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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4)화 (14/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4화

점심 시식이 끝나자, 레이블라는 바쁜 몸짓으로 황녀궁을 벗어났다. 귀족원. 비체라발리 공작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비체라발리 공작이 황궁에 있다고 했어.’

그가 오늘 황궁에 있다고 황녀가 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고맙다고 말해야지.’

목숨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은 역시나 해독초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체라발리 공작의 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먹었던 독은 말 그대로 맹독이었다.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치명적인 독.

하지만 비체라발리 공작이 빠르게 응급조치를 해 주어서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늘 품에 갖고 다니는 작은 약병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전장에 자주 출전하시는 공작님께서 늘 갖고 계시는 약들입니다. 개중에 독에 듣는 약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떨떠름하게 생각하던 의사들이 그리 말했으니 그건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감사의 인사를 직접 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요즈음 아빠가 공작 때문에 많이 기분이 나쁘신 것 같아. 그러니까 레이블라도 조심해, 알았지?’

황녀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황제의 심기가 눈에 띄게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비체라발리 공작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위험하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바람 앞의 촛불처럼 생명을 지키고 있는 레이블라로서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멀어지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그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오늘은 괜찮겠지.’

‘레이블라 펠리시티’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도움받았다는 사실을 알 테고, 그 만남을 이상하게 볼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 오늘은 당당하게 만나도 괜찮았다. 겸사겸사 탁 트인 곳에서 감사의 말을 전하며, 모두에게 딱히 큰 접점이 없는 사이라는 것도 알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머리카락을 훤히 드러내며 당당히 걸었다. 보는 사람이 많아야 그들의 입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갈 테니까.

“……비체라발리가?”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블라의 신경을 자극하는 문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앞서가던 기사들이었다.

“황제 폐하의 명을 거절했단 말이야?”

“솔직히 나라도 싫을 거야. 포스타리모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그래도 황제 폐하의 명이면 가야지. 제국의 귀족이라면 응당 황제 폐하를 따르는 것이 마땅한 거야. 펠리시티가 폐하의 적이라면 비체라발리는 그냥 개잖아.”

“그건 그렇지.”

“황녀 전하를 위해서라도 얼른 전쟁을 끝내는 것이 당연해.”

“하긴. 황녀 전하께 위협이 되는 것은 얼른 치워 버리는 게 좋지.”

……갑자기 황녀?

황녀가 한 번 화제에 오르자 그들의 대화는 황녀에 관한 것으로 쭉 이어졌다. 황녀가 최근 기분이 좋지 않았다든가, 그래서 자기들 마음이 다 아프다든가, 행복해지셨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들.

더는 들을 것이 없었기에, 레이블라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생각에 잠겼다.

‘비체라발리 공작이 전쟁터에서 반역을 준비했다고 했지? 대충 10년 넘게 준비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처음에는 그래서 포스타리모와의 전쟁이 2부가 시작될 10년 후까지 내내 이어진 줄로만 알았었다. 하지만 그 전쟁은 얼마 전에 끝이 났다.

‘그럼 이번 전쟁에 다시 투입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아직 반역을 저지를 결심을 한 건 아니라는 뜻이네?’

소설 2부에서 비체라발리 공작은 반역을 일으켰다.

전쟁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반역을 결심한 그는 전쟁터에 도착하자마자 황제의 첩자를 모두 처리하고 황궁으로 가는 정보를 조작했다.

세간에는 10년이나 전쟁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비체라발리 공작이 이미 전쟁 초기에 적국의 항복을 받아 낸 상태였다.

그는 이 사실을 황제에게 숨긴 채 의미 없는 교전을 수년간 거듭했다. 모두 반란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전쟁을 하는 것도 지루해져서, 황좌라도 노리면 재미있을까 싶었다고 했었지.’

레이블라는 실제로 보았던 비체라발리 공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세상 살기 지루하다며 닥치는 대로 부수거나, 살육에 미치거나, 앞뒤 구분 못 하고 황위를 탐내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정말로 전쟁이 지루할 정도로 쉬웠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소설에 따르면, 비체라발리 공작이 출전한 전쟁은 적국이 항복을 선언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만큼 치열하다고 했다. 연속된 대패로 비체라발리 공작의 패전을 점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 갑자기 황좌를 노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탐욕? 복수? 분노? 호기심? 그 어떤 것도 타당성이 없어 보였다.

