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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1)화 (11/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1화

힐링물의 여주는 정말로 무자비했다.

웃기만 하면 간이고 쓸개고 모두 내어 주게 되니 말이다.

‘이게 어떤 꽃인데.’

그녀에겐 생명 줄과 같은 존재인 것을.

레이블라는 황망한 눈빛으로 보랏빛 꽃을 바라보았다. 족히 열 송이는 될 법했던 해독초가 이제는 달랑 하나만 남아 있었다.

‘칼슨 경에게 주고 싶어.’

처음에는 딱 한 송이만 주려고 했는데.

실타래로 엮은 것처럼 무슨 경, 무슨 경 무슨 경 이름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그래서 결국 단 한 송이만 남긴 채 모두 줄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시녀들이 황녀가 제게도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바람에 빼앗길 뻔했지만, 황녀의 시선을 돌린 끝에 겨우 사수할 수 있었다.

‘이거 더 있기는 한 거겠지?’

없으면 어떡하지.

풍성한 꽃을 보며 느긋해졌던 마음이 한 송이의 꽃과 함께 다시금 초조해졌다.

‘황제를 믿어 볼까?’

어쩌면 황녀가 ‘꽃이 예쁘다’라고 했단 소리가 황제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황제가 꽃을 구해다 준다면 소설 속에서처럼 발에 챌 만큼 많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죽으면 끝 아닌가?

‘하여튼 진짜 도움이 안 돼.’

이놈의 주인공들과 얽히면 되려던 일도 다시 꼬였다. 남들은 주인공과 얽히면 행복해지고 미소가 피어난다는데. 어째서, 나만, 홀로.

‘다음에는 절대로 힐링물에서 환생하지 말아야지.’

누가 힐링물과 피폐물 중 어느 장르를 선호하느냐고 묻는다면, 레이블라는 단호하게 답할 수 있었다.

혼자만 불행한 힐링물보다야 차라리 모두가 망하는 피폐물이 낫다고.

‘이럴 때가 아니야. 얼른 그 아이를 만나야 해.’

소년이 올지도 모를 묘비를 찾아가려다 황녀에게 방해받았던 것을 떠올린 레이블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는 두건으로 싸서 숨기고, 소년에게 주려고 했던 쪽지가 주머니 속에 잘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조심히 출입문을 열어 바깥을 살폈다.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늘 조용하던 약제소가 떠들썩했다.

기사들이 마수 토벌을 마치고 돌아왔다더니 부상자들이 많은 듯했다.

‘방에 격리되어 있느라 몰랐네.’

창문으로 나갈까?

볼품없기는 하지만, 수많은 사람의 시선에 닿는 것보다야 나을 듯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뒤 문을 닫고 상체를 틀려는데, 레이블라의 시선을 끄는 환자가 있었다. 그는 제법 심각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곁에서 치료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가볍게 넘어져서 생긴 상처도 마땅한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그때 멀찍이서 대화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는 하셨습니까?”

“예. 하지만 교전이 길어져 투여가 늦었습니다.”

“상태를 보아 하니 투여 시기를 놓친 듯합니다. 이대로 두면 세 시간을 채 버티지 못할 겁니다. 마법사나 신관에게 보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녀석은 평민입니다.”

“아.”

저 사람들이 말하는 ‘이 녀석’은 아마도 레이블라의 시선 끝에 닿은 기사를 가리키는 듯했다.

‘평민이라 그렇구나.’

이 세계에서 마법사나 신관은 그 수가 현저히 적었고, 특별한 만큼 콧대도 무척 높았다.

하위 귀족은 물론이거니와 평민이 그들에게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방법이 없는 겁니까?”

“글쎄요…… 쉽지는 않을 듯합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부상당한 기사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의사들은 계속해서 밀려드는 기사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레이블라는 살금살금 그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상처는 확실히 심각했다.

‘마수에게 당했나 보네.’

등을 가로지르는 세 줄의 긴 상처. 그리 깊지 않은 데다 제때 응급 치료를 해 둔 덕인지 상처 부위는 깨끗했다.

다만, 상처 부위가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독이었다.

‘마수 중에는 피부나 발톱에 독이 있는 종이 있다고 했지.’

하필 그런 놈들에게 당한 걸까.

기사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의식이 없음에도 작은 신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깊은 수면으로도 극복하지 못할 만큼 지독한 통증이 있는 모양이었다.

