….”

    “아.”

    그가 미안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제 목숨을 구해 준 분을 찾고 싶다고 했는데, 전달 과정에서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오해할 구석이 있었던 거지?

    원수라고 착각이라도 했나.

    “다시 전달할 테니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간 힘드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사과와 함께 후속 조치를 하겠노라 먼저 말하는 모습이 듬직했다.

    고민 끝에 살려 준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레이블라가 다시 웃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기사님들이 왜 저를 찾는지도 알게 되었고, 살아 계셨다는 소식도 들어서 기뻐요.”

    “더 일찍 찾아왔어야 했는데, 이제야 와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건강하신 거로 충분해요.”

    이에 기사가 감격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레이블라의 이야기에 그의 표정이 굳었다.

    “제가 살려 드렸으니까, 앞으로는 목숨 소중히 여기시면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시는 거예요. 아셨죠?”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앞으로는 못 볼 것처럼…….”

    레이블라의 발언에서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는지, 기사가 되물었다. 레이블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야, 그렇지 않을까요?”

    앞으로 또 만날 일이 무엇이 있을까.

    “저는 황녀님의 시식가이고, 무엇보다 펠리시티잖아요.”

    누가 봐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십년지기 친구인 양 계속 말을 걸고 가까이하려는 황녀가 비정상이었다.

    레이블라의 말에 기사가 침묵했다. 그는 무언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황궁을 나가고 싶으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이게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이지?

    혹시, 황녀를 위한 충성도 테스트 같은 건가?

    ‘1기사단은 유독 황녀에게 미친 인간들이 많았지.’

    이 사람도 그럴 수 있었다.

    순식간에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한 레이블라는 정답을 말하기 위해 단호히 고개 저었다.

    “지금이 좋아요! 황녀 전하를 바로 옆에서 모실 수 있잖아요. 평생을 황녀 전하께 은혜를 갚으며 살아갈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거예요!”

    양손을 맞잡은 채 환하게 웃자, 그가 조금은 허탈한 듯 웃었다.

    “그러십니까.”

    “네. 황궁이 좋아요. 정말로요.”

    그러면서 무엇이 좋은지 하나하나 꺼내며 재잘거렸다.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을 만큼 긴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는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은 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가끔은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조금 전의 질문은 황녀의 충성도 테스트 같은 것이었음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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