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0화
레이블라가 이 세상이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 깨달았을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주인공, 에리나였다.
그녀가 정말로 회귀한 상태인지, 소설에서처럼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는지가 너무나도 궁금했었다.
만약 홀로 힘겨워하고 있다면 외롭거나 쓸쓸하지 않도록 안아 주고, 위로해 주며 친구가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에리나 때문이었다.
그녀의 미래가 꽃길인 것을 아니까. 괜히 끼어들었다가 그녀의 미래가 어그러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웠으니까.
그래서 그저 지켜보기로 했었는데, 그게 인생 최대의 실수가 될 줄이야.
정말로 응원하며 행복하길 바랐던 아이가 제 등에 칼을 꽂을 줄 누가 알았을까.
한때는 원망이 차올랐지만 지금은 그저 얽히고 싶지 않은 마음뿐이었다.
비록 의도치 않게 시식가가 되었으나 절대 그녀와 마주치지 않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다행히 시녀들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렇게 동선을 꾸려 주어서 안도했었는데…….
……왜 갑자기 나타나세요?
“……레이블라, 괜찮아?”
“아, 네, 네! 괜찮아요.”
당황한 낯을 지운 레이블라가 굳은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에리나가 마주 웃었다. 귀엽고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내 시식가였다면서? 몰랐어.”
“모르는 게 당연해요.”
성인 황족의 경우에는 곁에 시식가를 두고 같이 식사하는 편이지만, 아직 어린 황족일 경우에는 숨어서 시식하기도 했다. 어린 황족에게 큰 충격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아니야. 알았어야 했는데. 미안해. 나 때문에 독을 먹은 것도 미안하구.”
황녀의 황금빛 눈썹이 추욱 내려갔다. 누가 봐도 속상하다는 얼굴이었다.
이에 곁에 따라붙은 시녀들의 날카로운 눈빛이 레이블라에게 쏟아졌다. 지금 무엇을 하느냐는 눈빛이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전하. 제가 해야 할 일이었어요.”
“아니야. 너처럼 어린아이가 그런 위험한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거야. 내가 아빠한테 말씀드려 볼게.”
애초에 레이블라가 시식가가 된 것이 바로 어리기 때문이었다. 나이와 성별을 따져서 효력을 발휘하는 특수한 독까지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황녀가 황제에게 말을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황제에게는 황녀의 안전과 생명이 최우선일 테니까.
하지만 레이블라는 그런 생각을 숨긴 채 감사하다고 했다.
그녀의 인사에 황녀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몸은 괜찮아?”
“네, 염려해 주신 덕분에요.”
“다행이다. 아. 혹시 노예 신분이라서 치료해 주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면 나에게 말해. 내가 또 혼내 줄게.”
……노예?
‘아. 노예이긴 하던가.’
원래 시식가는 하급 귀족에 준하는 시녀와 동등한 신분이지만, 이 역할을 벗긴 ‘레이블라 펠리시티’는 이제 노예였다. 반역으로 멸문한 가문의 자손에게 주어진 형벌이었다.
대역죄를 저지른 가문의 자손은 황제가 허락하지 않는 한 입양이나 결혼으로도 신분 세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죄가 확정된 죄인에게는 목 언저리에 낙인을 찍기도 했다.
형이 확정되기 전에 도망쳤던 레이블라에게는 다행히 없는 낙인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말이지 이놈의 세상은 평화로운 척만 할 뿐 들여다보면 참으로 흉흉했다.
“……그래서 말인데.”
마치 어제 헤어졌다가 오늘 또다시 만난 친구 대하듯 친근하게 재잘대던 황녀가 갑자기 말끝을 늘어뜨리면서 레이블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달라진 행동에 몰래 다른 생각을 하던 레이블라의 신경이 황녀에게로 향했다.
“레이블라, 너 내 시녀 할래?”
……응?
“지금도 시식가인데요.”
“아니, 그거 말고. 그건 위험하잖아. 아예 내 옆에서 내 일을 도와주었으면 좋겠어.”
