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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9)화 (9/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9화

“꺄악!”

커다란 비명을 들으며 레이블라의 눈앞이 흐려졌다.

희미해진 시야로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다들 레이블라를 걱정한다기보다 ‘누가 황녀 전하가 드실 음식에 감히 장난질을……!’ 하며 분노하는 얼굴들이었다.

해독초만 빨리 구했어도 이 사달은 안 났을 텐데. 거지 같은 약초. 왜 나에게만 비싸게 구는 거니. 너는.

살고 싶다.

정말로 살고 싶다.

하지만 아프고, 너무 아팠다. 마음과는 달리, 의식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앞이 새카맣게 물이 들고, 의식이 서서히 깊은 늪으로 침잠하려던 때였다.

그런데.

“레이블라.”

제멋대로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서 제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힘겹게 뜬 눈 사이로 비치는 보랏빛 눈동자.

모두 황녀에 정신이 팔린 와중, 자신을 향한 그 시선에 레이블라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 * *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에서 울음 섞인 비명이 쏟아지고 칼날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주변을 에워쌌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귀를 막아 보아도 생명이 꺼지는 소음은 잔인하리만큼 짙어서 손가락 사이로 스며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끔찍함에 눈물이 쏟아졌다.

‘렐.’

‘네, 아빠.’

‘나쁜 감정일수록 쌓아 두어서는 안 돼. 나쁜 일일수록 금세 털어 버리고, 원망도, 미련도. 그 어떤 것도 마음속에 남겨서는 안 돼. 알았니?’

‘그럴 수 없을 만큼 너무너무 나쁜 일이면요?’

‘그래도 노력해야지. 만약, 그래도 버릴 수 없는 감정이 남아 있다면 인상을 찌푸리지 말고 웃어보렴. 그럼, 좀 나아질 거다.’

펠리시티 공작은 원망도, 미련도 남기지 말라고 했지만, 레이블라는 바로 그날, 지독한 살의를 느꼈다. 죽이고 싶었다. 정말로 뼛속까지 갈기갈기 찢어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걸, 그럴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가씨. 피하셔야 합니다.’

‘…….’

‘아가씨!’

‘……하지만.’

모두가 아직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를 위해 힘껏 싸우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펠리시티의 유일한 후계자인 그녀가 어떻게 달아날 수 있을까.

레이블라가 고개를 젓자, 펠리시티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늘 부모님 몰래 그녀에게 목말을 태워 주던 삼촌 같은 존재였다.

‘아가씨.’

‘……응.’

‘아가씨께서는 아직 어리십니다. 아이가 어른들 때문에 피해 보기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펠리시티야.’

‘그러니 일단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아가씨의 생존을 바라면서 싸우고 있으니까요.’

‘…….’

‘공작님께서도 그걸 바라고 계십니다. 마지막 소원이셨습니다. 모두 잊고, 행복해지시라고요.’

기사단장의 말에 레이블라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정말로 들어주고 싶지 않은 소원이었으니까.

하지만 눈을 꼭 감아 눈꼬리에 매달린 마지막 눈물을 털어 낸 레이블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성을 떠나면, 다들 도망가. 도망쳐서 한 명이라도 더 살아야 해. 알았지?’

‘……예.’

‘꼭, 다시 만나. 혹시나 살아남는다면 대륙 서북부에 있는 바리베 왕국으로 가. 거긴, 괜찮을 거야.’

미리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조금만 생각이 깊었다면, 조금만 더 빨리 기억을 되찾았다면 너희들을 이렇게 죽음으로 몰고 가진 않았을 텐데 방심하고 있었다.

모두 내 잘못이야.

너무, 너무 미안해.

전하지 못한 미안함을 담아 그를 꼬옥 안아 주자, 그가 멈칫하더니 레이블라를 감싸 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레이블라를 감싸기도 전에, 그가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곁을 지키고 있던 유모도, 복도를 뛰어다닐 때마다 웃으면서 눈인사를 해 주던 수많은 사용인과 성 너머에서 싸우던 수많은 기사와 끔찍한 목소리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레이블라뿐이었다.

잿더미가 되어 버린 펠리시티의 고성 위에 소녀만이 홀로 서 있었다.

지독한 외로움과 서러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레이블라는 엉엉 울어 버렸다. 울다가 지쳐서, 더는 서 있을 힘이 없어 주저앉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러다가 너무 지친 나머지 그대로 눈을 감으려고 했다.

그랬는데.

‘……나비?’

갑작스럽게 나타난 나비 한 마리가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연둣빛 투명한 나비였다.

팔랑팔랑 날갯짓하던 나비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해 맴돌다 이윽고 쉴 곳을 찾은 것처럼 레이블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작지만 힘찬 날갯짓에 레이블라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 바람결에 달콤한 향이 훅 끼쳐 왔다. 너무나도 달아서 냄새만으로도 혀가 아려지는 듯한 향기였다.

레이블라는 저도 모르게 나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으윽…….”