……그럼 혹시.

‘소설에서는 비체라발리 공작이 공격한 것으로 나왔지만, 사실 반대였다면?’

황제가 먼저 비체라발리를 노렸다면, 그래서 반역을 준비한 것이라면?

‘황제라면 그럴 만하지.’

황좌를 위협하는 세력을 지닌 두 가문, 펠리시티와 비체라발리. 그중 한 가문이 무너졌으니 남은 한 가문만 제거한다면 황제는 절대 권력의 시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음 황제가 될 황녀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막강한 권한을 지닌 황제로 거듭날 것이다.

역대 황제가 오랫동안 바랐던 대로 말이다.

‘소설에서 자주 언급된 이야기였지.’

황녀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완벽한 상태로 주고 싶다고.

‘정말로 그런 거라면 정말 비체라발리와는 얽히지 않는 게 좋겠어.’

가까워져 봤자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황제에게 집중 견제를 받는 비체라발리 입장에서는 반역자인 펠리시티 가문의 마지막 핏줄과 얽혀서 좋을 것이 없고, 레이블라 또한 괜히 엮였다가 추후 그들의 멸문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악역인 그들은 주인공인 황제와 황녀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멸문으로 고통받는 건 한 번이면 족하므로.

고민 끝에 레이블라는 빠르게 돌아와 편지를 썼다. ‘그간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앞으로는 도와주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공손하게 덧붙였다.

‘사람 뽑을 때 주의하라는 말은 해 둬야겠다. 걸러 내야 할 사람 특징도 써 줄까?’

비체라발리의 반역이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황제가 심어 놓은 첩자를 모두 걸러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비체라발리의 가신이 황제에게 속속 정보를 배달했던 것이다.

‘10년 넘게 일한 가신이었다고 했으니 지금쯤 있겠지? 어쩌면 걸러 낼 수도 있고.’

이것 하나로 미래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혹시 아나? 악역인 비체라발리 공작이 정말로 주인공을 이겨 줄지.

‘남주만 정신 차리면 해볼 만할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남주 로이안은 이미 황녀에게 감화가 된 상태일 것이다. 황녀는 그에게 있어 외삼촌의 학대로부터 구원해 준 천사와 다름없을 테니까.

작은 한숨과 함께 편지를 밀봉한 레이블라는 비체라발리 공작가의 마차가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비체라발리 공작을 만나지 않고, 몰래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공작가의 마차를 임시로 두는 곳이어서인지 주변은 한산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편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굳이 마부에게 전달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나?

주변을 쓱 둘러본 레이블라가 재빨리 마차 문의 틈새로 편지를 밀어 넣었다.

편지 전달을 마친 레이블라는 빠르게 마차에서 멀어졌다.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고하고 돌아가는 길은 생각만큼 홀가분하지는 않았다.

* * *

아이가 분홍빛 머리카락을 나붓거리며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카시우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활짝 문을 열어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주워 들었다.

[레이블라 펠리시티.]

아이답지 않게 깔끔하게 쓴 이름이 가장 먼저 두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편지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은은한 꽃 내음과 함께 투박한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퍽 소박한 양식이었으나, 내용은 달랐다. 꼼꼼하게 내용을 읽은 카시우스의 시선이 다시금 아이가 멀어진 곳으로 향했다.

짤따란 다리로 어떻게 그리 빨리 움직이는지, 살랑살랑거리던 분홍빛 머리는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어려도 펠리시티는 펠리시티군.’

매사 의문스럽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영락없는 펠리시티였다.

펠리시티의 아이는 보면 볼수록 정말 이상한 점투성이였다.

권세 있던 가문이 한순간에 나락에 빠진 데다, 제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얼마 전에 독을 먹었으니,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터였다.

살려 달라고 매달릴 만한데 되레 아이는 그를 피해 다니는 듯했다.

게다가 이 메시지는 무어란 말인가.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아 왔기에, 저 어린 꼬마가 그가 원하는 정보를 적절한 순간에 알맞게 포장하여 보내는 건지.

도대체 어디까지, 무엇을 알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헤넌.”

“예, 공작님.”

“저 아이를 데려올 방법을 찾도록.”

그러니 곁에서 한번 지켜볼 작정이었다.

그놈의 펠리시티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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