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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5)화 (15/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5화

    “레이블라.”

    반갑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레이블라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황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시야를 꽉 채운 건 달콤한 케이크였다.

    “이거 맛있어. 먹어 봐.”

    황녀는 케이크에 꽂힌 포크를 흔들면서 채근하듯 얼른 입을 벌리라고 했다. 정말이지 레이블라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는 이미 먹었어요, 전하.”

    “그건 시식이잖아. 그리고 개미 눈만큼만 먹었으면서.”

    “그래도 먹은 건 먹은 거지요. 얼른 드세요. 전하를 위해 만든 음식이잖아요.”

    “그렇지만 레이블라가 너무 말랐는걸.”

    황녀가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면서 레이블라의 몸을 훑었다. 볼품없이 마른 모습이 그녀의 붉은 눈동자 속에 담겼다.

    ‘마르기는 했지.’

    레이블라도 황녀의 말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그간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정말로 팔이 정말 뼈밖에 보이지 않는 수준이기는 했으니까.

    살이 찌려면 그만큼 먹어야 하는데, 그간 시식한 것을 모두 뱉어 낸 데다가 제대로 먹는 음식이라고는 밤에 몰래 정원으로 나가서 따 먹는 과일 한두 개가 전부였었다. 그나마 해독초를 얻은 뒤에 상황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이미 입맛이 사라진 후였다.

    “안 돼. 더 먹어야 해. 자, 아 해.”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더 큰 케이크 조각을 포크에 찍은 황녀가 레이블라를 향해 다시 음식을 내밀었다.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레이블라는 황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굴 때는 일단 들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상태였다. 그러니 다른 자리였다면 아마도 모두의 눈치를 보면서 음식을 받아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레이블라가 곤란하다는 눈초리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 그녀의 맞은편에는 집요하게 황녀만을 바라보고 있는, 황녀와 똑 닮은 미남이 있었다.

    황제였다.

    ‘……시선만으로도 따끔해 죽겠다.’

    왜 네가 그 자리에 앉아 내 딸의 음식을 가로채려 하느냐, 하는 속내가 가감 없이 전해졌다.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바로 딸과의 티타임이었다. 그런 자리에 대뜸 죄인 따위가 나타나서는 방해하고 있으니, 얼마나 불쾌할지.

    정말이지 친구였다면 눈치 좀 챙기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따님. 아빠 여기 있는데.”

    내내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황제가 말문을 열었다.

    그제야 레이블라만을 응시하던 황녀의 시선이 황제에게로 향했다. 황녀는 금방 그가 섭섭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황녀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미안하다는 듯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아빠. 레이블라가 너무 마른 거 같아서, 최근에 많이 먹이고 있었거든요.”

    “이 아빠는 우리 따님이 더 걱정인데. 오늘은 1g도 늘지 않았어.”

    “아빠도 차암.”

    황녀는 싫지 않은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많이 먹고 있어요. 이제 쑥쑥 자라서 아빠보다 더 클 거예요!”

    “그래?”

    “그럼요. 곧 아빠를 내려다볼지도 몰라요.”

    손을 번쩍 들어 팔을 쭉 펴면서 제가 이만큼 클 거라며 두고 보라는 딸의 행동이 귀여웠는지, 황제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소설에서 묘사되었던 것 이상으로 다정하고 아름다웠다. 소설에서 왜 황녀가 자기 아버지 외모를 그토록 찬양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재수 없네.’

    딸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애꿎은 애를 위협하는 게 어른으로서 할 짓인가. 만약 이 자리에 있는 것이 평범한 아이였다면 그가 뿜어내는 살기에 벌벌 떨다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도 아빠가 조금 참아 주셔야 해요. 요즈음 제가 레이블라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 중이거든요.”

    ……아니,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세요.

    겨우 황제의 위협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눈치 없는 황녀가 또다시 레이블라를 화두에 올렸다.

    “네가, 노력을?”

    감히, 네놈이 감히, 하늘 같은 따님을 ‘노력'씩이나 하게 하냐는 듯 서늘한 목소리였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날 죽이려는 건지, 관심인지 이제 구분이 안 되네.’

    확실히 황녀의 태도에는 의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레이블라. 이리 와.’

    황녀의 곁에서 시식을 하게 된 다음 날. 일을 마친 뒤 바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황녀가 갑자기 레이블라를 불러서 서재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옆에 앉히더니 어느 책을 펼치고 대뜸 질문을 시작했다.

    ‘이 법에 대해 알고 있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

    그녀가 질문한 것은 제국의 법률에 관한 것이었다. 가문을 이어받을 아이라면 배웠을 만한 내용이었다. 그다지 특별하진 않았다.

