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7)화 (17/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7화

‘……개판이네.’

멀리서도 난장판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더 답이 없었다. 낯선 환경이 싫은지 계속 우는 아이, 화내면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아이,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아이. 엄마에게 데려다 달라고 유모에게 매달려서 징징대는 아이.

유모들도 황궁에서 아이를 돌보는 게 처음인지라 분위기에 압도된 탓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걸 어떻게 하지.’

육아의 신이 있다면 지금 당장 빙의해 주었으면.

헛된 바람을 품으며 잠시 고민하던 레이블라가 이내 뭔가를 떠올린 듯,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인형 두 개를 양손에 들었다.

각각 예쁘게 생긴 남자 인형과 여자 인형이었다.

적당히 아이들 곁에 자리를 잡고 앉자, 유모 중 누군가가 그녀를 쏘아보았다. 네가 거기에 왜 있느냐는 듯한 눈초리였다.

레이블라는 그 시선을 무시한 채 모두에게 들으란 듯이 양손으로 인형을 움직이며 운을 뗐다.

“어? 이게 뭐지?”

“그러게, 이게 뭐지?”

두 인형으로 서로 대화하듯 몇 마디를 주고받자, 근처에 있던 아이가 모야, 모야? 하며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레이블라는 다시 인형들을 움직이며 목소리를 꾸며 냈다.

“이거 착한 아이들에게만 보이는 거라던데.”

“정말로? 이게 안 보이는 사람도 있단 말이야?”

레이블라가 남자 인형을 움직여 바로 옆에 앉은 아이에게 물었다.

“이거 보여?”

인형이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묻자, 아이가 훌쩍훌쩍하면서 인형의 눈이 향하고 있는 허공을 보더니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이써.”

“어떤 게 있는데?”

“쪼끄만 거…….”

확신하지 못한 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하자, 레이블라가 인형의 고개를 끄덕거리게끔 움직였다.

“맞아! 쪼그맣게 생긴 거 있어!”

끄덕끄덕. 인형이 움직이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자리를 둘러싼 아이들이 모두 레이블라의 인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레이블라가 인형을 움직여 다른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요기 뭐가 있는지 보여?”

“웅.”

“뭔데?”

“세모난 거……?”

“맞아! 세모 같은 거 있어.”

사실은 없는데.

하지만 ‘착한 아이에게만 보인다’라고 하니, 무언가 본 척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들이 제각기 상상을 더해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내 아이들이 자기가 보는 것에 대해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레이블라가 움직이는 인형이 있었다.

‘적당히 수습되었네.’

이제는 다음 단계로 갈 차례였다. 레이블라가 인형을 통해 말했다.

“너희 그 이야기 알아?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말이야.”

아이들의 호기심이 떨어지기 전에, 레이블라가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소설 속에 들어오기 전에 열심히 읽었던 동화나, 펠리시티 공녀로 지낼 적 알게 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놓자 작은 아이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봉사 활동 한 보람이 있네.’

전생에서 대학 입시를 위해 보육원이나 유치원으로 가서 봉사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이들을 다루는 법을 어깨너머로 익혔었는데, 그게 지금 도움이 될 줄이야.

그렇게 한참을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였다.

“제, 제 말은 그게 아니었어요!”

꼬꼬마들이 조용해지며 덩달아 차분해진 후원에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자, 은은한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벌떡 일어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는, 저는 그저 재클린 영애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녀의 시선 끝에는 파티의 주최자, 황녀가 있었다.

“브라운 영애.”

머리카락과 퍽 잘 어울리는 성명이 황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황녀의 부름에 다급히 움직이던 브라운 영애의 입술이 다물렸다.

“저를 신경 써 주시려는 건 알겠어요. 그건 고마워요.”

“그럼…….”

“그렇지만.”

“…….”

“그건 제가 듣고 판단할 문제예요. 영애께서 끼어드실 일이 아니에요.”

황녀의 말에 브라운 영애가 입술을 짓이기면서 초조한 기색을 띠었다. 자세히는 몰라도 무언가 실수를 했구나 싶은 상황이었다.

‘……쟤는 이제 끝이네.’

