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화 (8/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화

‘나는 진짜 엑스트라구나.’

해독초를 찾지 못한 지 수일 째.

번번이 약초 찾기에 실패하면서 레이블라는 자신이 엑스트라임을 새삼 절절하게 실감했다.

‘여주들은 필요한 게 바로 옆에 딱딱 나타나던데.’

솔직히 걔들은 따로 아이템을 갖다 바치지 않아도 괜찮았다. 가만히 있어도 가족이나 남주가 구해 주니까.

반면에 레이블라는 모든 고난을 홀로 버텨야 하는 불우한 엑스트라였다.

‘피 마르는 기분으로 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온 세상이 만만하고 쉬운 황녀, 에리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제보에 앉아서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고 있는 모습은 역시나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깜찍했다.

황녀의 시선은 테이블 위 작은 상자에 꽂혀 있었는데, 상자를 보면서 웃다가도 살짝 안색이 흐려지고, 또다시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시녀의 물음에 황녀가 “응!”하고 소리쳤다.

“아빠가 좋아하실까?”

“그럼요. 당연하죠. 오늘은 최고의 ‘감사의 날’이 될 거예요.”

감사의 날.

그간 소홀했던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날은 2년 전, 황제가 갑작스럽게 선포한 기념일이었다.

‘육아물 클리셰의 날이지.’

육아물 클리셰에 따르면, 아빠는 여주를 위해 사소한 것까지 다 기념하려 드는 법이었다.

예를 들어 여주가 처음으로 ‘아빠’라고 불렀을 때, 아빠를 보며 처음 웃었을 때, 처음으로 아빠에게 선물을 주었을 때 등등.

사소한 언행 하나하나 감동한 아빠는 그날을 기념하겠답시고 온갖 팔불출 행태를 보였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황녀가 처음으로 황제에게 “고맙습니다.” 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경일.

의미가 깊은 날이니만큼 에리나는 며칠 전부터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며칠 동안 “무슨 선물을 하면 좋을까?”하고 고민한 아이는 결국 대다수 여주가 그러하듯 아빠에게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에리나가 선택한 것은 손수 만든 음식이었다.

황제는 모든 것을 갖고 있고, 원한다면 모든 것을 가질 부와 권력이 있으니까. 사랑하는 딸이 손수 만드는 것은 의미가 남다르고, 소중할 테니 말이다.

문제는.

‘으앙 어떡해! 다 타 버렸어.’

요리를 시도하는 수많은 여주처럼 에리나 또한 요리를 못한다는 점이었다.

에리나는 이게 사람 먹으라고 만든 것인지, 살해 도구인지 모를 만큼 새카만 것과 입에 넣으면 자동으로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무언가를 창조해 내었다.

재료는 밀가루와 채소, 고기와 햄 따위였는데도 말이다.

충격적인 결과물이었지만, 주변인들은 칭찬을 마다치 않았다.

‘전하 보, 보기엔 이렇지만, 맛은 있을 거예요!’

‘네! 마, 맛, 맛…… 맛있어요!’

‘정말이에요! 와아, 맛있다!’

흉물을 맛있다며 꿀꺽꿀꺽 삼키는 모습을 보면서 레이블라는 처음으로 저 황녀 추종자들에게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역시, 광신도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에리나는 요리를 완성했고, 나른함이 밀려오는 이른 오후에 제 선물을 들고 황제의 궁을 찾았다.

만남의 장소는 황제의 궁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정원.

물론, 함께 티타임을 할 예정이었기에 시식가인 레이블라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동행해야만 했다.

“기대된다.”

히히. 기대로 가득 찬 눈빛으로 에리나는 레이블라가 미리 시식한 주스를 쪽 빨아들였다. 한껏 들이켠 음료로 에리나의 볼이 빵빵해졌다.

그때였다.

“딸.”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짙은 위압감을 풍기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한 미모의 남성이었다. 태양 빛처럼 화려한 금발에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를 지닌 사람.

“아빠!”

황제, 리암 커티스 라스텔.

이 세계관 내 최강자이자 여주인공의 아빠였다.

“우리 딸.”

황제가 토끼처럼 뛰어오는 에리나를 안아 올리며 인사했다. 붉은 눈동자가 한겨울에 쬐는 장작불처럼 따스해지며, 단단하게 굳어 있던 입매가 느슨하게 풀렸다.

“오늘은 0.1mm만큼 자란 것 같구나.”

“정말요? 그렇게 컸어요?”

지금까지 단 세 마디를 들은 것뿐이지만, 그 누구보다 황녀에게 미친 딸 바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펠리시티를 멸문시킨 이유가 단번에 설명되는 모습이었다.

“오는데 힘들지는 않았어?”

