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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7)화 (7/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7화

……언제부터 있었지?

‘봐, 봤나?’

당연히 봤겠지! 봤으니까 저렇게 보고 있겠지!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레이블라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부주의했던 조금 전의 자신을 반성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몇 번이나 되새기며 다시 슬쩍 아이를 보았다. 아이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 사람이 있었네?”

이제 막 사람을 발견한 것처럼 태연한 체하는 꼴은 제가 생각해도 무척 어색했다. 하지만 레이블라는 뻔뻔하게 웃었다. 이미 일어난 걸 어쩌겠어!

“아, 안녕?”

친근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아이는 그런 그녀를 무심히 볼 뿐이었다.

‘말이 없는 아이구나.’

그래, 과묵한 게 좋지. 쓸데없이 사람을 비웃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얘는 누구지?’

대략 일곱에서 여덟 사이의 어린 소년은 모든 색을 다 삼켜 버릴 듯한 짙은 흑발에 요요히 빛나는 붉은빛 두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 그늘 속에서도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가 어찌나 희고 고운지. 왼쪽 눈 밑의 눈물점이 새하얀 도화지 위에 고심해서 찍어 놓은 듯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인상의 아이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 소설에서 가장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에리나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누구시기에 이렇게 주인공처럼 생기셨는지.

‘옷은 후줄근하네.’

귀족의 복식이긴 했지만, 유행이 한참 지난 데다 소매가 때가 타고 닳아 있었다. 게다가 단추를 꿰맨 실이 다른 것과 미묘하게 다른 색상이었다.

살림살이가 빠듯한 지방 출신의 귀족 아이인 듯했다.

‘꼭 북부 대공처럼 생겼는데.’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 예쁘장한 얼굴은 로판 클리셰, 북부 대공님의 외양 특징 아닌가.

혹시 소설에 나온 인물일까?

‘……아닌데.’

다시금 떠올려 봐도 이런 색상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

안 그래도 그 탓에 남주 추정이 쉽지 않아 소설 연재 때도 댓글이 남주 주식 장사로 떠들썩했던 기억이 있었다.

‘……황족인가?’

그러고 보니 붉은 눈동자는 제국 황족의 특징이었다. 황위에 앉을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서만 내려지는 빛깔이기에 그만큼 위압적이고, 고고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레이블라의 기억에 따르면, 작중에서 황족은 황제와 그의 딸, 에리나뿐이었다. 소설에도 에리나가 유일하게 남은 황가의 핏줄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름이 뭐야?”

궁금증을 참지 못해 조심히 물었다. 하지만 아이는 시선을 돌리며 아무런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뭔가 무기력해 보이는 아이네.’

인형처럼 예쁜 얼굴에서는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모습은 마치 생의 마지막을 앞둔 노인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나무에 기대어 있는 모습도 어쩐지 축 늘어진 것이 당장 숨을 깔딱깔딱 내쉬다 넘어갈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황녀를 보고 와서 그런가…….’

눈부실 만큼 환한 미소를 띠는 아이를 본 탓인지, 소년에게선 짙은 우울감이 묻어났다.

‘무슨 일 있나?’

쓸데없이 말을 건 건 아닌지 모르겠다.

레이블라가 후회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시선을 자연스럽게 내리까는데, 밟고 있는 바닥에 무언가가 보였다.

……돌?

가만히 보니 돌 옆에 잘 손질된 꽃도 한 송이씩 놓여 있었다.

누군가의 무덤이었다.

‘헉!’

깜짝 놀란 레이블라가 즉시 몇 걸음 물러섰다. 이제야 아이의 공허한 눈빛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 무덤을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명백히 이 무덤을 찾아 조의를 표하고 있었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미안해.”

고개를 깊게 숙여서 그에게 사과를 전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슬쩍 고개를 올려 보았으나, 아이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 버린 후였다.

레이블라는 서둘러 자세를 낮추어 제가 밟았던 자리를 조심스럽게 도닥였다. 손짓으로 발자국 흔적을 지워 내고, 잡초를 뜯어 평평한 자리를 예쁘게 다듬었다.

마지막으로 두 개의 비석 앞에 놓여 있던 작은 꽃송이도 정갈하게 배치했다.

‘그래도 뭔가 미안하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한 레이블라는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숲이지만, 울창한 나뭇잎 사이를 파고드는 빛이 간간이 있었다.

그 아래서 알록달록 예쁘게 피어난 꽃이 눈에 띄었다. 레이블라는 개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향기가 좋은 것을 골라내어 정성껏 손질했다.

