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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3)화 (13/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3화

대개 시식가는 모든 음식에 독이 들었으리라 의심하면서 시식하다 보니 표정이 굳을 때가 많았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먹을 테니까.

그런데 얼마 전에 독을 먹은 아이가, 독이 들었을지도 모를 음식을 먹으면서 웃다니.

당황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레이블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품을 뿐이었다.

레이블라가 어리둥절해하며 시식하려는데, 벌컥. 문이 열리더니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레이블라!”

환하게 미소 짓는 이 세상의 주인공, 황녀였다.

“돌아온 거야?”

황녀가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오더니 대뜸 레이블라를 안았다. 마치 오랫동안 떨어져 살다 만난 가족을 대하는 듯 친밀한 모양새였다.

“이제 괜찮아? 괜찮은 거지?”

뜻밖의 환호에 레이블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힘껏 죄고 있던 팔을 푼 황녀가 그런 레이블라를 마주 보며 다시금 웃었다.

“반가워. 레이블라. 돌아와 주어서 정말 기뻐.”

“……저, 저도요. 저도 반갑습니다, 전하.”

“응.”

황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블라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시선이 시식을 위해 둔 음식에 닿았다. 순식간에 황녀의 입꼬리가 내려왔다. 꽃처럼 화사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아직도 시식하는 거야?”

“네.”

시식가니까.

레이블라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황녀의 어깨가 실망스러움을 그려 내듯 추욱 내려갔다. 목소리 또한 생기를 잃었다.

“그럼, 내 제안은 거절하는 거지? 시녀로 일할 생각은 없는 거야?”

그걸 어떻게 하니.

목숨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텐데.

레이블라는 무시무시했던 황녀의 아빠, 황제를 떠올리며 속으로 치를 떨었다. 그 인간에게서 토끼몰이 당했던 지옥 같은 순간들이 되새겨졌다.

황녀의 곁에 서는 순간, 황제의 집요한 탐색이 시작될 텐데,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역시, 그 방법뿐인가.’

어쩔 수 없지.

레이블라는 다소곳한 목소리로 황녀를 불렀다.

“전하.”

황녀가 제 눈높이와 비슷한 아이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힘없이 답했다.

“……응.”

“시식가는 황녀 전하를 안전하게 지키는 중요한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황녀 전하를 지키는 이 일을 정말 좋아해요. 제 가문의 잘못을 이 일로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어요.”

“레이블라…….”

황녀는 레이블라의 진심 어린 이야기에 감동한 듯, 기쁨과 놀라움이 섞인 눈빛으로 레이블라를 응시했다. 레이블라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제 부탁, 들어주실 거죠?”

양손을 맞잡고 제발요, 하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일순 황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겉은 아이지만 속은 17살이다 보니 황녀는 소설 속에서도 어린아이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거절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레이블라의 간절한 모습에 황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뜩 무슨 생각이 난 건지 눈을 크게 뜨고 기쁘게 웃으며 손뼉을 마주쳤다.

그리고 레이블라가 기겁할 만한 대안을 내어놓았다.

“그럼 우리 친구 하면 되겠다!”

……네?

레이블라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녀장을 응시하자, 시녀장, 라니엘 소이가 다급하게 말했다.

“전하. 비록 이 아이가 지금은 시식가이기는 하나, 가문이 반역죄로 멸문하여 죄인의 신분이 되었기에,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에는 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레이블라는 레이블라인걸.”

“그건 그렇지만…….”

“레이블라는 나 대신 독을 먹었고, 나를 위해 노력해 주는 아이이니 내 친구가 될 자격은 충분해.”

그치? 하면서 황녀가 레이블라를 보았다.

정말이지 고개를 돌려서 외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싫다는데도 막무가내로 쫓아올 수 있는지.

레이블라는 도와 달라는 눈빛으로 시녀장을 쳐다보았다.

‘여러분, 제가 황녀 전하의 근처로 가는 걸 싫어하지 않으셨나요? 빨리 일 안 하세요? 제가 지금 죽게 생겼잖아요.’

……라는 마음을 담아서.

라니엘 또한 정말 난감한 표정이었다. 펠리시티를 곁에 두기는 찜찜한데, 황녀가 저렇게 확신하니 무슨 사정이라도 있나 싶은지 상황을 살피는 기색이었다.

그간 황녀가 막무가내로 떼를 쓰면 그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특히나 라니엘 소이. 저 시녀 또한 황녀가 구원해 준 인물이기도 했다.

라니엘 소이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황녀 전하의 뜻대로 하세요. 폐하께서도 전하의 뜻이라면 이해하실 거예요.”

“와아!”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황녀가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으며 기쁨을 표하더니 그대로 그 팔을 레이블라에게 둘렀다.

꼬옥 안으면서 기쁜 마음을 쏟아 냈다.

“이제 우리 친구야!”

……아니, 여러분. 제 의사는 없는 건가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모두의 시선은 황녀의 기뻐하는 모습에 쏠린 상태였다.

‘또 세상이 날 버렸구나.’

레이블라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전하.”

* * *

황녀의 행동력은 정말이지 엄청났다. 바로 다음 시식부터 레이블라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으니 말이다.