스카우트 제의?
‘……혹시, 이게 인생에서 몇 번 없다는 역전의 기회인가?’
아무래도 대신 독을 먹고 살아난 계기로 황녀에게 눈도장이 찍힌 모양이었다.
‘내가 그럼 처음에는 적의를 품고 있지만 착하고 어진 주인공에게 감화되어 발 닦개, 아니, 충신으로 거듭나는 조연이 되는 건가?’
……그건 좀 싫은데.
보통 그런 역할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 혹은 황녀가 베푼 은혜를 갚기 위해 제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황녀에게서 신임을 받는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바깥출입도 자유로워질 것이고, 신뢰를 잘 쌓는다면 타국으로 가는 것을 기꺼이 허락해 줄 수도 있었다.
솔깃한 제안이긴 했다. 문제는 황녀와 얽히면 목숨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황제가 아빠잖아?’
황녀의 아버지는 기사가 말에서 떨어진 일도 황녀가 위협당한 일로 간주하며 신하들을 처벌하는 인간이었다.
황녀에게 작은 생채기만 생겨도 그때마다 누군가는 죽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게 자신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나?
‘게다가 황녀는 납치도 몇 번 당하고 암살자도 자주 만나잖아?’
육아물 여주이다 보니 황녀에게는 특이한 사건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맥락 없는 납치에, 이유 모를 죽음의 위기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 황제와 남주 후보들을 바쁘게 만들었었다.
그들에겐 애정을 재확인하는 에피소드에 불과할 테지만, 자신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진짜 얽히기 싫다…….’
레이블라가 답을 주저하자, 에리나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시녀들의 불같은 시선이 레이블라에게로 향했다.
이번에는 모른 척했다.
“그럼, 생각하고 이야기해 줘. 기다릴 테니까.”
“제안 감사합니다.”
“아니야. 난 똑똑한 레이블라가 필요한걸. 처음부터 받아들여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내가 더 노력할게. 그러니까…….”
“전하.”
황녀가 무어라 더 말하려는데, 뒤에서 소곤대던 시녀가 황녀를 불렀다.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마수 토벌을 나섰던 기사들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응, 벌써? 늦은 오후에 온다고 했잖아.”
“칼슨 경께서 황녀 전하를 뵙고 싶다고 무리하게 일정을 당기셨다고 해요.”
“칼슨 경이?”
레이블라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원작에서 도미닉 칼슨은 황궁 1기사단의 단장으로, 황제에게도 하지 않은 기사의 맹세를 황녀에게 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구원을 받았다나 어쨌다나.
“가야겠어.”
황녀가 들뜬 표정으로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레이블라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배웅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밖으로 나갈 것 같았던 황녀가 제자리에 멈춘 채 빤히 어딘가를 보았다. 소녀의 시선 끝에는 보랏빛 꽃이 있었다.
“꽃 예쁘다.”
……설마.
황녀가 쪼르르 다가가서는 라플 앞에 멈추어 섰다. 꽃을 보는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와, 이 꽃 어디서 난 거야?”
“제가, 제가 주워 왔어요. 근처에 피어 있었거든요.”
혹시나 선물 받았다고 하면 누구에게 받았는지 꼬치꼬치 캐물을 것 같아서 직접 주웠노라 답했다. 괜히 그 아이가 펠리시티와 얽혔다는 이유로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어디서?”
“글쎄요. 저쪽 어디였나?”
레이블라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대충 어딘가를 가리키며 갸웃거리자, 황녀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내가 보라색 꽃을 좋아하거든. 아빠에게 받은 처음 받은 꽃이 보라색 팬지라서.”
“그러셨군요.”
“이 꽃도 정말 예쁘다.”
어쩐지 대화의 흐름이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싶은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황녀야, 제발 그러지 말자. 응?
제발 ‘그 말’을 내뱉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빌었건만. 엑스트라에게 이 세상은 참으로 냉혹했다.
결국, 주인공이 그 한마디를 내뱉고야 말았다.
“레이블라, 혹시 저 꽃 좀 내게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