    하지만 보통은 정식 후계자가 되는 10살 이후에나 배우는 내용이었고, 어쩐지 알고 있다 대답하고 나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래. 엑스트라는 멍청한 게 낫지.’

    이 세상에서 빛나야 할 것은 주인공뿐이고, 그 아랫것들은 그 빛을 더 부각하기 위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는 아는 것을 드러내기보다는 숨기는 것이 나았다.

    ‘모르겠어요.’

    레이블라가 답하자, 황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정말 몰라요.’

    ‘그럼 초대 황제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모르겠는데요.’

    ‘제국 아이들이라면 모두 아는 건데도?’

    그런가?

    어느 것을 알고, 어느 것을 모른 척해야 하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기에 그냥 모두 모르쇠로 반응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패착이었다.

    ‘레이블라! 이거! 이거 뭘까?’

    ‘오늘은 내가 이걸 알려 줄게.’

    그 뒤로 황녀가 자꾸 무언가를 가르쳐 주고 검사하듯 확인하는 일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저 정말 모르겠어요.’

    ‘아니야. 레이블라도 아는 거야.’

    도대체 어디서 오는 믿음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토도리아 풀의 부작용을 지적한 일로 그러는가 싶어서, 그때는 우연이었다고 변명했지만, 황녀는 그저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레이블라는 똑똑하니까!’

    어쨌든 그렇게 자연히 황녀의 곁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황녀의 자잘한 심부름을 도맡고 있었다.

    마치, 황녀를 모시는 직속 시녀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목숨이 날아가는 바로 그 자리 말이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황녀의 의도대로 그녀의 시녀가 될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목숨으로 충성을 다해야 하는 역할이 된다 생각하자, 해독초 없이 시식가 일을 할 때처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되는대로 주변 시녀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최대한 황녀가 부를 수 없게끔 바쁜 체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그 노력이 빛을 발한 탓에 황녀와의 시간이 많이 줄어들긴 했다.

    ‘문제는 이제 주변에서 내가 잡일꾼인 줄 안다는 거지만.’

    시도 때도 없이 시녀들에게 불려 다니는 통에 쉴 시간이 없어졌다. 슬프게도.

    ‘해독초도 가지러 가야 하는데.’

    황녀가 자꾸만 음식을 더 먹이려 드니 예상보다 해독초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식후에 증상이 있든 없든 늘 복용하고 있는 탓에 많은 양의 해독초가 필요해졌는데, 문제는 이 약초가 말린 것은 크게 효능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연구해 보면 좀 더 개발이 가능할 것 같은데.’

    그럴 시간도 없고, 그럴 장소도 없었다.

    그러니 자주 가서 가져오는 수밖에는 없는데, 늘 일이 미어터지니 죽을 맛이었다.

    “다과회를 연다면서?”

    그때 상념을 깨듯 황제가 내내 별 관심도 없는 주제로 열변을 토하는 딸에게 물었다. 황녀가 그가 내민 주제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네! 일주일 후에 열기로 했어요. 7살이 되어 처음으로 여는 다과회라서 설레요.”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말고. 적당히 해.”

    “에이, 어떻게 그래요. 그리고 저는 딱히 하는 거 없어요. 라니엘과 줄리아가 열심히 준비해 주는걸요.”

    “눈 아래가 검게 물들었는데.”

    “정말요?”

    황녀가 놀란 표정으로 주먹을 쥐어 눈 밑을 비비자 황제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황녀의 얼굴을 쓸었다. 손길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적당히 해도 괜찮아. 실수하더라도, 우리 딸이 최고라는 것은 변함없으니까.”

    그의 말에 황녀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후에 티 푸드 시식해야 해요. 새로운 티 푸드를 선보일 거거든요.”

    황녀가 폴짝 뛰어내리듯 의자에서 내려와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힘껏 안아 주고 속삭였다.

    “아빠, 저녁 식사 때 뵈어요.”

    황제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주 웃자, 황녀가 활발한 목소리로 그럼 가 보겠다고 하며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레이블라는 황녀를 따라가기 전에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황제의 시선이 레이블라에게 내리꽂혔다.

    황녀가 있을 때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살벌한 시선이었다.

    “네가 누구 때문에 그 목숨 지키고 있는지 잊지 말도록.”

    그리고 경고해 왔다.

    황녀 때문에 살아 있음을 잊지 말고, 주제 파악을 하라고.

    레이블라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그의 말을 삼켰다. 그러자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비체라발리가 너의 주인을 위협하고 있단 것을.”

    황녀가 무탈해야 네가 살아남지 않겠느냐?

    작게 덧붙이면서 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등골이 오싹할 만큼 차가운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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