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6화
레이블라의 하루는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새벽같이 눈을 떠 잠기운이 채 사라지기 전에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나가면 바로 황녀가 씻을 물을 마셨다. 황녀의 몸에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확인을 거치라는 황제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녀에게 나가는 물 한 잔까지도 확인하고 나면 잠시 틈이 생기는데, 그때는 황녀궁 조리실로 가서 문제가 없는지 꼼꼼히 살펴야만 했다.
혹시나 실수로 잘못된 재료가 들어왔는지 확인해 달라는 요리장의 요청 때문이었다.
‘네가 식물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으니 나를 돕거라.’
덕분에 레이블라는 제 일이 아님에도 그 일을 해야만 했다.
아침 시식 시간이 되면 본격적인 일과가 시작되었다.
아침 식사를 시식하고, 틈날 때마다 청소하거나,잡일을 하다가, 황녀가 부르면 강아지처럼 뛰어가고, 또다시 시녀장이 시키는 대로 다과회 참가자들의 식성을 외우고, 황녀의 간식을 시식하고. 또 시식하고. 쓸고, 닦고, 질문에 답하고. 다시 먹고, 또 먹고. 시녀들이 시키는 일을 하고. 또 하고.
정신 차려 보면 밤이었고, 몸은 침대에 쓰러지다시피 누워 있었다.
피곤함에 절어 자고 일어나면 또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솔직히 먼저 나서서 시녀들의 일을 돕겠다고 하기는 했지만,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했다. 쉴 틈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키다니.
하지만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황녀의 첫 다과회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독 사건 때 비어 버린 일손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일손이 한없이 부족했다. 개미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이렇게 바쁘면 인원을 확충해 달라고 말을 할 법도 한데, 황녀궁 시녀들의 생각은 달랐다.
‘전하의 음식에 누가 독을 넣었는지는 아직도 조사 중이야. 아무나 들여올 수는 없어.’
‘맞아. 함부로 사람을 들였다가 전하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어.’
‘우리가 좀 더 열심히 하면 돼.’
과잉 충성으로 인해 모두가 일에 묻혀 살겠노라 다짐했고, 그래서 레이블라 또한 숨 한번 편하게 쉬지 못한 채 일해야 했다.
그렇게 과로에 절어 흐물흐물 죽어 가기 직전에야 그날이 찾아왔다.
황녀의 다과회.
제국 내 유망한 귀족가 꼬마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
‘저는 빠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다과회 전날, 레이블라는 조심스럽게 시녀장에게 제 의견을 알렸다. 평소라면 절대로 말도 붙일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저 때문에 황녀 전하께서 고생하여 준비한 다과회의 분위기가 흐려질까 걱정되어서요.’
황녀를 위한 말을 덧붙였기에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다행히 그 의견에는 시녀장도 동의하는 바였다.
‘하긴. 너를 궁금해하는 귀족들이 제법 있을 테니까.’
펠리시티의 몰락은 귀족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한편, 큰 볼거리를 주기도 했다.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꼿꼿하게 군림하던 자를 내려다보며 비웃을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몰락 귀족인 레이블라가 나타나면 동물원의 동물처럼 구경거리로 전락해 버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황녀에게 집중되어야 할 분위기가 흐트러질 수 있었다.
시식이야 이전처럼 숨어서 하면 되고, 황녀에게 가져다줄 음식은 시녀장이 직접 움직이면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안 돼. 레이블라도 같이 가.’
황녀가 고집을 부렸다. 친한 친구들에게 꼭 소개하고 싶다면서.
황녀에게 약하디약한 시녀장은 그녀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황녀 전하께서 잘하시겠죠, 하며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래서 당일. 레이블라는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분위기는 당연히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저 아이가 그 아이인가요? 펠리시티의…….”
“콧대 높은 가문에서 꼭꼭 숨기기에 어떤 아이인가 했더니…… 별건 없었네요.”
“그 가문이 비밀주의가 심했잖아요. 소가주가 정해지는 10살이 될 때까지는 아이를 공식적인 자리에 내비치지도 않았고요. 유난이었죠.”
“그나저나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네요. 어려서 뭘 모르는 건지.”