지독한 생명의 무게가 느껴졌다.

‘아파…….’

정말이지 누군가가 몽둥이를 들고 온몸을 흠씬 두들긴 것처럼 욱신욱신 통증이 일었다.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 숨결이 떨릴 정도였다. 엄습하는 고통을 못 이긴 레이블라가 무언가를 힘껏 움켜쥐었다.

머리맡으로 얕은 한숨이 쏟아졌다.

“이번 한 번뿐이야.”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단단하게 앙다문 레이블라의 치아 사이로 무언가가 들어왔다. 달콤한 향이 나는 쓴맛 나는 것이었다. 우욱. 저도 모르게 구역질을 하자, 강한 힘이 레이블라의 입을 막았다.

“삼켜. 너 이거 필요하다면서.”

끝내 무언가를 삼키게 만든 녀석은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따스한 손으로 레이블라의 눈을 살며시 덮었다.

그게 신호가 되었는지, 레이블라는 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서히 사라지는 고통과 함께, 편안하게.

* * *

‘나 진짜 죽을 뻔했구나.’

오랜만에 침대에서 벗어난 레이블라가 힘차게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내가 또 비체라발리 공작의 도움을 받다니.’

독을 먹고 의식을 잃기 전, 비체라발리 공작을 본 것 같았는데. 눈을 뜨자마자 확인해 보니 정말로 그 사람이 비체라발리 공작이었다.

그가 갑자기 황제와 황녀의 티타임 자리에 나타나 쓰러진 그녀를 안고 황궁의 약제소로 데려왔다고 했다.

또한, 사람들이 많으면 안정을 취하기 불편하다며 1인실을 내어놓으라고 했던 것도 그였다고.

‘고맙기는 한데, 고맙지 않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은 감사하지만, 그 도움이 책을 빌려주었을 때처럼 선의에 의한 것은 아닌 듯했다.

그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 의식을 되찾은 그녀를 찾아왔던 비체라발리 공작의 가신이 말했었다.

‘그날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황녀궁으로 갔는데, 길이 엇갈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를 찾기 위해 황제의 궁에 돌아왔다가 상황을 목격했다고.

‘공작님께서는 아가씨가 갖고 계셨던 정보의 출처에 대해 궁금해하셨습니다. 아가씨께서 제공하신 정보는 선대 황제와 선대 비체라발리 공작이 어린 시절에 나누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정보는 폐하께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선대 황제의 유품에 있었고요. 그걸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편지에 ‘아빠가 알려주었다’라고 썼는데, 그게 너무 잘 먹힌 모양이었다.

‘혹시, 더 가지고 계신 정보는 없습니까?’

말하지 않으면 지하 감옥에 가둬 두고 심문이라도 할 기세여서 솔직히 좀 무서웠다.

‘앞으로는 얽히지 말아야지.’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감사하고, 또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그가 잘되었으면 하고 바라기는 했다.

하지만 별개로 그의 결말을 아는 이상 더 가까이할 수는 없었다. 그가 황제와 황녀를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특히나 그에게는 내부의 적, 아들 로이안이 있었다. 그놈이 황녀에게 눈이 멀어 비체라발리를 무너뜨리는 이상, 레이블라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아들을 죽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내 살길도 바쁜데 남까지 챙길 여유가 어디 있어.’

고작 약초 하나 못 찾아서 죽음을 오고 간 것만 해도 그랬다. 남의 앞날보다는, 스스로의 앞날을 먼저 챙겨야 했다.

길게 한숨을 내쉰 레이블라의 시선이 창틀로 향했다. 그곳에는 유리잔에 꽂힌 보랏빛 꽃이 있었다.

달콤한 향이 풍기는 그 꽃은 그토록 찾던 해독초, 라플. 즉 레이블라의 목숨줄이었다.

‘그 아이가 갖다 놓은 거겠지.’

레이블라가 해독초에 관해 언급한 사람은 그때 무덤 앞에서 본 붉은 눈을 지닌 소년밖에 없었다. 저도 모르는 꽃이 이곳에 와 있다면, 정답은 그에게 있었다.

‘만나서 물어봐야 하는데.’

어디서 찾았는지. 더 있는지.

하지만 황궁 안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것일 뿐, 그 아이가 누구인지도,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도 알 방도가 없었다.

다시 여기에 와 준다면 좋겠지만…….

‘아. 무덤.’

혹시 무덤에 메시지를 남기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라도 그가 메시지를 발견하고 위치를 알려 준다면 무작정 황궁을 헤집고 다니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그래. 무덤으로 가자.

결정을 내린 레이블라가 고민 끝에 짧은 메시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문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디려는데.

벌컥. 문이 열리더니 금발의 무섭도록 예쁜 아이가 들이닥쳤다.

황녀, 에리나 커티스 라스텔이었다.

그녀가 레이블라를 똑바로 마주 본 채로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깨어났구나, 레이블라. 만나서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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