“에이, 바로 옆인데요. 뭘.”

“그래도 며칠 전에 말에서 떨어졌잖아.”

떨어진 것은 케인 애슐리였지만, 황제의 머릿속에선 딸이 위험했던 기억으로 탈바꿈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문에 당시 탔던 말을 보살핀 마필 관리사는 황녀를 시해하려 한 죄로 감옥에 갇혀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녀가 이제 혼자 말을 탈 줄 안다고 기뻐하며 물개 박수를 치던 사람이었는데도 말이다.

‘역시, 황녀 근처로도 가지 말아야지.’

레이블라가 다시금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결심을 되새기는 사이, 황제와 황녀는 어느새 가제보에 도착해 다정하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대화의 내용은 들려오지 않았다. 가제보에 걸린 보호 마법이 작동된 모양이었다.

힐끔, 고개를 가볍게 숙인 채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있던 레이블라가 조심스럽게 눈을 들었다. 그리고 저 멀리 떨어진 황제를 훔쳐보았다.

‘……저게 부모님을 죽인 놈이구나.’

처음에는 황제라는 말만 들어도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펠리시티가 무얼 잘못했는지 억울했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맞서야 할 상대는 거대한 태풍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 세상은 저 두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단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레이블라는 무의미한 저항을 하지 않기로 했다.

해갈할 수 없는 복수심을 품고 사는 게 더 고통스러울 테니까.

‘……그렇다고 용서할 건 아니지만.’

곱게 죽지 마라, 황제 놈아.

불손한 마음을 숨기듯 다시 시선을 내리려고 할 때였다.

마침, 에리나가 준비해 온 선물을 꺼내고 있었다. 그 음식에 살짝 당황하는 황제의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 음식을 맛있다는 듯이 먹어 치울 것이다. 육아물의 아빠니까.

역시나. 황제는 금세 표정을 수습하고 한껏 미소를 지었다. 뒤이어 기꺼워하는 얼굴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의 해맑은 얼굴을 보며 흐뭇해하는 아버지. 부녀를 둘러싸고 훈훈한 봄바람이 부는 듯했다.

“역시, 황녀 전하세요. 폐하께서 금세 기분이 풀리시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앞으로 비체라발리 공작이 올 때는 죄송하지만 황녀 전하께 와 달라고 미리 부탁을 드려야겠어요.”

……비체라발리 공작?

황제에게 쏠렸던 레이블라의 관심이 순식간에 시녀들에게로 향했다.

시녀들은 그녀가 엿듣는 줄도 모르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포스타리모 때문에 또 문제가 있으셨나 봐요.”

“네. 그래서 폐하께서 심기가 많이 불편하셨어요.”

“전하께서도 신경 많이 쓰고 계시더라고요. 제가 전하께 잘 말씀드려 볼게요.”

“고마워요, 햄프턴 시녀님만 믿을게요.”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을 보니 비체라발리 공작이 책의 보답으로 건넨 정보를 잘 이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잘됐어!’

레이블라가 치마 주름에 숨긴 손을 불끈 움켜쥐었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슬그머니 입가에 번졌다.

하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황제의 전담 시식가가 트레이를 들고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황녀 전하의 음식입니다.”

황녀의 음식이 다가오자, 곁에서 대화하던 시녀, 줄리아 햄프턴이 레이블라에게로 왔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 왔듯 자연스러운 손길로 케이크의 끝자락과 마시멜로, 쿠키 하나를 잘라 레이블라에게 건네었다.

“차는 말린 딸기가 들어간 밀크티로 할 거예요. 우유는 이쪽이고…….”

가장 맛이 없는 마시멜로를 입에 넣은 레이블라가 힐끔 가제보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썩은 표정으로 황녀가 준 음식을 먹는 꼴을 보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딱히 도움은 되지 않았다. 황제는 황녀가 만든 음식을 정말 맛있다는 듯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웃으면서, 넘치듯 행복하단 듯이.

……사랑은 사람을 미맹으로 만드는 걸까.

어떻게 저걸 맛있게 먹을 수가 있는 거지.

정말이지 레이블라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이내 입에 물었던 마시멜로를 뱉어 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물로 총총 뛰어가 입 안을 헹구어 바닥에 뱉었다.

그 행동에 시녀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여긴…….”

“맛이, 이상해요.”

“맛? 네가 지금 맛을 보려고 그 자리에 있는…….”

“그러니까.”

레이블라가 다시금 답을 하려는데, 쿨럭 하고 작은 기침이 예고도 없이 터졌다. 이어 혀끝이 얼얼하게 느껴지더니,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피였다.

아. 젠장.

그러니까, 이 미맹들아.

“독, 들었다고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