“그래도 속이 말이 아니겠죠. 하루아침에 저 꼴이 났는데……. 저라면 딱 죽고 싶을 것 같네요.”
황녀에게 쏟아지는 관심만큼이나 레이블라를 향한 관심도 뜨거웠다. 목소리의 온도를 잴 수 있다면 100도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열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황녀의 말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제 초대에 응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부디, 제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분에게 즐거운 날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싱긋 웃으면서 모두를 한 번 둘러보았다. 모두가 황녀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느라 개미 기어 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해진 상태였다. 황녀가 재차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그럼 시작하죠.”
다과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으, 시끄러워.”
다과회에 참석한 한 아이가 귀를 틀어막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가 흘겨보는 장소에는 세 살 남짓한 꼬마 일곱 명이 보호자도 없이 모여 있었다.
본래 황녀 또래의 귀족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다과회였으나, 사정이 생겨 참석하지 못한 아이 대신 그보다 어린 동생을 데려온 가문이 몇몇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 가문의 부인들이 아이들만 두고 다른 곳으로 가기 전, 몇 번이고 주의를 주긴 했지만 그래 봤자 어린아이들이었다. 다과회가 시작하고 채 1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울고, 소리 지르고 싸우고.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곁에서 유모들이 돌보고는 있었지만, 낯선 환경이라서인지 도통 아이들은 진정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자리 바꿔 주면 안 돼?”
귀를 내내 틀어막고 있던 아이가 티 푸드를 보충하러 온 레이블라를 향해 물었다.
“나는 황녀 전하를 뵙고 싶어서 왔는데, 이게 뭐야.”
“나는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기는 한데…… 황녀 전하의 목소리가 들렸으면 좋겠어.”
“맞아. 전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황녀 전하께서 들으셨다는 신의 목소리가 너무 궁금해.”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이 순둥순둥한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면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황녀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절절하게 애타는 마음이 그득그득 담겨 있었다.
‘황녀가 생각한 대로네.’
다과회에 대화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아이들이 올 것은 예상한 바였다. 문제는 그들을 어떻게 다루냐는 것.
통제 불가한 어린아이들을 황녀 곁에 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고, 그 근처에는 불만을 품지 않을 순한 아이들을 앉히기로 했다.
물론, 그들을 그냥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들의 부모에게 나중에 보상할 테니까.’
어쩔 수 없지 않으냐며 한숨을 내쉬는 황녀에게 레이블라가 제안했었다.
‘돌아가기 전에 전하와 잠깐 대화할 시간을 주는 건 어떨까요?’
‘나와?’
‘그 아이들은 선물보다 전하를 만나고 싶어 할 것 같아서요.’
모두가 황녀 에리나를 좋아하는 세상이니까.
‘좋아! 그렇게 하자.’
다만 아이들에게는 그 사실을 미리 전하지 않았기에, 아이들의 기분은 내내 좋지 않았다. 황녀의 명령으로 티 푸드를 서빙하게 된 레이블라에게도 상당히 모난 반응을 보였다.
“왜 우리는 노예가 음식을 주는 거야?”
“지금 우리 무시하는 거야?”
툴툴대면서 스트레스를 계속 풀어 대는 통에 테이블을 담당하게 된 레이블라는 머리가 아팠다.
‘그냥 황녀가 옆에 있으라고 할 때 있을 걸 그랬나.’
처음에는 황녀가 제 옆에 꼭 붙어 있으라고 했지만, 레이블라가 정중히 사양했다. 그 자리는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하며, 비교적 순한 아이들을 관리하겠다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했었다.
막상 마주한 건 순둥이가 아니라 양의 탈을 쓴 꼬마 늑대 같은 녀석들이었지만.
‘저 꼬꼬마들을 어떻게 하기는 해야겠네.’
황녀는 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고, 시녀들은 황녀를 신경 쓰느라 비교적 권세 낮은 가문의 아이들에겐 소홀했다.
고통받는 것은 울고 떼쓰는 꼬꼬마들과 근처 테이블에 앉은 아이들뿐이었다.
잠시 고민한 끝에 레이블라가 꼬꼬마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잔뜩 날이 서 있던 아이들이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