브라운 영애가 같은 테이블에 있는 다른 소녀를 노려보는 걸 보니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아마도 브라운 영애는 이번 다과회 때 황녀와 가까워지고 싶었을 테고, 황녀의 곁에 착 달라붙어 있는 소녀, 도나 재클린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도나 재클린은 황녀의 충실한 벗으로, 2부에서는 사교계를 주름잡는 소설 속 주요 인물이었다.

설정상 가족을 잃어버렸다가 황녀의 도움으로 다시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귀족 영애로서의 배움이 부족한 상태일 텐데, 브라운 영애 입장에선 자기보다 못한 아이가 황녀와 친밀한 게 못마땅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무슨 모욕이라도 저지른 듯했다.

‘하필 저 애를 건드리다니.’

황녀의 친구를 건드렸으니, 브라운 영애는 다시 수도에서 볼 수 없을 것이다. 황녀와 도나 재클린이 친밀해지기 위해 만들어진 엑스트라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저 아이가 좀 더 성숙했다면 저런 식으로 접근하진 않았을 텐데.’

그저 황녀와 친해지려 했을 뿐인데, 한순간에 미래가 전부 박살 나 버렸다.

훗날 사교계에 나타나더라도 황녀의 눈 밖에 난 이상 평판 회복은 글렀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꼬꼬마들이 다과회라니.’

귀족들은 자식을 조용히 키우는 펠리시티를 비웃었지만, 레이블라의 생각에는 펠리시티의 방법이 옳았다.

다과회는 아직 사교에 능숙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너무 큰 짐이었다.

“이야기 또 안 해?”

“해죠. 해죠.”

생각에 잠긴 시간이 제법 길었는지, 어느새 같은 테이블에 있던 꼬꼬마들이 다가와 레이블라의 팔을 흔들고 있었다. 레이블라는 아이들을 보면서 웃었다.

“그럼 이번에는 드래곤이 제국을 삼켰던 이야기를 해 볼까요?”

맑은 목소리로 레이블라가 말문을 열자, 아이들이 꺅꺅 소리를 질러 댔다. 먹구름이 드리운 황녀 쪽 테이블과는 달리, 잔디밭에 앉은 아이들은 화기애애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 * *

“다과회에 참여했던 귀족들이 너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더구나.”

다과회가 끝나고 며칠 후.

시녀장의 부름에 응한 레이블라는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다과회에 참여했던 유아들의 부모가 레이블라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 달라 했다는 소식이었다.

‘마지막에 꼬꼬마들이 매달려서 울었었지.’

꼭 매달려서는 같이 집에 가자고 어찌나 매달리던지. 끝내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먹였었다.

그만큼 제법 재미있게 놀기는 했었다. 이야기보따리를 한가득 푼 후에는 잡기 놀이도 하고, 장미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도 했으니까. 워낙 분위기가 좋아 다른 테이블의 아이들이 부러운 듯 힐끔거리기도 했었다.

그래도 저를 비웃던 귀족 부인들에게 감사 인사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조금 신기한 마음이었다.

황녀와 얽힌 이후로 무얼 하든 욕만 먹어 와서 그런가.

“선물도 몇 개 있어서 빼 두었으니 찾아가렴.”

레이블라는 그녀의 말대로 선물을 챙겨 시녀장의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시녀장이 다시 레이블라를 불렀다.

“혹시, 황궁 기사들과 무슨 일 있었니?”

……황궁 기사단?

“전에 약제소에서 스치듯 본 것 외에는 없어요.”

“그래. 알았다. 나가 봐.”

레이블라가 재차 인사하고 시녀장의 방에서 나오자, 뒤늦게 한 사람이 생각났다.

해독초를 주었던 기사.

‘왜 갑자기 물어본 거지?’

왠지, 조금 불길해졌다.

내심 불안해하고 있는데, 방으로 가던 도중 만난 몇몇 시녀들도 똑같은 이야기를 물어 왔다.

그래서 시치미를 뚝 떼고 시녀장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답하니, 그녀들이 새침한 투로 이유를 말해 주었다.

“기사분들이 약제소에 있던 어린아이를 찾는다길래 물어본 거야. 너, 너도 그때 거기 있었으니까.”

“근데 분위기 진짜 흉흉하더라. 무슨 일 있나?”

……혹시 그때 그 기사 죽었나?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