‘곧 독이 심장에 닿겠네.’

그쯤은 의사가 아니더라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거, 내 해독초면 살겠지?’

소설에서 설명된 것처럼 그녀가 구한 해독초가 정말로 모든 독을 중화시킬 수 있다면, 아마도 이 사람은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해독초가 이제 단 한 송이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만약 그에게 준다면, 오히려 레이블라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아니, 정말로 위험했다. 앞으로도 계속 황녀의 시식가로 일해야 하니까.

‘황녀가 가져가지만 않았어도.’

다시 돌려 달라고 하면 안 되려나.

하지만 이미 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테고, 기사들은 황녀에게서 하사받은 꽃을 가보처럼 여길 테니 되돌려 받을 길도 요원했다.

‘마음 같아서는 무시하고 싶은데.’

하지만 살릴 방도가 있는데도 모른 척 외면한다면 앞으로 발 뻗고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겠어.”

작게 한숨을 내쉰 레이블라가 병실로 돌아갔다. 효과가 있는 것은 꽃잎뿐.

그녀는 곧장 보랏빛 꽃잎을 떼어 입에 넣기 쉽게 돌돌 말아 다시 기사에게 돌아왔다. 아무도 이쪽을 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레이블라가 기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제가 주는 거 먹으면 나을 거예요. 불편하더라도 꾹 삼키셔야 해요. 아셨죠?”

레이블라는 작은 손으로 그의 턱을 가볍게 눌렀다. 통증을 참으려 악다문 입술은 굳게 닫힌 채였다.

“잠깐이면 돼요. 어른이니까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입 벌려 보세요. 아, 하고.”

조곤조곤 채근하면서 턱을 두드리자, 치밀하게 닫혀 있던 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레이블라가 동글동글 작게 만든 보랏빛 꽃잎을 쏙 밀어 넣었다.

“됐어요. 이제 삼키시면 돼요.”

“…….”

“괜찮아질 거예요. 내일이면 금방 건강해져서 뛰어다닐 수 있을지도 몰라요. 불안해하지 말고, 편히 쉬세요.”

그러면서도 사라진 해독초가 못내 아쉬운 듯 시무룩한 표정을 짓다가 한마디 더 작게 속닥거렸다.

“제 목숨을 빌려드린 거예요. 그렇다고 뭘 바라는 건 아니지만…… 다 낫고, 혹시 꼭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시면 나중에 제 편이나 되어 주세요. 아셨죠?”

의식 없는 사람에게 떠들어 봤자 닿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마지막 해독초를 썼다는 아쉬움을 달랬다.

제 할 일을 마친 레이블라는 서둘러 남들 눈을 피해 병실 창문을 넘어 약제소를 나섰다. 아이의 부모님 묘에 가서 쪽지를 두고, 근처 숲을 조금 둘러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몰랐다. 고통에 절어 힘없이 헐떡이던 기사가 제 말을 듣고 있었다는 것도. 멀어지는 그녀를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 * *

달이 높게 뜬 밤.

톡톡. 자꾸만 들려오는 소리에 레이블라의 의식이 빠르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눈을 뜨자 이제는 익숙해진 약제소 병실의 천장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짙은 어둠이 사위를 감싸고 있었다. 늦은 밤, 혹은 새벽인 듯했다.

톡.

다시금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소리가 난 방향에 창문이 있었다. 창문에 무언가가 부딪치는 듯했는데…….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레이블라가 다급히 상체를 일으켜 창문에 다가섰다. 창문 너머에는 그토록 기다렸던 북부 대공을 닮은 아이가 서 있었다.

레이블라는 기쁘게 웃으며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려는데, 그가 먼저 기다렸다는 듯이 창문을 넘어 그녀 앞에 섰다.

가까이서 마주한 아이는 역시나 훈훈한 미모였다.

“안녕? 이렇게 빨리 볼 줄 몰랐는데.”

메시지를 가져다 둔 것이 어제 오후였다. 그래서 최소 일주일은 기다려 보자고, 너무 초조해하지 말자고 자신을 다독였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혹시 내가 남긴 메시지 봤어? 보고 온…….”

“말해.”

반가운 마음을 쏟아 내는데 그가 레이블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네가 알고 있는 내 비밀이 무엇인지, 당장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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