“……어때? 괜찮아?”

작은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조용히 시식하던 레이블라를 향해 염려 섞인 물음이 돌아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루비빛 붉은 두 눈이 기대감을 담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꿀꺽.

음식을 삼킨 레이블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황녀가 기쁜 듯 웃으며 다른 음식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도 먹어 봐. 요리장에게 내가 특별히 부탁한 거야. 레이블라도 좋아할 것 같아서.”

황녀가 고심해서 내민 음식은.

‘……마시멜로.’

산처럼 쌓인 알록달록한 마시멜로였다.

“레이블라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나 물어보니까, 마시멜로를 아껴 뒀다가 제일 마지막에 먹었다고 하길래.”

그건 싫어서 제일 마지막까지 버려둔 건데요.

싫고 좋음을 티 내지 않았던 탓에, 곁에 있던 시녀들이 잘못된 정보를 준 모양이었다.

“이건 다 레이블라 거야. 그러니까 마음껏 먹어도 돼!”

“……감사합니다, 전하.”

기대하는 황녀의 눈빛에 어쩔 수 없단 듯 레이블라가 분홍빛 마시멜로 하나를 들고 입에 넣었다. 황녀가 특별히 이야기해서 만든 것이라고 하니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며 먹었으나,

‘똑같잖아…….’

매번 시식하며 먹었던 바로 그 맛이었다.

이걸 다 먹어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했지만 레이블라는 연신 맛있다며 웃었다. 황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뒤늦게 제 식사를 시작했다.

‘그래도 확실히 황녀 곁에서 시식하니 좋긴 좋네.’

이전에는 황녀가 무슨 음식을 먹을지 몰라 모든 것을 살펴야 했다면, 지금은 황녀의 손이 닿는 것을 미리 먹어 보는 정도였다.

그러니 먹을 양은 적어지고, 황녀가 식사를 마치면 곧장 업무가 끝이 나니, 휴식은 길어졌다.

게다가 시녀들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이전에는 음식을 내려놓거나, 식기를 치울 때 불만 가득한 마음을 팍팍 드러냈었는데, 지금은 잠잠했다. 조심스럽게 식기를 내어 주고, 음식을 놓아주는 손길에서는 정중함이 느껴졌다.

황녀가 곁에 있기 때문인지 제대로 시식가 대우를 해 주는 듯해서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황녀의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아기 새에게 모이를 먹이는 엄마처럼 자꾸만 음식을 갖다 바치며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통에 조금 많이 부담스러웠다.

“그럼 이번에는 이거 먹어 볼래. 레이블라도 좋지?”

……바로 지금처럼.

늘 시식을 도와주던 시녀 줄리아 햄프턴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작은 접시에 음식을 올려 주었다. 그런데…….

‘이거 토도리아 풀 아닌가?’

비체라발리 공작이 준 식물도감 서적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피를 맑게 해 주고 피부에도 좋아서 미용을 위해 먹는 약초라고 되어 있었다. 크게 부작용은 없지만, 드물게 10살 미만의 아이가 먹었을 시 배탈이 날 수도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다고 했었다.

‘말해야 하나?’

우물우물. 입 안에 넣고 맛보던 레이블라가 가만히 고민했다.

알고 요리했을 텐데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하지만 어쩌다가 배탈이라도 나면 그 책임이 시식가에게 오지 않을까?

“저어.”

결정을 내린 레이블라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황녀가 곧장 대답했다.

“왜, 레이블라?”

평소라면 레이블라의 부름 따위에 시큰둥했을 텐데, 황녀가 반응하자 시녀들이 즉각 레이블라를 쳐다보았다.

조금, 놀랐다.

“혹시, 이 음식에 토도리아 풀 넣으셨나요? 이 약초는 아이가 먹었을 때 배탈이 날 수도 있다고 알고 있어서요.”

라니엘이 즉시 하녀에게 눈짓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요리장이 허겁지겁 와서는 풍미가 살아나서 한 번 넣어 보았다고 했다. 큰 부작용이 없다고 들어서 넣었다며, 레이블라에게 고까운 표정을 지었다.

레이블라는 서적의 이름과 페이지를 알려 주며 그 증거가 제 방에 있음을 알렸다.

곧바로 약제사가 호출되었다. 확인이 끝나자 요리장은 죄송하다며 사죄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요리가 식탁에서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책 페이지 수까지 정확히 기억했잖아.”

확인이 끝나고, 흥분한 얼굴로 황녀가 레이블라에게 물었다. 레이블라는 차분하게 답했다.

“황녀 전하를 위해 시식가로서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밤낮으로 책을 읽다 보니 우연히 맞혔을 뿐이에요. 제가 개정된 책을 읽어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싱긋. 미소로 마무리하자, 황녀가 ‘봤지?’ 하는 표정으로 으쓱하며 모두를 보았다.

제 자식을 자랑하는 엄마 같은 모습이었다.

이에 시녀들의 눈빛에도 변화가 일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이번만큼은 인정해 주겠노라고. 계속해서 지켜보겠노라고.

‘적이었지만 황녀에게 감복해 충신이 된 엑스트라’로 승진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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