두 개의 꽃다발을 완성시킨 다음, 아이에게 물었다.

“누구셔?”

그녀의 물음에 소년의 눈길이 느릿하게 레이블라에게로 되돌아왔다.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는 눈빛에는 네가 그걸 왜 묻느냐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레이블라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누군지는 알아야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지.”

“……부모님.”

귀찮은 듯 답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은 채였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부모님이었구나.’

레이블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덤으로 다가가 비석 앞에 꽃다발을 하나씩 놓았다.

그리고 양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쉬시는데 무거운 몸으로 밟아서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작은 몸이라 별로 무겁지는 않을 테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몇 번이나 사죄의 인사를 전하고 고개를 돌리자 아이가 무감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레이블라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부모님께서 용서해 주신 것 같아. 참 친절한 분들이신가 봐.”

레이블라의 말에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부모님이랑 사이가 안 좋았나.’

무심했던 아이의 분위기가 눈에 띌 정도로 서늘하게 변했다.

옅은 호기심과 함께, 아주 조금은 그의 마음에 공감했다. 레이블라 또한 아버지인 펠리시티 공작을 생각하면 원망이 앞서니까.

이 아이도 그러한 것일까. 그녀는 황궁으로 끌려오기 전,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던 때를 떠올렸다.

어쩐지 레이블라는 그에게 말해 주고 싶어졌다.

“앞으로는, 늘 좋은 일만 있을 거야.”

누군가가 자신에게 해 주었으면 했던 말을.

“이번 주는 평화롭게 지나갈 거고, 다음 주는 내내 웃을 일이 생길 거야. 또 한 주가 지나면 걱정했던 일이 풀릴 거고, 또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면 여태껏 근심했던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행복해질 거야.”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아이의 미간이 좁아지고 눈빛에 날이 섰다. 네가 뭘 알고 그딴 소리를 하느냐, 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치 사람의 시선을 받은 길고양이가 경계하듯 등을 꼿꼿이 세우는 것 같았다.

레이블라가 선뜻 답했다.

“그냥 그럴 것 같아서 한 소리야. 앞으로 너는 행복해지겠구나, 하고.”

“…….”

“내가 이런 거 잘 맞히거든. 그러니까 믿어 봐.”

“……그러는 본인은 불행하다면서.”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아이가 차갑게 말했다. 내뱉는 말속에는 비꼼이 가득했다.

레이블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래. 세상 사람들 다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불행한 것 같고.”

“…….”

“하지만 나도 행복해질 거야.”

지금은 매일같이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고 있지만, 버티다 보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럴 자신이 있거든.”

이 빌어먹을 만큼 부조리한 세상에서 벗어날 자신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마친 레이블라는 무덤 앞에서 쪼그린 채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이에게 다가가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아이가 거칠게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레이블라가 힘껏 잡고 눈을 감았다.

“내 힘을 나누어 주는 거야. 네가 행복한 미래를 볼 수 있게.”

“…….”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눈을 뜨고 씩 웃은 레이블라가 손을 놓았다. 가까이서 본 아이의 모습은 정말로 말문이 막힐 정도로 예뻤다.

특히, 왼쪽 눈 아래 눈물점이 그야말로 예술적이었다.

‘얘가 주인공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남주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걸까.

혀를 내두르며 그를 빤히 보는데, 그의 시선이 레이블라에게 향했다. 딱 마주친 눈빛이 냉랭했다.

그는 위협하려고 한 것 같지만, 예쁘장한 얼굴 때문인지 새초롬하게만 보였다. 마냥 귀여웠다.

그래서 장난치듯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었다.

“고맙지? 고마우면 혹시 매니시 나무라고 알아? 그 주변에서만 보라색 꽃이 피는데, 꽃잎이 여섯 장에 달콤한 향이 나는 꽃이야. 그 꽃을 보게 되면 나에게 알려 줘.”

“…….”

“내가 그 꽃 찾고 있거든. 해…… 아니, 내가 병이 있는데, 그 꽃이 꼭 필요해.”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대충 말을 마친 레이블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안녕.”

산뜻한 인사와 함께 돌아섰다. 황녀의 놀이 시간이 끝날 때가 되었다.

혹시나 늦었을까 싶어 다급히 숲 밖으로 총총 뛰어갔는데 다행히 아직 황녀는 디저트를 먹으며 자기 사람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푸르른 하늘 아래로 참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한번 기지개를 쭉 켠 레이블라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치열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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